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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검찰청 뒷산에 이광무의 시체를 유기한 범인에 대해 윤곽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세 번째 사건이 터졌다. 피살자는 40대 후반의 남자였는데 다행히 다음 날 신원이 확인되었다. 그는 춘천에 있는 사립대학의 교수 염규호였다.

그의 전공은 환경경제학인데, 그것은 비교적 새로운 개념의 퓨전 학문이었다. 그는 일류 K고등학교와 일류 S대학을 나오고 미국의 유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해 온 것으로는 교수직에 늦게 진출한 편이었다. 그의 학교는 서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의 거리였는데, 그는 밤늦게 춘천에서 서울로 차를 몰고 오던 도중 경춘국도에서 살해된 것이었다.

사체는 등을 보인 채 알몸으로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범인은 그의 몸에 안전벨트를 채워 놓고 갔음이 분명했다. 사체가 발견된 시각은 새벽 5시 30분이었다. 시반이 전위되고 경직이 상지 관절에만 나타난 것으로 보아 발견 4~5시간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염규호 역시 예리하고 얇은 흉기에 심장 부근이 찔려 죽어 있었다. 범인은 자동차에 지문이나 족적 또는 모류나 혈흔 등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자동차 뒷좌석에서 모류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의 것임이 확인되었을 뿐이었다.

범인은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장갑을 끼고 자동차 앞좌석을 말끔히 청소한 것 같았다. 피살자의 옷을 전부 벗겨 간 것도 역시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고 봐야 했다. 살해 전 납치 과정이 없었다는 점에서 판교나 법원· 검찰청 뒷산의 사건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등에는 예의 그 대문자 영어 단어가 쓰여 있었다.

                                          HYPOCRITE
                                       B.  K.

'HYPOCRITE'는 '위선(僞善)'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였다. 첫 피살자의 몸에는 'GREED' 즉 '탐욕'이 쓰여 있었고 두 번째 피살자의 몸에는 'THE CONSERVATIVES' 즉 '수구파'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피살자의 몸에는 '위선'이라고 쓰여 있으니, 그것들은 모두 피살자의 인격적 성향을 말해 주는 단어라고 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범인은 첫 피살자인 복부인은 탐욕이 있어서 죽였고, 두 번째 피살자인 안보 전문가는 수구파라서 죽였으며 세 번째 피살자인 교수 겸 시민단체 간부는 위선자라서 죽인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단순하고 무자비한 도식이었다. 살인이라는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명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복부인이라서 죽이고 수구파라서 죽인다는 논리는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한 술 더 떠 위선자라서 죽였다고 하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영문자 'HYPOCRITE'는 'B. K.'와 두 줄로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을 정도로 범인은 침착하고 냉정한 상태에서 글씨를 쓴 것 같았다. 다만 이번에는 검은 매직펜이 아닌 빨간 유성 페인트 같은 것으로 썼는데, 나중에 그것은 화가들이 유화를 그릴 때 쓰는 물감으로 확인되었다.

단서라고는 오직 글씨뿐이었다. 따라서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은 필체 분석밖에는 없었다. 종종 범인은 협박하거나 돈을 요구하거나 양심에 찔려 고백할 때 편지를 보내는 경우가 있다. 필적학자들은 필체를 분석하면 그 사람의 심리적 특성을 알아낼 수 있다고 말하지만, 조수경은 그 말을 신뢰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껏해야 용의자의 필적과 비교해 보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증거가 될 수는 없었다. 실제로는 범인을 잡아 놓고 추후에 필체가 같다는 것을 확인해 보는 정도로밖에 쓸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용의자는 물론 기본적인 범행의 목적이나 성격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니 범인의 필적 따위에 아무 기대를 걸 수 없었다.

필적학자들은 첫 글자를 크게 쓴다든지 받침을 휘갈긴다든지 자음을 모음보다 크게 그린다든지 등의 특징을 잡아 범인의 지적 능력이나 심리적 특성을 추정한다지만, 조수경은 그런 방법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무리 유능한 필체 분석가라고 해도 필체를 근거로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거나 범죄를 저질렀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의사가 단 하나의 증상만을 보고 병을 진단하는 것보다 무모한 일이었다. 사실 필체는 범인이 남긴 흔적 중에서 수사 자료적 가치가 가장 적은 것이었다. 게다가 범인의 필체는 세 사건이 모두 달랐다. 그런데다 글자도 개인적 특성이 나오기 힘든 영어 대문자였다.

다만 범인은 현대 과학 수사의 기법과 맹점을 꿰차고 있는 자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세 사건의 범인이 모두 제각각이라면 그들은 모두 하수인에 불과할 것이며 실력을 갖춘 배후 조종자가 따로 있으리라고 추정해 볼 수는 있었다.

일단 조수경은 희생자의 주변 상황부터 조사해 보았다. 희생자 염규호의 부인은 여자 대학병원의 산부인과 과장이었다. 그러므로 부부를 합친 소득으로 그들은 경제적 최상위층이었다. 그러나 부부 사이가 그리 가까웠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조수경은 희생자의 부인이 남편의 죽음에 대해 내면으로 깊은 슬픔을 느끼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녀가 죽음을 많이 목격하는 의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녀의 충격과 슬픔의 징후는 다소간 의례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그녀는 차기 총선에 모 정당 비례대표 공천이 내정되어 있었다.

부부 사이에는 두 아이가 있었는데, 딸은 강남의 중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아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아들은 한국에서 제일 좋다는 외국어 고등학교를 자퇴한 상태였다. 대학 입시에서 내신 성적이 중요해지자, 내신에서 불리한 외고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보아 대학에 가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평소 자신의 출신 학교인 S대에 진학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무심코 말했다.

염규호는 환경경제학 교수로서 시민단체 간부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경제 정의 실천을 목적으로 하는 유수 시민단체의 정책실장을 맡고 있었는데, 단체에 가입한 지가 불과 6개월도 안 된 상태였다.

그들 가정은 1년 전에 강남으로 옮겨 와 살고 있었다. 아마도 두 자녀의 교육 때문인 것 같았다. 그들은 작년 말 신규 분양된 재개발 아파트를 16억 정도에 구입하여 입주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1년여 만에 아파트 가격이 급등하여 지금은 25억을 호가한다고 했다.

조수경은 피살자에게서 별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가 인간답고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에게 딱히 추궁을 받을 만한 잘못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김인철이 커피 두 잔을 가지고 조수경의 방으로 들어왔다. 사실 조수경은 인스턴트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고맙다고 말하며 커피를 받았다. 김인철이 커피를 빼들고 왔다는 것은 그녀에게 할 얘기가 있다는 표시였다.

"선배님, 진급을 축하드립니다."

사실 조수경은 두 달 전 경감에서 경정으로 진급이 확정되어 있었다. 다만 미국에 있어서 정식 신고를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 것도 축하를 받아야 하나?"

김인철은 조수경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곧장 최근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했다.

"팀장, 아니 선배님. 이번 희생자를 제 나름대로 조사해 보았습니다."

조수경은 김인철의 말에 부쩍 관심이 일었다. 두어 달 지켜본 결과 김인철은 하찮은 일이거나 불필요한 것을 보고하는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수경은 커피 잔에 입을 대며 김인철에게 계속 말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번 희생자인 염규호 씨의 부인부터 말하겠습니다. 부인이 산부인과 의사라는 것은 아실 테고요."

조수경은 커피를 책상에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부인의 이력이 조금 별나더군요."

김인철은 조수경이 미처 몰랐던 사실을 알려 주었다.


#위선#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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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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