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역감정을 깰 수가 있나요? 미쳐야 세상을 조금씩 바꿀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지역갈등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맙니다. 똑같은 사실도 지역을 오가면 흰 것이 검은 것이 되고, 검은 것이 흰 것이 되고 맙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가 어디 있고, 보수가 어디 있으며, 정당 간의 정책 경쟁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1999년 2월, 월간 <말> 인터뷰)노무현 전 대통령의 평생 화두는 '지역주의 청산'이었다. 스스로 "동서통합의 지조를 지켜온 정치인"이라고 평했다. 또 집권 후반기에는 여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대연정'을 제1야당에 제안할 정도였다. 심지어 서거 뒤에는 '반지역주의의 화신'으로 부활했다.
그렇다면 노 전 대통령의 선택은 과연 적절한 전략이었을까?
"'지역주의 망국론'이라는 허구와 싸울수록 정치는 나빠졌다"
최근 한국 지역주의를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한 <만들어진 현실>을 펴낸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11일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사람들이 그의 위대함을 얘기하면서 지역주의 청산과 물러서지 않는 영웅의 이미지를 불러들이고 있다"며 "하지만 지역주의 때문에 한국정치가 잘 안된다고 환원해서 국정목표나 정치개혁을 설정했던 것은 틀렸다"고 평가했다.
"복잡한 문제를 지역주의 문제 때문이라고 대체해놓으니까 지역주의라는 가상의 현실이 너무 커져 버렸다. 실제 현실은 이만한데 허상이 커지다 보니까 (지역주의 망국론이라는) 허구와 싸울수록 정치가 더 나빠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다르게 접근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박 대표는 양극화를 해소하지 못한 것과 함께 지역주의 극복을 명분으로 대연정을 제안한 것을 재임시 최대 실정으로 꼽았다.
"권력은 자기 것이 아니라 주권자인 시민으로부터 위임받는 것이다. 그래서 권력구조의 변화는 본인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 (대연정은) 자신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당한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역사적 판단'이라는 이유로 권력의 향배나 분포를 변화시키겠다는 것은 잘못이다. 게다가 대연정을 제안한 이유가 지역주의 극복인데 이것도 잘못됐다. 대연정 제안 이후 노 전 대통령의 정국 주도권은 약화되었고, 정당과 관계도 나빠졌으며, 정책도 제대로 추진할 수 없었다."
박 대표는 "당시 노무현 정부가 사회경제적 문제에 적극 대면해주길 바라는 개혁적인 여론이 많았다"며 "신자유주의 충격이 가져다준 빈곤 등 양극화 문제에 집중했어야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만들어진 현실>에서도 이렇게 적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10년의 민주정부는 호남의 선택이 만들었고, 그것으로써 반호남 지역주의는 더 이상 한국정치가 해결해야 할 중심문제의 지위는 벗어났다고 보아야 하고, 적어도 그 이후의 문제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나 도전세력에게 가혹한 한국사회의 정치경제적 차별의 구조 일반으로 문제의식을 넓히는 데 있다. 호남 차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실업자와 비정규직, 조선족과 이주노동자 등 우리 사회 최저층을 이루고 있는 가난한 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44쪽)그런데 왜 노 전 대통령은 집권여당에서도 반대하는 대연정을 야당에 제안할 정도로 지역주의라는 화두에 매달렸을까? 박 대표는 "스스로 고립감, 피해의식을 많이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면서도 좀 더 구조적인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를 대안모델로 채택한 'DJ 집권 5년'을 거론했다.
"DJ가 집권하는 동안 발전주의나 신자유주의가 아닌 민주개혁세력의 사회경제모델을 만들어 보수와 경쟁했어야 했다. 그랬으면 노 전 대통령에게 지역주의가 아닌 개혁연대라든지 사회경제연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DJ는 집권 5년 동안 민주파 안에서 신자유주의 성장모델을 따를 수밖에 없고 이것이 다수가 되는 결과만 남겨놓았다. 그런 상황에서 노무현이라는 한 열정적 정치엘리트가 준비 없이 대선후보로 등장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별로 없었다."
"중대선거구제 아래에서 지역정당이 더 기승 부릴 수 있어"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의식개혁'뿐만 아니라 '제도개혁'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연정의 전제조건으로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내걸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 대표는 "중대선거구제는 최악의 선거제도"라고 비판했다.
"특정지역에서 2위 세력들의 당선이 용이하도록 하는 것이 지역주의 해결이라고 할 수 없다. 중대선거구제는 문제가 상당히 많다. 선거제도로서는 최악이다.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최악의 선거제도를 불러들여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지역주의 극복이 알파와 오메가가 되면 그렇게 된다. 단순다수제 아래에서 중대선거구제를 하는 사례로 일본을 들 수 있다. 중대선거구제는 큰 정당이 투표시장을 독점하기 용이한 제도다. 다양한 선호와 요구에 비례해야 하는데 중대선거구제는 표의 불균형성을 심화시킨다. 오히려 지역정당이 더 기승을 부릴 수 있다."
박 대표는 "단순다수제보다는 비례대표제를 선택하는 게 좋고,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하거나 단순다수제라면 결선투표를 도입하는 게 좋다는 것이 선거제도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일정하게 합의하는 선"이라며 "그런데 이런 합의를 무시하고 지역주의 때문에 최악의 선거제도를 선택하는 것은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박 대표는 "지역주의가 과장되고 신화화되면 이렇게 된다"며 "사람들의 선호대로 투표하게 하면 지역주의는 줄어들기 때문에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선 비례대표제나 결선투표 도입 등 보편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이어 박 대표는 "노동문제나 사회경제적 문제, 계층문제 등이 표출될 수 있는 정치공간이 없다면 사람들의 열정, 이익추구는 지역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며 "사회의 다양한 이념과 욕구들이 조직돼서 표현될 수 있도록 정치구조를 바꾸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지역주의 망국론을 얘기하는 것은 공허하다"고 꼬집었다.
"설득력 있는 대안적 발전모델을 모색하고 발전시키는 게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무엇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를 넓게 공유하는 세력이 집권해야 하고, 그들이 집권한다면 한국사회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대안적 발전모델을 구체화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에 그렇게 시달렸으면 민주당 등의 지지가 올라갔어야 하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나쁘다고 얘기할 뿐 야당은 (국민들에게) 확신을 못 주고 있다. 진보정당은 13%의 지지를 얻고 출발했지만 분열로 인해 그것도 얻지 못하고 있다. 그 정도의 정당도 운영하지 못하는데 누가 거기에 열정을 쏟아붓겠나? 참여와 열정을 응집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줘야 한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대안이 없으면 시민은 무력하다. 투표권만 가지고도 시민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주어진 대안 중에서 실질적 선택을 할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박 대표의 스승인 최장집 전 고려대 교수도 최근 펴낸 <민중에서 시민으로-한국민주주의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돌베개)에서 "(지역구도의 재현을 막을) 해법 역시 다시 '망국적 지역감정론'을 불러들여 개탄하거나 국민의식개혁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인 성향의 유권자와 노동자, 서민 계층 유권자들의 지지를 모을 수 있는 정당 대안을 마련하는 데 강조점이 두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끝으로 박 대표는 <만들어진 현실>에서 기술한 것처럼 "지역주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상당 부분 작위적으로 만들어지고 동원되었다"며 "지역주의 문제는 다른 것들을 희생해서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사안이 아니라 보편적인 개혁의 과제가 실현되면서 점차적으로 개선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민주주의란 지역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다. 선거는 기본적으로 지역대표체제다. 그런데 '지역은 용납할 수 없는 나쁜 것이다'라고 해놓으니까 누군가 지역을 말하면 비난이 쏟아진다. 이런 식으로는 지역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지역이 있어서는 안 될 부정적 대상으로 이데올로기화됐다. 부정되어야 할 이데올로기로 지역주의 언어를 공격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것은 지역주의 문제를 만들어낸 한국 사회의 진짜 문제를 못 보게 만들고 정치 전반을 무작정 냉소하고 혐오하게 만든다. 당연히 정치발전에 기여하기도 어렵다. 우리 사회 보편적 개혁과 지역주의 개선이 병행할 수 있는 접근이어야 한다."
한편 박 대표는 친노세력의 신당창당 움직임과 관련, "친노세력이 성공하려면 보편적 정치목표나 내용을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얘기할 수 있고, 민주세력과 연대해 시민세력의 참여를 자극할 수 있는 조직적 틀이나 활동양식을 창출해야 한다"며 "그런 것 없이 노 전 대통령의 후광에 의존한 정치는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인터뷰 어록] "느리지만 오래가는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은 책을 많이 본 정치가 중 한 명이다. 특히 역사책을 좋아했다. 옳고 그르다는 판단이 분명했다. 정치를 정의와 불의로 나누어 정의 편에서 물러서지 않는 불퇴전의 자세를 갖고 있는 정치인이다. 권위주의 때는 이런 정치인이 도움이 됐다. 권위주의에 대항하는 것이 타협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정의와 불의를 나누는 영웅적 정치가보다는 정치학의 기본을 아는 정치가가 중요하다.
정치가는 갈등하는 복잡한 힘의 구조를 다룬다. 힘의 구조가 어느 방향으로 모일 때 바람직한 선택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를 판단해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이 드라마틱하게 당선됐다가 정작 권력을 갖고 힘을 활용할 때는 무기력해지는 것도 (앞서 언급한) 그런 리더십, 스타일과 관련이 있다. 친노세력도 그런 영웅 중심의 서사적 방식에 익숙한데 이제는 그런 방식이 기여하기 어렵다. 친노세력 중 유능한 정치인이 등장해 민주정치구조에 잘 적응해 좋은 성과를 낳기 바란다.
민주주의는 기대와 달리 큰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아래에서) 변화는 느리다.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주제가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혁명의 가장 강력한 안티테제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느리지만 여러 사람의 공동행동을 조직해서 변화를 이끌도록 하는 구조다. 그런 정치에 적응하는 정치가가 나와야 한다. 느리지만 오래가는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한꺼번에 뭔가 얻으려고 하면 실제로는 잘 안된다. 노 전 대통령이 보여준 실험에서 얻을 교훈은 이것이다. 이제 친노세력도, 진보파도 정치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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