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다.
이내창 열사의 20주기였던 지난 12일, 민주 노동당 이정희 의원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군기무사령부가 최근 다수의 민간인 사찰을 행해왔다고 밝혔다. 학생운동을 하던 학생들과 노동자들에게 정부 기관의 집요한 통제와 감시가 이뤄졌던 1980년대가 떠오른다. '잃어버린 10년'이라더니 웬걸. 나라가 20년 전으로 돌아간 셈이다.
진중권 교수의 재임용이 철회된 것도 화제거리다. 지난 7월 29일, 중앙대학교측은 2003년 이후로 2년씩 임용계약을 연장하며 독문과 겸임교수로 재직해 온 진 교수를 "겸직기관 없음", "기타 겸임교수 인정기준 불일치" 등의 사유를 들어 임용불가를 결정했다. 이에 독문과에서는 "납득하기 어렵다"며 지난 13일 항의성명을 발표했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14일 중앙대학교 공식 커뮤니티사이트인
중앙人에서는 진 교수의 재임용을 위한 릴레이 사이버 시위가 벌어졌다.
중앙대생들은 진 교수의 재임용이 철회된 것은 총장의 정치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며 대학에서 정치적 이해에 따라 학생들이 원하는 수업을 제약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義血(의혈) 중앙대학교는 죽었다"는 학생들의 외침도 보인다. '의혈'이란 중앙대학교가 배출한 열사 7인의 정신을 일컫는 말이다.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1989년도 총학생회장. 20년 전에 전남 여수 거문도 앞바다에서 의문사한 이내창 열사가 바로 그 7인 중 일곱번째다.
<이내창 백서>, 무슨 내용 있나그의 죽음 이후로 20년이 흘렀다. 누구든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기 마련. 지금 이내창 열사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 새롭게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마 그보다도 더 적은 숫자일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기억하게 하고 싶어서였을까. 이 책이 '보기 쉽게 쓰여진' 이유를 그렇게 추측해본다. 이내창 열사의 20주기를 맞아 발간된 백서 <죽음, 진상규명 20년 그리고 국가기구 조사, 10년>은 이내창 열사에 대한 얘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의문사의 역사까지 유족의 입장에서, 비교적 쉽고 부담스럽지 않게 다루고 있다.
서문을 지나면 바로 화보 '우리는 의문사를 과거사라 부르지 않는다'가 등장한다. 1973년 고문 살해를 당하고 간첩 누명이 씌워졌던 최종길 서울 법대 교수에 이어 사형선고 후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됐던 1975년 인혁당 사건, 장준하의 의문사,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의문사들이 각각 한 장의 사진들과 함께 1990년대까지 숨가쁘게 이어진다.
1975년 4월 9일, 서대문 형무소 앞은 인혁당 피고인 유족들의 비명과 절규로 뒤덮였다. 사법부는 사형선고를 내린 지 열여덟 시간 만에 여덟 명의 피고인 전원에게 사형을 집행했던 것이다. 시신은 가족들에게 바로 인계되지도 않았고, 무력을 앞세워 홍제동 화장장으로 향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문정현 신부와 시노트 신부는 시신을 빼앗기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문신부는 차에 올라갔다. 그러나 경찰이 문신부를 무시하고 차를 몰자 차에서 떨어져 평생 지팡이를 집고 다녀야 했다.(중략)그리고 33년의 세월이 흘러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인혁당은 고문에 의해 조작된 사건임이 밝혀졌다. 8명의 사형수는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되었고, 국가에서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국가의 잘못을 국가가 반성하고, 배상하기로 했다.지금도 유족들과 함께 용산 참사 현장을 지키고 있는 문정현 신부가 지팡이를 잡게 된 사연이 인상깊다.
그러고 보면 용산 참사는 과거 의문사 사건들과 닮았다. 유족의 동의 없이 부검을 당했던 용산 참사의 사망자들. 유족들이 당 서적에서 증언한 의문사 사건들에도 역시, 시신 탈취와 강제 부검, 화장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처음에는 부대장이 유족들이 화장을 하겠다면 비용을 부대에서 대 벽제에서 화장을 하게 하고 매장을 하겠다면 시신을 인도하겠다고 해놓고는 사회문제화되고 계훈제 선생이랑 재야인사들이 부대병원에 찾아오고 하니까 입장을 싹 바꿔버리는 거야.(중략)경기북부 민통련이랑 학교 친구 선후배들과 주위에서 다들 화장을 하고 나면 진상규명할 여지가 없어진다고 매장을 하자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어. 그래서 큰 형이랑 민통련에서 운정공원을 알아보게 된 거야. 그런데 얼마나 통제가 심한지 나도 버스에서 내리지도 못하게 하더라고. 둘째 형이 우혁이 실은 앰뷸런스에 동승하고 나는 절대로 못 타게 해서 뒤에 버스에 타고 갔어. (중략)둘째 형 말을 들으니까 앰블런스 선탑자가 ROTC 출신 장교인데, 차가 송추 쪽으로 꺾어지니까 둘째 형이 운전병을 주먹으로 치면서 차를 세우라고 소리를 질렀대. 벽제 화장장으로 가는 거다 싶었던 거지. 그러니까 그 선탑 장교가 그러면 미리 공원 묘지에 가서 확인하고 운행을 하겠다고 하더라고. 차를 길가에 세우고 미리 운정공원에 가보니까 묫자리를 파놓았더라고. (중략)주위를 둘러보니까 능선 위에 전부 군인들이 숨어서 감시하고 있더라고. 송추 쪽에 예비군 훈련부대들이 많이 있잖아. 우혁이 있던 부대 부대장이 자기 동기가 그 예비군 부대장인데, 그 부대 병력들을 동원했다는 거야. 꼬박 1주일을 경계를 서며 무덤을 지켰어. 우리들이 진상규명하려고 시신을 파낼까봐 말이야. (고 최우혁 아버지 최봉규씨 구술 중)서울대에서 학생 운동을 하다가 입대한 고 최우혁씨가 군에서 주검으로 돌아온 날짜는 1987년 9월 8일. 그러니까 위의 구술된 내용은 88올림픽 한 해 전에 대한민국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했던 일이다.
1980년대 군은 학생운동을 탄압하고, 통제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기능했다. 최씨의 죽음 이후 보안사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지난 1989년에 양심선언하며 밝혔던 보안사 사찰대상자 명단은 총 328명이었고 최우혁씨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고 허원근씨도 군대에서 자살한 것으로 처리됐다. 죽음 후 18년이 지난 2002년에야 의문사위원회가 허씨의 죽음을 타살로 규명했지만 국방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허영춘씨는 군 의문사를 제대로 진상규명을 해야지 우리 아들이나 손주들을 마음 놓고 군에 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유가협 가족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것은 이런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이해해달라고 부탁했다. "80년부터 88년까지 군에서 죽은 사람이 통계가 6500명이야. 2500명은 자살로 만들고 나머지는 사고사나 공상인데, 공상이 어디있어 전투시가 아닌데. 가족들이 빳빳하고 아는 사람들한테는 국립묘지 보내주고 나머지 우리처럼 농사꾼들은 무조건 잘라서 자살로 처리했지. 지금 디비에서 파일을 보면 우리 아들은 총 세 방을 맞고 죽었어. 다섯 방 일곱 방까지 자기 몸을 쐈다고. 탄피 개수를 보면 알잖아. 그런 세상에서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또 그렇게 산단말이야. 아들들이 손주들이 또 군대를 가야 된단말이야.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한은 모든 게 징집되면 다 가야할 상황이란말이야. 그런 사각지대에 자식들을 내놓고 국가를 믿고 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걱정되는 것이지....(고 허원근 아버지 허영춘씨 구술 중)이런 얘기는 일부에 불과하다. 당 서적은 이미 일어난 지 오래 되었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을 사는 많은 사람들에는 또 한 없이 새로울, 그런 사연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사연들의 끝에는 1989년 사망한 이내창 열사와 지난 20년 간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행해졌던 노력, 과거사 위원회 활동과 관련된 깊은 아쉬움들이 꼼꼼하게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이내창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의문사 유족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자기 피붙이의 죽음에 국가 권력이 개입했다는 의혹이나 증거를 가지고 있다. 군사정권도 아니고 예전처럼 언론을 틀어막아 쉬쉬할 수 있는 시대도 지났다. 하지만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의문사 사건들이 '조사불능'으로 결론지어졌다. 그리고 국가 권력에 의한 폭력은 용산에서, 평택의 쌍용차 공장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이유가 뭘까. 필자는 올해 만 스물 일곱이다. 당 서적을 우연히 본 후에야 이내창 열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오늘이 그 3일째다. 책을 읽고서 혹시나 싶어 대학을 졸업한 지인 20명에게 이내창을 아느냐는 문자 메시지를 돌렸는데 역시나 였다. 그가 누군지 안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반성과 성찰이 없을 때 역사는 같은 모습으로 반복된다고 한다. 법원이 공개하라고 검찰에 지시한 용산 참사의 미공개 수사기록 3000쪽도 공개되지 않는 마당에 의문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기대하는 것은 버거운 일일 것이다. 그저 당 서적이 그들을 조금 더 오래 기억할 수 있게하는 도구가 되기를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