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戰地)에서 부상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군인은 국적을 불문하고 보호하고 치료하여 주며 그들을 구호하는 요원이나 시설을 공격으로부터 보호한다."
전쟁이나 무력분쟁이 발생한 경우 부상자, 병자, 포로 등을 보호해 전쟁의 참화를 줄이기 위해 탄생한 제네바협약의 주 내용이다. 제네바협약은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중 솔페리노 전지에서 인도주의 활동을 한 뒤 국제적십사를 창시한 앙리 뒤낭의 주창에 따라 생겼다.
제네바협약은 1864년에 처음 제정된 뒤 1949년까지 계속 내용이 확대됐다. 그 중 '전지(戰地)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개선에 관한 조약'은 가장 이른 1864년에 제정됐다.
그로부터 145년이 흐른 2009년 7월 대한민국. 외국의 군대와 전쟁을 벌이고 있지 않는데도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새삼 1864년에 제정된 제네바협약을 이야기하고 있다. 평택 쌍용자동차 사태 때문이다.
전쟁터 같은 쌍용차 공장... 145년 전 '제네바협약'도 안 통해
쌍용차 노조의 점거 농성이 어느덧 70일 가까이 됐다. "전쟁 같은 상황"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건 지난 20일부터다. 이때부터 노동자들이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는 공장 안으로 식량은 물론이고 물과 가스 공급이 중단됐다. 공장 주변은 경찰이 포위했고 일반인 출입은 통제됐다. 의사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와중에 거의 매일 쌍용차 공장 상공에서 경찰 헬기가 최루액을 뿌리고 있다. 최루액은 스티로폼도 녹일 만큼 독성이 강하다. 경찰의 '테이저 건'도 등장했다. 날은 뜨거운데, 하늘에서는 최루액이 쏟아지는 상황. 한마디로, 공장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785명(노조 쪽 주장)의 쌍용차 노조원들은 먹고 자고 싸는 기본 생활도 못하고 아픈 몸도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하고 있다.
한상균 쌍용차 노조위원장은 자신들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강제수용소, 그 이상이다. 사람은 물론 짐승도 살 수 없는 상황이다. 사람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감옥에서도 없는 비인격적인 말살 행태가 쌍용차 내부에서 자행되고 있다."
경찰은 봉쇄 당시 공장 안에 약 20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이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창근 쌍용차 노조 기획부장은 "며칠 동안 계속 주먹밥만 먹고 있고, 식수는 모든 물을 모아서 끓여 먹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강제수용소' 같은 상황은 몸이 아픈 사람에게 치명적이다. 공장 안에는 당뇨병과 혈압 환자, 그리고 최루액으로 피부 손상을 입은 다수의 환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창근 기획부장은 "약 100명이 병원 치료가 필요한 환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땀과 최루액을 씻어낼 물도 없는" 이들에게 의사 진료는 무척 사치스러운 일이 됐다. 노조 쪽은 27일 의사와 약품을 요청했지만, 정문을 지키고 있는 비해고 노동자들은 의료진 출입을 막았다. 이들은 "상처 소독만 하고 나오겠다"는 의료진의 하소연을 "점거 풀고 나오면 다 해결된다"는 말로 막았다. 결국 이 때문에 의사 없이 약품만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물, 식량, 가스 끊기고 의료진 출입도 차단... "강제수용소 그 이상"
그렇다면 평택 쌍용차 공장은 1864년에 제정된 제네바 협약도 적용할 수 없는 '인정 사정 볼 것 없는' 막나가는 현장일까?
사람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전쟁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 확실하다. 포위된 노동자들이 '결사항전'을 외치고 있는 것도 꼭 전쟁을 연상시킨다. 많은 사람들은 무리한 공권력 진압은 '용산 참사'를 불러올 것이라고 염려하고 있다.
이 때문에 노사 양쪽은 "인도적 실천을 다한다"고 천명했다.
회사쪽은 이미 지난 24일 "노조가 요청하면 인도적 차원에서 의료진 출입을 허용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단 "회사가 지정한 병원의 의료진만 출입시키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면서 회사쪽은 "우리는 이미 환자 치료를 위해 의료진을 들여보내겠다고 밝혔지만, 노조가 요청하지 않았다"며 "의사에도 좌와 우가 있느냐, 환자 치료만 받으면 되지 뭘 그렇게 따지는 게 많으냐"고 말했다.
즉 회사 쪽의 주장은, 우리는 의료진을 보내려 해도 노조가 요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조는 "우리는 이미 언제든 어떤 의사든 모두 환영한다고 천명했다"며 "하지만 회사는 자신들의 말과 달리 의료진을 보내지 않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노조는 "회사가 진정으로 인도적으로 생각한다면 왜 굳이 '회사가 지정하는 의사'만을 고집하느냐"며 "또 스스로 인도적 결정을 해서 공장으로 들어오겠다는 의사들의 출입을 막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발하고 있다.
실제 회사는 아직까지 의사를 공장으로 들여보낸 적이 없다. 또 "인도적으로 생각한다면 노조의 요청이 있든 없든 의사를 먼저 보낼 수 있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노조가 새총 등을 쏘고 화염병으로 위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젓고 있다. 회사는 28일에도 약품을 들고 공장 안으로 들여가려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의료진의 발길을 정문 앞에서 막았다.
그래서 평택 쌍용차 공장은 '위생병'도 없는 대한민국 속의 작은 전쟁터고, 이곳에서 인권은 끊긴 식수처럼 하얗게 말라 죽어 있다.
법과 인정 사정 다 끊긴 현장에 곡 소리만 요란
식량, 식수, 의료진을 끊는 이른바 '아사 작전'은 공권력의 주요 진압 방법 중 하나다. "그렇게 해야 진압할 때 유혈 충돌이 줄어든다"는 게 경찰의 말이다.
회사는 "점거 농성 풀고 나오면 밥도 먹고 물도 마시고 몸도 치료할 수 있다"며 "점거 농성만 풀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쉽고 간단명료한 논리다. 하지만 쌍용차 문제는 이런 쉽고 간단한 논리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모든 국민은 성별, 연령, 민족, 종교, 사회적 신분 또는 경제적 사정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아니하고 응급의료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멀리 제네바협약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3조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쌍용차 공장에서는 노사 대화가 끊긴 뒤 물, 식량, 의료진마저 끊겼다. 서로의 사정을 살피는 인정이 끊겼으니 법이 통할 리 없다.
공장 안 노조원들은 "함께 살자"고 밖을 향해 절규하고, 공장 밖 사측은 "너희들만 아니면 살 것 같다"고 울상을 짓고 있다. 그리고 노조원 가족과 의료진은 "최소한 사람은 살게 해줘야 할 거 아니냐"고 울부짖는다.
법과 인정이 끊긴 현장에는 곡소리만 요란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