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8일) 점심을 먹고 잠시 컴퓨터 앞에 앉은 채로 선잠이 들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2시 반이 넘어 있었죠. 눈을 비비며 인터넷 뉴스 사이트에 들어가니 속보가 떠 있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잠시 얼어붙은 듯 꼼짝을 하지 못했습니다. 넋 놓은 듯이 앉아있다 세차게 머리를 몇 번 흔들고 나서야 마우스를 움직여 기사내용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쉽고 슬픈 감정이 들긴 했지만, 연세가 많으셨고 한달 여 병원생활을 하시던 중이라 그리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안타깝긴 했지만 '올게 왔구나...' 뭐, 이런 감정이라고 할까요? 다만 바로 얼마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지 하고 한탄스러운 느낌이 들더군요.
저녁에 오래간만에 후배를 만났습니다.(그 후배의 고향은 광주, 저의 고향은 전북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적에 '선생님'이라 불리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고, 그가 방문할 때 수없이 몰려드는 인파를 직접 경험하며 놀라워하기도 했던 경험이 있지요.
이런저런 그 분에 대한 기억이 나 이야기를 자연스레 나누었습니다. 아마 그 술집에 있었던 거의 모든 분들이 그러지 않았나 싶습니다. TV에서도 계속해서 그 분의 삶에 대한 이야기, 그 분의 업적과 과오 등에 대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후배와 대화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술기운 빌린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리고 TV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후배와 제가 공감했던 것은 90년대 후반 학생운동을 했던 우리들에게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렇게 훌륭하기만 한 분은 아니었다는 것이었죠.
평생 민주화 운동의 전선에서 물러서지 않았고, 권력에 맞서 싸우며 목숨이 위태로운 경험을 하기도 했던 분이고, IMF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여 짧은 기간 동안에 그 어려움을 정리해낸 능력있는 분이고, 평생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셨지만, 그 분이 현직 대통령이던 시기에도 공안사건은 있었고 각종 운동세력에 대한 공권력의 탄압도 없어지지 않았고, 수많은 학생 수배자들이 만들어지고, 양심수들이 감옥 안에 존재했었으니까 말이지요. 그리고 이른바 '신자유주의'라 이야기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그 분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분의 임기 중에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 자리를 잡기도 했고요.
뭐, 수많은 사람들이 그 분과 동시대를 살았고 그에 대한 평가도 비판도 무수히 이어졌으니 제가 거기에 길게 덧불일 필요가 없겠지요.
그런 복잡다단한 감정과 대화들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느 방송인지, 어떤 진행자인지 모르겠지만, 가장 최근에 선명하게 기억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을 말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왠지 왈칵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마지막 가시는 길에, 정부의 반대로 추도사도 하지 못하고, 불편한 몸을 힘겹게 일으켜 분향하던 모습, 그리고 휠체어에 앉아 권양숙 여사의 손을 붙들고 아이처럼 통곡하던 그 분의 모습이 너무 가슴 찡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 눈물이 날 것 같다던 진행자의 말에 저도 감정이 격동된 것이지요.
지금도 그 분께 일말의 원망스런 감정이 남아있고, 과오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만 '영원한 안식'을 떠나신 그 분께 이런 말씀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생을 '민주', '인권', '평화'라는 가치를 지키고 살아오신 당신께,
젊은 동지를 먼저 떠나보내고 몸의 반쪽이 무너진 것 같다는 말을 하셨던 그 때...
이승과 저승에서 더욱 열심히 싸워야 한다고 말하시던 그 때...
마지막까지 무너지는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며 권력을 질타하고 시민의 각성을 촉구했던 순간에도...
당신은 당신이 신봉하는 가치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투사'가 되길 포기하지 않으셨다고 말입니다.
당신의 그 끈기와 헌신을, 무너지지 않는 그 의지와 열정을 존경한다고 말입니다.
어쩌면 그 분이 우리 시대의 최선은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치'를 중시하고 그를 이루기 위해 물러서지 않던 또 다른 투사가 역사 속의 인물이 된 지금, 2009년 수많은 이의 피와 땀으로 한발 한발 걸어온 민주주의가 속절없이 후퇴하는 지금, 갑갑한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남겨진 우리들의 처지와 우리 앞에 놓인 저 머나먼 길이 안타깝고 걱정스럽습니다.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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