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재수가 묻힌 무덤을 지나 고갯마루에서 한참 동안 머물렀습니다. 아직도 먹먹한 가슴을 억누르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집니다. 비도 내립니다. 아까 복우실 마을에서 갑자기 내리던 비가 잠깐 그치더니, 또 다시 쏟아집니다.
우리가 내려온 마루목재를 되돌아보니, 지금이야 저렇게 길을 새로 내고 있어 고개 높이도 덜하겠지만, 그 옛날 재수가 넘을 땐 좁은 오솔길이었다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 추운 날 캄캄한 밤, 무릎까지 눈이 푹푹 빠지는 저 고갯길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게다가 죽어가고 있는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을까?
재수의 무덤을 뒤로 하고 슬픈 우리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너무나도 평온하게만 보이는 마을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충북 보은군 마로면 갈전리 마을이에요. 재수와 아버지가 고갯길을 넘기에 앞서 잠깐 머물며 쉬었던 마을이랍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이 눈길에 넘어가려면 너무 위험하다고 말리기까지 했다고 하더군요. 차라리 그분들의 말을 들었더라면 그런 안타까운 일은 겪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까지 들었어요.
그땐 겨울마다 눈이 참 많이도 왔지요
"어르신 안녕하세요."
"아이고 두 분 참 멋지시네요."
"아, 네 고맙습니다. 저희가 지금 저기 효자고개를 넘어오는 길인데요. 옛날에 이곳에 눈이 많이 왔었나요?"
"그라믄유, 겨울만 되면 눈이 무릎까지 차곤 했지요. 봄까정 온통 눈 천지였으니까유."
마을로 들어서려는데 때마침, 냇둑에서 풀을 베고 있던 어르신이 계셔서 인사를 하고 그 옛날 이 마을 모습이나 재수네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어르신도 효자 정재수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시더군요. 재수 아버지의 외가가 어디였는지도 기억하고 있을 만큼 아주 자세하게 알고 계셨어요. 살가운 충청도 말씨로 정겹게 얘기를 해주셨어요.
"어르신 옛날에는 저 고갯길 넘어가기가 그리 힘들었나요?"
"예 그랬지유, 지금은 길을 새로 내느라고 산비탈을 깎아서 그렇지 그땐 좁은 오솔길인 데다가 고개가 꽤나 높았지유. 아마 오시다가 산을 깎아놓은 걸 보셨을 텐데유?"
"아, 네 봤어요. 지금은 길도 넓고 그런대로 편하더라고요. 그럼 그때 재수씨가 죽었을 때, 어르신도 여기에 사셨나요?"
"그라믄유, 그때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지유, 그 어린 학생이 아버지를 살리려다가 죽은 걸 알고 참 많이도 안타까워했지유. 저기 저수지 넘어가면 상주로 가는 고개가 또 나와유, 그 너머가 그 학생이 살던 동네였으니까 여기까지 올라믄 어린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겠시유."
올해 나이, 일흔 여섯인 박세화 어르신의 얘기를 들으면서 지난날 어린 재수가 넘어왔던 고갯길과 이 마을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좁은 오솔길, 가파른 오르막, 게다가 앞날 눈까지 많이 와서 그토록 험한 고개를 몇 개나 넘어서 왔다는 걸 생각하니 또 다시 억눌렀던 슬픔이 차오릅니다.
자세하게 지난날 얘기를 들려주셨던 어르신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바삐 서둘러 발판을 밟습니다. 아직 넘어가야 할 고개가 하나 더 남았으니, '정재수 기념관'까지 가려면 시간이 빠듯했어요. 갈전리 마을을 지나 충북 보은과 경북 상주가 맞닿아 있는 한중리와 중눌리 마을을 거쳐 갑니다. 두 마을 모두 오랜 세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만큼 고즈넉하고 살가움이 넘치는 마을이었답니다.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그 어린 게 여길 어찌 넘어 왔을꼬!
한중리 마을을 벗어나 한참을 달려가니 이윽고 상주시 화서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보입니다. '화서면'으로 가는 길을 알리는 알림판이 하나 덩그렇게 서있고, 그 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좁은 시멘트길이었지만 그 높이와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구불구불 골짜기를 따라 난 길입니다.
어느새 비가 잦아들었어요.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는 데도 좀처럼 거리가 줄어들지를 않네요. 아직도 고갯길은 까마득하게 보이고, 길 양쪽으로 짙푸른 산만 보입니다. 또 다시 땀이 솟아나고 힘겨워집니다.
"우리 내려서 걸어가자. 이왕이면 그 옛날 정재수가 넘어왔던 이 길을 느끼면서 가보자. 어때? 그것도 좋은 생각이겠지?"
"좋았어! 지금이야 이 길도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겠지만 그래도 어느 만큼은 느낄 수 있을 거야. 그치?"
"그래. 어차피 우리가 여기까지 온 까닭도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고 왔으니까, 이렇게 걸어가는 것도 꽤나 뜻 깊은 일이지 않겠나?"
"그럼그럼, 옳은 말씀!"
우리 부부는 자전거에서 내려 어린 재수가 설을 쇠러 넘어오던 고갯길을 거꾸로 넘어갑니다. 걸으면서 느끼니까 오르막 올라가는 길이 더욱 힘이 듭니다. 몇 걸음 오르다보니, 어린 재수가 눈이 쌓였던 추운 겨울날 이 길을 걸어서 넘어왔다는 게 그저 놀랍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어린이한테 '효'를 가르치는 체험 교육, 이건 어떨까?
"이거 있잖아. 이런 건 어떨까?"
"뭐가?"
"아이들한테 정재수의 효심을 가르칠 때, 이 길을 손수 걸어보게 하는 거 말이야. 아주 좋은 공부가 되지 않겠나?"
"아아! 그러니까 우리처럼 정재수가 넘어왔던 이 고갯길을 스스로 걸어서 넘어가보는 체험 말이지?"
"그렇지. 요즘 아이들이야 워낙 곱게 자라니까 힘든 일이기도 하겠지만, 어차피 '정재수 기념관'도 세워서 아이들한테 그 교훈으로 '효'를 가르치잖아. 그렇다면, 이 길을 걸어서 넘어가보는 게 힘들기는 하겠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걸어보면서 그 옛날 어린 재수가 힘들게 고개를 넘다가 숨진 이야기를 몸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 맞아 요즘이야 이 고개도 길이 많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그야말로 반에 반만이라도 몸으로 느껴본다면 아이들한테 참 좋은 교육이 되겠다. 사실 그저 차로만 휙 왔다가 눈으로만 보고 간다면 크게 와 닿지 않을지도 모르지."
남편이 아주 좋은 제안을 하네요. 어른인 우리도 이런 고갯길을 걸어서 넘어가는 게 힘든 일이지만, 아이들도 그 반만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어른을 공경하고 아버지를 살리려고 자기가 죽기까지 애썼던 어린 재수의 갸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듯했어요. 또 그런 '효심'을 몸소 배울 수도 있겠지요. 아마 틀림없이 아주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사실, 이 이야기는 '정재수 기념관'에 가서 담당자한테 제안한 얘기랍니다).
이윽고 재수가 살던 마을인 소곡리(배실마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올랐어요. 또 다시 비가 내립니다. 희한하게도 고갯마루만 오면 비가 쏟아집니다. 우리가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니, 그 어린 나이에 이 힘든 길을 걸어서 넘었을 재수가 생각나서 눈물이 맺힙니다.
효자 정재수 기념관
어느새 시간은 오후 다섯 시가 다 되어갑니다. 기념관이 6시까지 문을 여니까 얼른 서둘러야했어요. 상주시 화서면 사산리, 옛날 재수가 다녔던 사산초등학교 자리에다가 새롭게 꾸민 '효자 정재수 기념관'에 닿았을 땐, 빗줄기가 더욱 굵어졌습니다. 벌써 온몸이 비에 흠뻑 젖어 말끔하게 단장한 기념관에 들어서기가 미안하기까지 했지요. 마침 담당 공무원(상주시청 문화관광과 이현균 씨)이 우리를 보고 반갑게 맞아주며 손수 안내를 해주셨습니다.
이 기념관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효'를 주제로 세운 기념관이랍니다. 바깥마당에는 '정재수 어린이상'과 '故 정재수군 추념비'가 따로 있고, 이층으로 된 기념관 안에는 '효자정재수실'과 '효행전시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어린 재수가 마루목재에서 숨지기까지 그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해놓은 안내판과 우리 나라 전통과 효를 중심으로 '효'를 생각하는 그 의미와 이야기들을 여러 가지로 느낄 수 있는 곳이지요.
또, 영상관이 따로 있어 정재수군의 효행을 영화로 만든 <아빠하고 나하고>도 볼 수 있지요. 이층에는 재수가 다녔던 2학년 1반 교실을 새롭게 꾸며놓고 어린 재수의 갸륵한 마음씨를 기리고 있습니다. 교실에 들어서서 볼 때에는 더욱 큰 감동으로 밀려옵니다. 교실 한 복판에 낡은 난로가 자리 잡고 있고, 재수가 앉았던 책상에는 하얀 국화꽃을 담은 꽃병이 놓여있어요. 살아있을 때에도 어려움을 겪는 동무들을 잘 도울 줄 아는 착한 어린이었다는데, 그 예쁜 맘씨로 공부하던 교실을 둘러보는 게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지더군요.
한 시간 동안 꼼꼼하게 둘러보고 기념관을 나서니, 빗방울은 더욱 굵어졌습니다. 재수가 뛰놀던 운동장에 새롭게 깔린 잔디가 비에 흠뻑 젖어 서글프기까지 합니다. 비가 오는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선뜻 발길을 돌리기가 아쉬웠지요. 왠지 어린 재수가 우리를 보고 손이라도 흔들어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재수의 발자취가 서린 곳마다 비가 내리던 까닭
그러고 보니, 멀쩡하다가도 우리가 고개를 넘을 때마다 비가 내리던 걸 되새겨봅니다. 희한한 일이지요? 처음 재수의 큰집이 있던 '복우실' 마을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만날 때부터(이때는 그곳이 큰집이 있던 마을인 줄 몰랐어요) 재수가 숨졌던 마루목재(효자고개), 또 소곡리 마을(재수가 살던 마을) 고갯마루에서도 빗방울이 더욱 세졌던 게 기억납니다.
가슴이 먹먹하여 눈물과 빗물이 범벅이 되어 아프게 느껴지던 일이 생각났어요. 그리고 지금, 마지막 목적지였던 기념관을 나서면서부터는 비가 아예 주룩주룩 내립니다.
조금이라도 우리 발길을 붙잡고 싶었던 걸까? 아무도 부르는 이 없고, 오라 하지도 않았지만, 우리끼리 날을 잡고 오로지 어린 재수의 발자취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이 먼 곳까지 달려왔습니다.
오면서 화동면에서 길까지 잃어버려 한동안 헤매기도 했지만, 뜻밖에 좋은 볼거리도 구경했고(화동면 간판 이야기 기사보기) 높은 팔음산 자락을 끼고 도는 고갯길을 몇 개나 넘어서 왔는데, 희한하게도 재수의 발자취가 서려있던 곳에 닿을 때마다 비가 내리던 까닭을 어렴풋이 알겠더군요. 어느 누구도 그렇게 이해하지 않겠지만, 우리끼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니, 어쩌면 재수와 함께 그 고갯길을 넘어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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