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기본적인 지방 행정기구는 도(道)입니다. 태종 13년(1413)에 전국을 8도로 나누었고 도 밑에는 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 등을 두었습니다. 인천도호부 내에는 10개의 면과 그 밑에 다수의 동-리-촌이 있었고, 동-리의 밑에는 매 호를 한 개의 통으로 하는 5가작통제가 시행되었습니다.
도호부는 중앙에서 파견된 도호부사 아래 이-호-예-병-형-공방의 6방을 두어 사무를 분담하게 하였고, 이를 담당하는 자는 지방의 향리였습니다. 인천부읍지에 의하면, 도호부의 관할구역은 영조 24년(1748) 당시에는 강화-영종-덕적도 등이 인천에 속했으며 인구는 2,600여 가구에 8천여명이 거주했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방수령으로 모든 지방행정을 통괄하는 도호부사의 주된 임무는 수령칠사(守令七事)라 하여, 1) 농사와 누에치는 일을 잘 돌볼 것, 2)인구를 늘릴 것, 3) 교육을 진흥시킬 것, 4) 군대에 관한 사무를 바르게 할 것, 5) 부역을 균등히 할 것, 6) 민사의 소송을 바르게 할 것, 7) 간교하고 교활함이 없도록 할 것 등이었습니다.
인천이 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조선 세조 5년(1459)로 세조의 비인 자성왕후 윤씨의 외향이기 때문입니다. 인천 남구 문학동 문학초등학교에 자리한 인천도호부청사는 건축 시기가 명확하지 않지만, 객사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지붕 기와에서 '강희 16년'이라는 명문이 나온 것을 볼 때 숙종 3년(1677)에 중수된 것임을 알 수 있을 뿐이라 합니다.
현재 인천도호부청사는 인천향교 옆에 객사와 동헌-아문-중문-공수-삼문 등을 복원해 놓았습니다. 객사는 임금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이고 집무실인 동헌보다 격이 높아 관아건물 중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문은 관아의 정문으로 2층 누대로 팔작지붕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공수는 객사의 부속건물로 부엌, 곳간, 온돌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객사를 관리하는 인원과 중앙 사신을 수행한 수행인력들이 유숙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복원시킨 관아건물 외 도호부청사에는 전통놀이를 체험하거나 옛 관아에서 사용하던 곤장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곤장은 버드나무로 넓적하게 만들어 도둑이나 군률을 어긴 죄인의 볼기를 치는 형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