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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웹진 <씨네트워크> 특별기획 '고발'을 시작합니다. <씨네트워크>가 '고발'하려는 대상은 지난 시절 권력기관들에 의해 자행된 조작사건들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진실규명'한 광주 전남·북 지역 '인권침해' 사례들입니다.

<씨네트워크> 특별기획 '고발'은 진실화해위가 발간한 '진상조사보고서'의 기본 사실들을 토대로 합니다. 이미 규명된 사실인데도 거듭 '고발'하는 까닭은, 당대의 '공범'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기성 언론이 진실화해위의 규명을 가볍게 다뤘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또한 정부 기록물이 채택할 수밖에 없는 '첨삭'을 보완하고픈 욕망이 작동해서이기도 합니다.

<씨네트워크> 특별기획 '고발'은, 그러므로 공적 기록을 좀 더 풍부하게 보충해 많은 사람들과 그 진실을 공유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단 한 명이라도 '고발'에 동의하는 이들이 늘어났을 때 잔혹한 역사의 '반복'을 막을 수 있다는 믿음이 특별기획의  이유입니다.

'고발'의 첫 사례는 1982년 전북 군산에서 벌어진 '오송회' 사건입니다. 이 사례는 사건 피해자 9명(한 분은 작고하여 유가족의 동의를 얻음)의 협의 하에 세 분의 대표진술과 현장취재를 기초로 이루어졌으며 총 3회에 걸쳐 발표될 예정입니다. <씨네트워크 주>

 1982년 11월 일하던 중 갑자기 연행되어 '좌경용공세력의 앞잡이'로 몰린 당시 45세의 조성용(73) 씨는 26년 만에야 공식적으로 법적인 누명을 벗었다.
1982년 11월 일하던 중 갑자기 연행되어 '좌경용공세력의 앞잡이'로 몰린 당시 45세의 조성용(73) 씨는 26년 만에야 공식적으로 법적인 누명을 벗었다. ⓒ 씨네트워크 모철홍

1982년 그는 남원KBS의 방송과장이었다. 국립영화제작소에 소속된 감독이기도 했다. 그는 한 달에 한 편씩 '대한뉴스'를 만들었다. 당시 전국 극장에서 영화 시작 전에 의무적으로 상영되던 대한뉴스는 감독 대여섯 명이 돌아가면서 한 편씩 만들어냈다. 그도 그 감독 중 한 명이었다.

11월 어느 날 그는 방송국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연행되어 갔다. 경찰은 자신더러 '간첩'이라 했다. 그것도 빨갱이 교사집단을 조종한 수괴, 우두머리라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오래도록 '대한뉴스'는 독재정권의 나팔수로 상징되곤 했다. 그 뉴스를 만드는 제작자가 간첩으로 몰리다니. 그런 일도 가능할까?

그는 1982년 11월 19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연행돼 2년 6개월 실형을 살았다. 2007년 6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그가 연루된 사건 자체가 군사정권의 조작사건이었음을, 즉 허구였던 것으로 규명했다. 그리고 연행된 지 만 26년 만인 2008년 11월 그를 비롯한 사건 피해자들은 광주고등법원에서 재심을 받고 '공식적으로' 누명을 벗었다.

그러니까 그가 간첩이 아니었던 건 분명하다. 그 시절은 과연 어떤 시대였기에 대한뉴스 제작자도 간첩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걸까. 이제는 새하얀 세월을 머리에 인 그 사람, 조성용(73)씨가 허허롭게 웃는다. '산천초목도 다 떨었다'던, '그 덫에 걸려들면 누구도 소용없었다'던 국가보안법의 시대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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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회' 사건이란?
오송회 사건(1982년)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이 집권초기 공안정국을 강화하면서 교육계의 젊고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시국사범'으로 몰아 처벌한 대표적 조작사건이다. 1982년 11월 군산경찰은 월북시인의 시집을 읽었다는 핑계로 군산제일중고 교사들을 연행했다. 이 사건을 넘겨받은 전주도경은 이들을 10~23일 가량 대공분실에 불법감금하고, 고문과 가혹행위를 일삼아 허위자백들을 끌어냈다.

전북도경은 '이적단체 오송회를 결성하고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찬양 고무했고, 일부는 모임 결성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며 이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당시 연행자들은 이광웅(당시 42세, 1992년에 사망), 박정석(37), 전성원(27), 이옥렬(28), 황윤태(30), 강상기(35), 채규구(30), 엄택수(30)(이상 군산제일중고교 교사들), 조성용(45·KBS남원방송국 방송과장) 등 모두 9명이었다.

1983년 5월 전주지방법원은 이들에게 실형과 자격정지를 선고했다. 이들은 고문에 의한 허위진술임을 주장하며 항소했지만, 2심에서 광주고법은 1심보다 더 높은 형량을 부과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기각하고 2심의 판결을 그대로 확정해버렸다. 결국 사건 관련자 9명은 모두 실형을 복역했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오송회 사건이 군사정권기 국가보안법을 남용해 조작한 사건으로 규명했고, 피해자들은 2008년 11월, 사건 발생 후 26년 만에 열린 광주고법 재심에서 정식으로 '무죄'를 입증 받았다.
군산제일고등학교 뒤편 오솔길을 따라가면 야트막한 숲이 나온다. 교사들은 수업이 없는 때면 그 숲에서 쉬곤 했다. 막걸리를 몇 병 받아다가 갈증을 달래기도 했다. 새순이 돋고 해가 기우는 봄숲이 평화로웠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4월 19일이었다.
"형. 오늘이 4·19네요."

둘러앉은 교사들의 기분이 일순간 스산해졌다. 쿠데타로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지 2년째인 82년 봄, 4·19가 국가기념일에서 제외되어 버렸다. 역사가 역주행하면서 순식간에 4·19도 미아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우리라도 4·19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말만 선생이지, 꼴이 말이 아니네요. 영령들한테 용서를 빕시다."

그들은 막걸리 몇 병 컵에 따라놓고 잠시 묵념을 올렸다. 2년 전인 80년 봄 남쪽 광주에서는 피바람이 불었다. 그 흉흉한 이야기가 4·19에 덧보태졌다. 막걸리 한두 잔 올린 것뿐이지만, 용서를 빌어야 할 영령들이 늘어났다.

여기까지가 세간에 알려졌던 오송회 사건의 내용(?)이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아! 교육계까지도 붉은 물이 들어버렸구나"하고 경악했다던 사건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경악했다는 '위상'답지 않게 내용이 부실해 보인다. 피해자들이 강조하듯, 이 사건은 실체가 없다. '막걸리를 마시다가,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4·19 영령들을 떠올리며 묵념을 올렸다.' 이 문장 어디에도 '이적단체 구성'이라는 혐의가 끼어들 여지는 없어 보인다.

오송회 사건은 군사독재 시절 숱한 조작 사건 중에서도 유난히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검찰의 창의성이 빛난 사건이었다. 막걸리를 마시다가 혐의를 받았으니 소위 '막걸리 보안법'의 진수를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오송회 회원으로 지목됐던 교사 이광웅·박정석·전성원·황윤태·이옥렬씨, 이들의 수괴로 지목된 조성용씨, 모임 결성을 알고도 당국에 알리지 않았다던 교사 채규구·강상기·엄택수씨. 이들 '당사자' 아홉 명은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혀서도 자신들이 결성했다는 '오송회'가 무엇인지 몰랐다.

"형. 우리가 모임을 결성했다는데 이름이 오송회래요. 뭔지 알아요?"
"그게 도대체 뭔데?"

 2009년 여름 채규구(오른쪽)씨와 조성 씨가 군산제일고 뒷산에 올라 82년 봄을 떠올린다. 회한의 숲이다.
2009년 여름 채규구(오른쪽)씨와 조성 씨가 군산제일고 뒷산에 올라 82년 봄을 떠올린다. 회한의 숲이다. ⓒ 씨네트워크 모철홍
'오송회'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82년 11월 전주 거리의 어느 어둔 방. 밖에서 보면 조용한 단독주택이지만, 내부는 생지옥과 다름없는 고문실이었다. 전북도경 공안과로 줄줄이 끌려간 교사들은 이 방에서 고문을 받았다. 끝없는 고문의 가학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젊은 그들은 처음엔 '살려달라'고 했다가, 나중엔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했다.
애초 경찰이 만들어낸 이름은 오'성'회였다. 교사들이 모두 익산(당시는 이리) 남'성'고 출신 선후배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전 남성고 안나왔어요."

고문으로 혼미해진 황윤태씨가 간신히 말했다. 그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어리둥절해진 수사관들이 다시 머리를 맞댔다.

"그 학교 뒷산에 소나무 다섯 그루 있잖아. 오송회로 해, 오송회."

뒷산 나무에도 주목할 만큼 '낭만적'이었던 그들의 '각본'에 따라, 이들 교사들은 '오후 5시에서 6시 사이에 소나무 아래서 모임을 결성'한 것이 되었다. 수사관들이 교사들을 고문할수록, 없는 과거도 만들어지고, 한번 만들어진 죄는 큰 죄로 뻥튀기되었다. 각본에 맞는 자술서들은 그렇게 작성됐다.

"전 그 시간에 거기 없었습니다. 특강 있어서 일찍 학교로 내려갔어요."

또다시 '각본'에 있어서는 안 될 진술이 나왔다. 낭패였다. 뒤져보니 황윤태씨는 그날 영어특강을 하러 내려갔음이 확인됐다. 명명백백한 알리바이.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격이었다. 검찰은 희한한 논리로 공소를 밀어붙였다. '이광웅·박정석 두 사람은 모임 결성을 했고, 나머지는 소극적이지만 지지할 뜻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 편면적 공범으로 봐야 한다.' 이 주장은 재판부에서도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오송회는 유죄다. 땅! 땅! 땅!'

'편면적 공범'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 반국가단체와 교류가 없어도, 이를 지원할 '마음'을 품고 있으면 공범이 된다는, 국가보안법의 '논리'였다. 열 길 물속보다 알기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재단하고 죄를 부과한다니, 이는 논리라기보다 억지주장에 다름 아니다.

가령 황씨가 '지금은 특강하러 내려가야 하지만, 이따가 다시 합류해서 내가 오늘은 형들한테 막걸리 대접 한번 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내려가면 '이적단체 오송회를 지원할 의사가 있는' 편면적 공범이 된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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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은 '교육계에도 침투한 좌경용공 세력을 발본'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오송회 사건은 몸뚱이를 불리고 '위상'을 갖추어야 했다. 지방의 젊은 교사들이 만들었다는 소모임 정도로는 '위협적'일 수 없었다. 대어(大漁)가 필요했다.

박정석씨는 지옥 같은 고문 속에 있었다. 테이블 양쪽에 봉을 걸쳐놓고 사람을 매달아 고문하는 '통닭구이' 고문, 피부를 커피색보다 더 새까맣게 태워버린 전기고문, 수건을 덮어놓고 콧속으로 짬뽕 국물을 부어 폐가 찢어지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 짬뽕고문. 이런 고문들도 차마 상상키 어렵지만, 그에게 더 고통스러운 것은 잠을 못 자게 하는 수면고문이었다.

잠을 못 자고 버틴 날이 얼마나 됐는지 박씨는 도통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연행되어온 때가 11월 2일, 대출을 무사히 성사시킨 후 동료교사들에게 저녁식사로 한 턱을 내고 있던 날이었다. 수사관이 그에게 알약을 주더니 '이거 먹고 잠을 자라'고 했고, 그는 처음으로 잠이 들었다. 고문실 TV에서는 김득구가 권투경기를 하고 있었다.

와아아 하는 관중들의 함성이 혼미하게 들렸다. 훗날 확인해보니, 비운의 복서 김득구가 세계 라이트급 챔피언 타이틀전을 치르다 쓰러진 날은 82년 11월 14일, 사망한 날짜는 11월 18일. 그러므로 박씨가 처음으로 잠을 잔 날도 14일이었다. 수사관들은 그에게서 무려 12일간이나 잠을 빼앗은 것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강제로 자술서를 쓰고 또 쓰다 보니, 나중에는 정말 자신이 언젠가 손을 얹고 오송회를 결성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환각, 파라노이아(paranoia)였다. 수사관이 윽박을 질렀다.

"배후인물을 대라!"
"그게 뭔대요…."
"배후인물을 불으라니까!"
"그…런 것… 없어요…."
"안 불면 옆방 선생이 죽어!"
"도대체 뭐가 있다는 건지…."

다른 질문이 박씨를 가격했다. 존경하는 인물을 적으라고 했다.

"신채호가 누구야?!"
"<조선상고사>를 쓰신 역사학자입니다… 돌아가신 분이죠."
"누가 죽은 놈 쓰라고 했어? 산 놈을 쓰라니까!"

졸음이 쏟아졌다. 현실과 환상이 오락가락, 볼펜이 움직였다. 조.성.용. 고등학교 선배이자, 이광웅 시인과 함께 셋이서 막걸리 잔을 자주 기울이던 형님. 해박한 지식으로 늘 후배들의 시야를 넓혀주던 선배.

흑백TV 속에서 일어나지 못한 김득구는 결국 사망했고, 옆방에선 다른 동료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박씨는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갔다. '존경하는 선배'였던 조성용씨는 '붉은 교사들'의 조종자가 되어 연행됐다. 방송국 중견간부이자 국립영화제작소 소속 감독으로 세계의 다양한 영상물들을 접하는 위치. 이를 잘 버무리면 '공산국가의 영상물을 접하면서 그 사상과 내용을 사회 곳곳에 퍼뜨릴 수 있는 위험분자.' 그리고 '수괴'의 나이로는 많지도 적지도 않게 적당한 45세. 수사관들에게 조성용씨는 그리 아쉽지 않은 '대어'였다.

 82년 12월 8일 이들의 구속기소를 대서특필한 당시의 신문.
82년 12월 8일 이들의 구속기소를 대서특필한 당시의 신문. ⓒ 네이버 디지털뉴스아카이브
지금 육순의 나이를 훌쩍 넘겨버렸음에도, 박정석씨는 그때를 떠올리면 여전히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기어이 옛일로 묻어둘 수 없는 상처가 있다. 서울에 살고 있는 그는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허리가 너무 아파 벽을 짚고 걷다가, 기어서 다니다시피 한 적도 있다. 아무래도 27년 전, 허리를 거세게 짓밟힌 것이 나이가 들면서 후유증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굴욕감, 패배감이 너무 컸어요. 권력의 덫에 내가 빠져버렸구나 싶고. 몸부림을 칠수록 상처가 더 커져 버리는 그런 덫 말입니다."

11월 19일 조성용씨가 끌려온 곳은 전북도경 대공분실. 그곳에는 큰 도표가 걸려 있었다. 처음에는 경찰 조직도인 줄 알았다. 다시 보니, 이 사건의 인물표였다. 미리 짜인 이 시나리오에서 애초의 '대어'는 5·18의 마지막 수배자였던 윤한봉(1948~2007)씨였다.

먼저, '이광웅이 서울에 가서 윤한봉을 몰래 만나 결사를 도모했다'는 혐의에 관한 수사가 있었다. 하지만 윤씨가 한참 전인 81년 4월 미국으로 밀항해 건너갔다는 사실이 금세 밝혀졌다. 오송회 교사들이 서울대 운동권 학생들과 연계하려 했다는 시나리오도, 인권운동으로 유명했던 신부와 엮어보려는 각본도 허사로 돌아간 직후였다. 결국 '맛난' 대형 각본들이 차례로 물을 건너간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끌려왔구나."

조씨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살아 있는 윤한봉을 놓치고, 서울대생과 신부를 거쳐서, 죽은 신채호를 딛고, 조씨에 이르러서 그 '대어 사냥'이 멈춘 것이다. 이렇게 오송회는 만들어지고, 수괴도 채워졌다. 이를 알고도 고발을 안 했다며 강상기·채규구·엄택수씨 등 동료교사 3명을 더 엮어, 사건을 터뜨릴 수 있었다.

82년 12월 9일 이 사건은 기소 상태에서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불온서적을 읽고 북괴방송을 듣고 학생들을 선동했으며 불온 서클을 조직한 교사들.' 1심에서 전주지법 재판부는 많게는 징역 4년과 자격정지 4년을 선고하고, 적게는 징역 8월과 자격정지 1년까지 선고유예라는 판결을 내렸다. 교사들은 이 선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도무지 우리가 뭘 했냐는 말이다!'

이들은 83년 7월 광주고등법원에 항소했지만, 도리어 더 높은 형량들이 선고돼 버렸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 피고인 등 9명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직책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북괴를 찬양하는 불온 서클인 오송회를 조직, 동료교사와 제자 등에게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등의 행위를 한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기 때문에 1심의 형량보다 무거운 형량을 선고한다!"

지푸라기를 잡듯 그들은 최종심으로 달려갔지만, 대법원은 그해 겨울 상고를 기각해 판결을 확정해 버렸다. 1982년 12월 신문들은 재판에 회부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마치 검찰조사 결과가 확정사실인 양 떠들어대던 것처럼, 대법원의 황당한 판결에 의문을 제기하는 곳은 아무도 없었다. 애당초, 전두환이 이 사건의 개요를 보고받고서 탁월하다며 '무릎을 탁 쳤다'니, 이들 교사들은 빠져나갈 길이 없었으리라.

이들은 모두 실형을 복역했다. 길게는 7년부터, 짧게는 1년까지 옥살이를 했다. 광주·대구 등지에서 하나 둘 옥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이들에게, 군산은 이전과 다른 표정으로 다가왔다. 더 이상 평온한 삶의 터전이 아니었다. 그리고 감옥에 있던 기간만큼의 자격정지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격정지는 교사로서의, 또는 방송국 피디로서의 자격을 빼앗는 것을 의미했다.

덧붙이는 글 | 문화웹진 씨네트워크(www.cnetwork.kr)가 연재하는 이 기획은 5·18기념재단의 취재지원과 진실화해위원회의 협조로 만듭니다.



#오송회#간첩#조작#국가보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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