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정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지였던 곳이다. 강원도 가장 깊은 산골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은 개발의 한계성을 보일 수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얼마 전에 '새 경춘고속도로'가 생겨나고 강원도가 한결 가까워 졌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가 깊고 깊은 그 산골마을이 북적였다. 때마침 여름휴가의 절정이기도 했다.
애초의 계획대로 가리왕산 휴양림에 머물 생각을 접어야 했던 것도 예상보다 많이 몰려든 사람들 때문이었다. 가리왕산에 어렵사리 도착해서 숲 좋고 물 좋은 산을 눈앞에 두고 그냥 나서려니 너무 아쉬워 늦은 아침을 지어 먹고 다시 길을 돌아 나왔다.
근처에 야영을 할 수 있는 장소는 충분했다. 다만 사전에 미리 알아보지 않았으므로 걱정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화암약수로 야영지를 정했다. 모르는 곳으로 간다는 불안감은 야영장에 들어서 꽉 찬 주차장을 보면서 더욱 커졌다. 그러나 불안감은 이내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야영장이 무척이나 쾌적해 보였기 때문이다. 화암약수를 눈앞에 두고 산 속에 아늑하게 들어선 야영장이었다.
야영장 터는 넓었고 주변 시설은 훌륭하다 싶을 만큼 좋았다. 비좁긴 했지만 샤워시설까지 있었다. 취사장이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었고 화장실도 깨끗하다. 아침저녁으로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비우고 주변 청소를 하셨다.
휴가 기간 동안 정선을 돌아다니면서 느끼는 건 관광지인데도 불구하고 참 깨끗하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했고, 바가지요금을 받는 곳도 없다는 사실이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산 능선이 겹겹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 아래는 어디서든 맑은 물이 넘쳐났다. 그런 지형 속에서 살아가는 탓인지 사람들의 인심이 유난히 좋았다고 기억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강원도여행이 즐거웠다고 생각될 만큼. 화암약수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보니 여러 가지로 좋은 점이 많다. 화암약수 근처엔 정선에서 가장 절경이라는 경치, '정선 8경'이 몰려 있다.
화암약수를 필두로, 거북바위, 용마소, 화암동굴, 화표주, 소금강, 몰운대, 광대곡을 이르러 '정선8경'이라 부른다고 한다. 특히, 화암약수, 화암동굴, 소금강, 몰운대가 절경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화암약수] 화암약수는 철분과 탄산이 함유된 약수로 약간 붉은색을 띠었으며 마시면 톡, 쏘는 사이다 맛이 느껴진다. 피부병에 효험이 있고 위병에도 좋다는 문구는 여타 약수와 비슷하다. 약수물로 밥을 하면 푸르스름한 기운을 띤 유난히 찰진 밥이 된다. 밥맛이 좋은 건 당연지사.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약수로 끓인 커피 맛이다. 약수에 들어 있는 어떤 성분이 천연조미료 역할을 하여 커피 맛을 풍부하게 하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수돗물로 끓인 커피는 결코 흉내 내지 못할 것 같은 맛이었다.
강원도 땅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정선은 산으로 꽁꽁 둘러싸여 있는 느낌이 더 강하다. 정선에 머문 동안 세상과 잠시 떨어져 산 속에 숨어들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건 '행복한 고립'이었는데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휴가도 그런 느낌에 부합되는 거다.
야영장 텐트에 누워 밤벌레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고 새소리에 아침을 맞아 눈을 뜨곤 했다. 눈을 뜨고 맨 먼저 하는 일은 약수를 받으러 가는 일. 약수터를 가자면 산책로를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되어 있다. 화암약수는 두 군데가 있다.
산책로 초입에는 나란히 두군데 홈이 파여 있어 '쌍 약수'라 불리는 곳이다. 화암약수보다 맛이 조금 싱거워 톡 쏘는 화암약수를 못 마시는 사람도 쌍약수는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다. 약수물을 떠서 산책로를 한 바퀴 돌아와 밥을 해먹는다. 산책을 끝낸 후 약수로 지은 밥은 말 그대로 '꿀맛'이다.
화암약수에서 갈 곳이 너무 많다. 정선 제2경에 속하는 '거북바위'가 입구 쪽에 있고 근처에 제각기 이름이 다른 산책로가 즐비하다. 정선의 유명한 산도 많지만 화암약수에서 가자면 소금강이 으뜸일 것이다.
[소금강] 주차장 한쪽에 소금강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8Km미터라서 맘먹고 출발해야 한다. 소금강의 진면목을 살피려면 등산로를 따라 가며 감상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나 왕복 16Km의 거리가 여름이어서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나와 같은 게으른 이들을 위해 소금강 따라가는 드라이브 코스가 따로 나 있다. 물론 '작은 금강'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는 소금강의 진짜 모습은 보지 못하리라. 화암약수 주차장에서 시작해서 몰운대까지 이어지는 소금강 트레킹은 가을쯤으로 미루고 드라이브 코스를 따라 소금강을 '즐감'한다.
정선만의 특이한 정경인 뼝대(석회암 절벽)가 가장 두드러긴 길이기도 하다. 깎아지른 기암절벽이 아슴하게 솟아있는데 절묘하게 자리 잡은 낙랑장송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했다. 온통 붉은색이 감도는 회색절벽과 짙은 녹색의 숲, 그 사이로 하늘이 파랗게 펼쳐져 흰 구름을 두둥실 띄우고 있는 풍경은 영락없이 한 폭의 풍경화다.
티끌 한 점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이 완벽하게 깨끗한 세상은 몰운대까지 이어져 있었다. 차를 타고 지나왔으므로 너무 짧았다고 생각되는 소금강길, 8킬로가 부담스럽긴 했지만 역시 걸었어야 했다. 아쉬움이 컸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건너다보고만 왔어도 훌륭하긴 했지만 그 짧은 시간이 주는 감질 맛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을 더욱 크게 했다. 대신 구름도 쉬어간다는 몰운대에서 아쉬움을 달랜다.
홍송이 아름드리 숲을 이룬 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간다. 입구인 쉼터에서 몰운대까지 200여 미터라는데 너무 짧다. 소나무 숲이 내 품는 향긋한 기운이 너무 좋고, 그 사이로 난 숲 가장자리에 여름꽃들이 만발하다.
[몰운대] 그 숲이 끝날 즈음에 나타난 몰운대는 넓고 평평한 바위가 과연 백여명의 사람들이 앉았다 가도 좋을 만큼 널찍하다. 마치 두부를 싹뚝, 잘라놓은 듯한 바위의 형상이 오묘하다. 주변 풍경은 시원하게 열렸다. 동강의 물줄기가 휘돌아가는 정경이 까마득한 절벽아래 펼쳐졌다. 그래서 몰운대구나,싶다. 네모반듯한 바위사이로 등이 굽은 소나무 몇 그루가 보기 좋게 서 있고 절벽으로 떨어질 듯 위태로이 서 있는 고사목이 한 그루 고독하게 서 있다.
몰운대 바위에 걸터앉아 보면 신선의 경지에 빠지는 일이 어렵지 않을 듯하다. 청정한 소나무 숲의 맑은 기운이 사방에 꽉찬 느낌, 저 아래 물줄기는 시원하게 휘돌아 간다. 폭포수처럼 매미 울음이 쏟아지고 강 건너 마을엔 곡식이 익어가는 밭이 푸르게 펼쳐졌다.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잦았다고 한다. 그럴 만한 장소가 분명해 보인다.
[화암동굴] 화암약수에 머문 이튿날 화암동굴을 찾았다. 어쩌면 정선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이유가 '화암동굴' 때문인지 모른다. 화암동굴에서 진행 중인 '공포체험'이 텔레비전에 소개 되었다고 한다. 오싹한 여름체험을 해 보고 싶은 이들이 꽤 많아서 공포체험을 위한 매표 줄이 꽤 길다.
공포영화 한 편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의 좁은 소견에 공포체험은 언감생심이다. 그냥 상시 관람을 위해 화암동굴로 향한다. 매표소에서 화암동굴 입구까지 200여미터의 길이 상당한 오르막이어서 모노레일을 타고 가는 이들이 더 많다.
화암동굴은 원래 금광을 채굴하기 위한 탄광이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때 '천포광산'으로 불리던 곳인데 금광을 채굴하다가 우연히 천연 종유 동굴을 발견했다고. 금을 캐던 탄광이었으므로 당시 탄광 채굴 현장을 체험해 볼 수 있는 첫 번째 테마 '역사의 장'을 지나면 화암동굴의 마스코트인 도깨비들이 금광석의 채취에서 생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동화의 나라'가 펼쳐진다. 금의 생성 과정에서부터 그 쓰임새까지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금의세계'를 지나면 본격적인 동굴체험이다.
동양최대라는 유석폭포와 대형 석순이 지금도 자라고 있다는 신비로운 동굴의 세계를 눈앞에서 확인하는 특별한 시간이다. 대부분의 다른 동굴처럼 터널을 연상했는데 화암동굴은 엄청나게 커다란 지하의 굴' 이다. 엄청나게 큰 괴물이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자연의 신비 앞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는다. 긴팔을 걸치긴 했는데 추워서 떨어야 했다. 동굴 안은 10도를 유지한다고 한다. 그래서 예전엔 마을 사람들이 김장 김치를 동굴 안에 두고 먹었다고 한다. 지금은 '천연 김치냉장고' 역할을 했다는 장소가 표시만 되어 있다.
금광 채굴 당시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동원된 마네킹과 연장들을 동굴 속에서 마주치던 순간, 공포 체험이 따로 없었다. 동굴 속이라 컴컴한데 습기 찬 철 계단은 또 어찌나 길던지, 그리고 마침내 마주치던 커다란 지하굴에서의 대형폭포 같은 종유석을 보던 순간의 놀라움이 여전히 생생하다. 말 그대로 '한 여름의 오싹했던 공포체험'이 따로 없었다.
정선의 속살을 보자면 2박 3일로는 한참 부족하겠지만 그 시간만큼 들여다본 소감은 한마디로 '좋다'다.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심심산골에서 살아온 이들의 삶은 신산했으리라 미루어 짐작해 보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오늘날의 정선은 산골 마을 본연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곳을 찾은 우리가 정선 사람들의 소박하고 넉넉한 인심을 누릴 수 있었겠다 싶다. 여러모로 참 감사한 일이다.
덧붙이는 글 | 8월 8일, 9일에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