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무게 60㎏, 키 164㎝, 종아리와 허벅지에는 셀룰라이트와 근육이 뭉쳐 같은 여성 동지로 하여금 동정심이 일게 만드는 코끼리 다리. 10시간 동안 앉아서 일하느라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정직하게 볼록 나와 버린 뱃살. 이게 저의 현재 몸 상태입니다. 여자 몸은 40㎏대가 돼야 정상일 거라 생각하는 남자들 때문에 종종 마음고생을 하지만 나름 씩씩함을 잃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날씬함과 거리가 먼 지금 상태마저도, 운동과 음식 조절 없이는 유지할 길이 없습니다. 남들만큼 먹으면 남들보다 더 찌는 체질이라 '운동'은 제가 평생 짊어져야 할 숙제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저것 알아보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의 약속이 떠올라 무턱대고 폼나보여서 무술 동아리 중 하나를 정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두 달 만에 9㎏ 감량... 행복했던 순간도 잠시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된 검도는 일상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건강한 취미가 되었습니다만, 애초부터 이렇게 바람직한 마음가짐으로 운동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요. 처음에는 단순히 몸을 움직여 열량을 소비하는 운동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두 달 안에 자그마치 9㎏를 감량했는데 그 몸무게 유지하느라 나름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별로 대단한 요법을 한 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힘들었지요. 음식 조절하겠다고 항상 양이 적은 도시락을 들고 다녔고, 걸어서 오르고 내리는데 20분 걸리는 언덕을 꼬박꼬박 걸어 다니면서 체육관에 갔고요.
간식은 일체 사절. 꼭 먹고 싶다면 열량이 100㎉가 넘지 않는 음료수를 마시고, 하루 섭취 칼로리를 일일이 계산해서 남는 칼로리가 있을 때만 먹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지킨 원칙은 간단했습니다. 적게 먹고 많이 운동하는 것. 하루 섭취 칼로리를 1500㎉로 제한했는데 실제 성인 여성 섭취 칼로리가 약 2300㎉ 정도이니 식탐이 강했던 자신이 참 열심히 참았습니다.
그때는 살 빼는 재미에 빠져 무리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일단 살을 빼니 강의실에서 "와, 이렇게 팔뚝 가는 분이 검도하세요?"라고 말을 거는 남자 선배들이 생겼으며, "어머 기집애 운동 하더니 완전 쫙 빠졌네?"라는 여자 동기들의 부러움 섞인 말을 들으면서 내 몸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기까지 했답니다.
게다가 가장 좋았던 것은 55, 66 사이즈밖에 없는 우리나라 여성복 시장에서 77사이즈를 입는 여자로서 겪었던 비애를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죠. 아주 마른 옷만 아니라면 이것저것 원하는 디자인의 옷을 사이즈 구애받지 않고 고를 수 있다는 것, 한참 외모를 꾸미는 데 재미를 들인 20대 초반 여성에게는 꿈같은 일이었네요.
살빼기보다 멋진(?) 일에 정진하다그리하여 살 뺀 여자가 누릴 수 있는 각종 즐거움을 만끽하는 동안, 몸은 내가 무리하고 있다는 신호를 여러 차례 보냈습니다. 힘이 없고, 자주 지치고, 저혈압에 빈혈기, 성격이 조금 날카로워지는 경향이 있었지만 거의 무시했습니다. 어떻게든 빠진 몸무게를 유지하려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역시 그때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합니다.
그동안의 식이요법이 과했었는지 어느 일요일 아침, 급기야는 성당에서 미사 보는 중 저혈압으로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갑자기 풀썩 주저앉아 계단에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누나를 친절하게 부축도 해주고 어지러움 가시라고 초콜릿도 사준 동생이 그날만큼 멋있어 보인 적은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아버지에게 '그런 식으로 안 먹다가는 나한테 혼날 줄 알아라'라는 엄명을 듣고 반성함과 더불어 음식 조절을 향한 저의 험난한 여정은 막을 내렸습니다. 지금은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인다'가 아닌 '적당히 먹고 적절한 강도로 운동한다'로 방침을 바꿨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왕 시작한 운동인 검도에 더 많은 관심을 쏟기 시작했지요. 다이어트와 상관없이 자신의 몸을 가꾼다는 것은 멋진 일이라 생각했고, 처음 정들이기 시작한 일은 뭐든 우직한 소 마냥 끝까지 하는 성미인지라 계속 수련에 정진, 또 정진했습니다.
다리는 더 두꺼워지고 뱃살도 빠지진 않았지만...
이때에도 살을 빼려 노력한 때와 마찬가지로 몸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습니다. 남 보기 예쁜 몸매가 아닌, '운동을 하기에 적합한' 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왼손에는 죽도를 쥐느라 물집이 잡히다 못해 굳은살이 생기고, 오른팔에 힘을 주다 보니 양 팔 두께가 불균형해지고, 하체를 많이 쓰다 보니 안 그래도 두껍던 다리에 근육까지 붙어서 다시 몸 때문에 종종 놀림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넌 반바지 못 입겠다", "넌 하체가 참 튼실하구나" 등. 신기한 것은 두꺼워지긴 하되 비대해지진 않더라구요.
예쁜 몸을 버리며 제가 얻은 것은 땀 흘리며 고생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즐거움과 진한 동료의식, 제자리에서 앞뒤로 뛰면서 죽도를 휘두르며 빠른 머리 1000개를 20분간 쳐도 쓰러지지 않는 강인함(물론 숨넘어가긴 합니다), 부상이 잦은 상대를 위하는 마음 등 몸을 통해 타인과 교류하고 삶을 새롭게 바꾸는 다양한 경험들이었습니다.
특히 대련할 때 나보다 검도 실력이 뛰어난 상대방의 기세를 느끼면서도 두려움을 극복하고 뛰어들어 필살의 일격을 날리는 그 감각! 신체가 이러한 경험들을 무의식적으로 학습하게 되는 그 과정이야말로 도를 위한 정진을 즐기는 제 성미에 딱 맞았던 겁니다.
남에게 보이는 몸보다, 소중한 내 몸그렇게 내 몸은 두꺼운 다리와 빠지지 않는 뱃살에도 불구하고 가치 있는 몸이 되어갔습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몸보다는 스스로 건강한 삶을 꾸릴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남들이 내 몸 예쁘다고 말해주고 날씬하다 해줄 때야 좋았지요. 하지만 그 분들이 제가 다이어트 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건강을 망칠 여지가 많은지 제대로 고민이나 해주었을까요. 보기 좋다고 시샘하고 칭찬만 해줄 줄 알았지 그저 눈앞에 있는 보기 좋은 몸에 후한 점수를 주는 데만 급급했던 거지요. 저는 그 평가가 듣기 좋아 제 몸 망치는 줄 몰랐던 것이고요.
그렇게 3~4년간 몸에 대한 내공을 쌓은 저는 요새 "너 다리 두꺼워서 나는 싫다. 그 다리로 내 앞에 다니지 마라"라고 여성 검우(한창 사춘기 여고생입니다)에게 반 농담으로 말씀하신 한 도장 남성분을 응징하기 위해 열혈 수련 중입니다.
TV에 나오는 여자만 여자로 보는 획일적인 미의식에 도전장을 내밈과 동시에 세상에는 다양한 몸이 있고, 그 몸들 각각이 얼마나 가치 있고 아름다운지 살아가면서 증명해 내려고요. 스키니 진과 짧은 치마 입고 싶어 목숨 걸었던 저의 지난날은 이제 '안녕'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