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마치 잘 짜여진 한편의 시나리오 같은 기가 막힌 모양새다.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이 북한을 방문, 계속 연기되는 일정 끝에 '이산가족 상봉, 백두산 관광 개시, 개성관광 재개, 금강산 관광 재개, 남측 인원 군사분계선 육로통과 및 북한지역 체류 원상회복' 이란 다섯가지 사항을 합의하고 돌아온 것이 바로 어제. 그리고 다음날인 오늘. 바로 햇볕정책의 상징인 그가 훌훌 떠났다. 클린턴 전 미(美) 대통령이 억류된 자국 여기자 두명을 데리고 돌아갔을때, 마치 기쁘다는듯 잠시 의식을 회복하고 환하게 미소짓기까지 했다던 그가. 현정은 회장이 북측과 5개항을 합의하고 돌아온 바로 그 다음날. 마치 '다 이루었다 '는 듯이 떠났다.
역사는 정녕 그 시대에 맞는 사람을 소명해 쓰고, 소명을 받은 사람은 그 소임이 다하면 떠난다고 했던가. 파란곡절 많았던 한국 현대사, 분단으로 인해 상처입고 군사독재로 인해 핍박받아 멍든 영혼 많은 이 땅. 그는 분명 우리 현대사에 없어서는 안 되었을 사람이었다.
그는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늘이 나를 그토록 여러번 살려주신 것은 아무래도 나를 이 다음에 크게 쓰기 위하심일 게야.' 6.25때는 공산당에 의해 총살당할뻔 했고, 군사정권하에선 암살기도, 납치, 사형선고의 고난을 겪기도 한 그. 그러나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운다는 인동초처럼 3전 4기 끝에 대통령에 당선, 50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고 남북정상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이란 큰 궤적을 남겼다. 그해 2000년 8월에는 마침내 남과북의 흩어져 살던 200여 가족이 서울과 평양에서 만나 편지 한장, 소식 한조각 주울 길 없던 그들이 마침내 서로를 끌어안고 목놓아 울었다. 그날 서울도, 평양도 남과북이 모두 울었다.
햇볕정책에 대한 왈가왈부는 이 글에선 하지 않겠다. 적어도 고인(故人) 앞에선 사람의 말이 착해야 한다. 김대중. 그 큰 이름이 떠났다는 속보 한줄을 접하는 그 순간. 마치 역사의 큰 수레바퀴 하나가 덜커덩 덜커덩 소리를 내며 저 산너머로 떠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갈라진 내 땅 하나 되고, 피차에 뭉쳐야만 할 남과북의 혈육 서로 얼싸안고 목놓아 울 그날 위하여 몸소 발벗고 뛰신 님이여. 파란과 굴곡으로 점철되었던 한국 현대사에서 권력자에 의해 핍박받고 탄압받던 어둠속의 서민들에게 햇빛 드리울 그날 위해 스스로 목숨 내놓고 싸우신 님이여. 그래서 그 이름이 그토록 큰 것이었구나. 그래서 그가 떠났다는 소식에 이토록 마음 무거워지는 것이로구나.
공교롭게도 우린 이 해에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떠나보냈다. 석 달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눈물로 떠나보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화와 통일의 상징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떠나보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아홉해째가 되고, 새천년이 밝은지 열해째가 되는 이 해에 서민대통령 노무현과 민주화와 통일의 상징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두 거두어가신 저 하늘의 뜻은 또 무엇일까.
선생은 가셨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오늘도 내일도 해와 달은 또 지고 뜰 것이다. 지구와 우주가 무너지지 않는 한 역사와 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또 흘러갈 것이다. 김대중. 한국 현대사에 결코 없어서는 안 되었을 그 큰 존재가 오늘 그렇게 떠나셨다. 이제 우리 비록 마음은 슬프기 그지없으나 차분하게 현대사의 크나큰 인동초(忍冬草)를 보내드리자. 그 인동초 땅에 묻혀 거름이 되고, 찬란히 새로운 꽃과 열매로 피어나실 때 쯤 되면 우리 지금보다 한 걸음 더 진보(進步)한 세상 이루자. 갈등과 상처가 하나쯤은 더 치유되고 봉합된 세상, 모순과 부조리가 하나쯤은 더 바르게 된 세상. 그런 세상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 힘을 모으자. 고인(故人)이 정녕 이 시대 이 땅에 오신 뜻을 되새겨본다면 바로 그것이리라.
삼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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