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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은 정관복원술 후 한 달가량 쉬었다가 필리핀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렇지만 여전히 일은 풀리지 않았다. 사업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필리핀 사람들 밑에서 몇 푼 받지도 않는 돈을 받고 일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대개 막노동 일인데, 해봐야, '너 같은 한국인이 왜 이런 일 하느냐?', '너 때문에 우리 일자리 없어진다'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형과 같은 한국인에게 주어질 만한 필리핀 주재 한국 회사도 없었다. 형이 그동안 해놓은 사무직쪽의 경력이나 능력도 없기에 좋은 회사에는 취직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로지 성실하게 일하는 것 뿐. 

 

형은 자신을 채용해주겠다고 말한 한 한국인 사업가의 말만 믿고 거의 6개월 이상의 시간을 낭비해버렸다. 내가 봐도 답답할 정도였다. 다른 곳을 알아보라고 해도 '곧 될 것'이라면서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러나 결국 취업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모아두었던 돈도 이래저래 까먹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에 기다리고 기다렸던 아이가 태어났다. 모처럼 형님에게 찾아온 큰 행복이기도 했다. 아이가 태어났다고 연락이 왔다. 나에게 작명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우리 아이 두 명의 이름을 모두 지어줬기 때문에 나한테 부탁한 것이다.

 

예전에 뒤적이던 작명을 꺼내들고 좋은 이름을 만들어보려고 뒤적거렸다. 형처럼 역경에 부딪히더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심지있게 자기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기둥 주(柱)에 영화로울 영(榮)을 넣어서 '주영'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여러가지 이름이 있었으나, 어머니와 형 사이에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겨우 만든 이름이었다. 그래도 음양오행과 수리오행 모두 좋게 나왔다. 형님에게 A43,4장 분량으로 작명 배경과 운세를 보내줬다.

 

정주영(鄭柱榮) 작명 배경

 : 세상여파나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기둥같이 단단한 심지를 가지고 영화롭고 명예롭게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주영이라는 한자 이름을 지음.

 

사실 나는 이런 작명 자체를 믿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디 우리 조카는 형님의 인생을 영화롭게 만들어줄 아이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름을 지었다.

 

형내외는 오랜만에 삶의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생활고의 압박은 갈수록 심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와 내가 필리핀을 찾아가겠다는 것을 한사코 싫어했다.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아 집안이 엉망이라 보여주기가 민망하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어머니 만나는 것도 거절할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도와주지 못하는 것이 마음 아팠다.

 

한 번은 와이프랑 크게 말다툼을 한 적이 있었다. 형님 때문이었다. 가끔 형에게 소포를 보내주곤 했다. 형이 좋아하는 오징어나 쥐포와 더불어 각종 생활용품이나 옷, 모자, 슬리퍼 등의 물품이었다.

 

그런데 와이프는 어머니와 내가 '형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안 해준다, 형님이 우리를 너무 찾지 않는다, 형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아 서운하다'고 말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화를 냈다. 와이프는 그렇게 백반증이 드러나지도 않는데 스스로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하곤 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 역시도 그랬다. 방법은 형이 스스로 극복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 역시 그렇게 형을 타일러왔던 면도 있었다.

 

와이프가 형님의 처지를 이해못한다고 화를 냈다. 하지만 사실 내가 형을 도와줄 수 없어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괜스레 아내에게 화를 낸 것이다. 사실상 나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을...

 

형은 그렇게 가족들에게도 일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까운 친척들조차 보지 않은 지가 20년이 넘었다. 다들 형 얼굴 한 번 보기 힘들다고 한 마디씩 하곤 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얼마나 힘들었지 모를 것이다.

 

 우리 부모님
우리 부모님 ⓒ 정철상

 

부모님은 늘 형을 늘 안쓰러워했다. 일종의 죄의식으로 평생을 살았다. 무슨 천생의 업보로 이 아이가 이런 병을 앓게 되었는가하고 힘들어했다. 어머니는 늘 형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형의 인생은 갈수록 꼬이고만 있었다.

 

나 역시 형을 도와주고 싶었다. 돈 좀 많이 벌어서 형이 가게라도 하나 꾸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보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처가댁의 처남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우리는 부모님의 재산이나 처가댁의 재산은 한 푼도 받지 말자고 말했다. 사실 돈도 없는 어른들이라 남길 유산도 몇 푼 없다. 하지만 몇 푼이라도 있다면 힘든 형에게, 힘든 처남에게 남겨주고 싶다.

 

나 역시 늘 형님에 대한 부담감이 느껴진다. 어떻게 하면 형님 같은 사람을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스러웠다. 내 집안의 식구조차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남들을 가르친다는 부끄러운 자책감도 있었다.

 

아내는 우리 어머니의 자유로운 육아 교육이 전혀 상반된 두 사람을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아주셨다. 모든 것을 다 헤아려주시고 어떤 것이든 포용해주셨다. 그래서 나이 마흔이 훌쩍 넘은 형을 아직도 받아주고만 있다는 것이다.

 

모두 받아주다 보니 극단적으로 좋은 결과가 날 수도 있었지만, 좋지 못한 결과도 나타나지 않은 것인가 하고 아내가 말했다.

 

아내의 말에 동의하는 바는 아니다. 나는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는 크게 나지 않는 것 같다. 아주 작은 차이가 전부를 바꿔버리는 것 같다.

 

가끔 '차라리 내가 백반을 앓았다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랬다면 형처럼 고생하며 살지 않고 견디어 나갔을 것인데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지만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형보다 더 피폐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으리라.

 

그래서 나 역시 늘 부담스러운 생각이 있다. 형을 도와주고 싶은데, 근원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하고 고민스럽다.

 

형님의 인생을 소설로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몇 가지만 좀 더 흥미 있게 윤색하면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데 그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문제는 내게 그만한 필력이 없다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울 뿐...

 

형은 현재 저택에 쓰이는 수석, 정원석을 채석해서 수출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피부가 탈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한다. 괜스레 고생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많이 든다.

 

늘 큰 아들에게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온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형님이 떳떳하게 자리 잡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개인블로그 정철상의 커리어노트(www.careernote.co.kr)과 다음뷰에게 게재되었습니다.


#질병에 걸린 아이를 보는 부모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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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개발연구소 대표로 대구대, 나사렛대 취업전담교수를 거쳐 대학, 기업, 기관 등 연간 200여회 강연하고 있다. 《대한민국 진로백서》 등 다수 도서를 집필하며 청춘의 진로방향을 제시해 언론과 네티즌으로부터 ‘젊은이들의 무릎팍도사’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정교수의 인생수업’이라는 유튜브를 운영하며 대한민국의 진로성숙도를 높이기 위해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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