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장 큰 비토세력이었다.
태생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군부에게 김 전 대통령은 언제나 '사상이 의심스러운' 정치인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군부의 만남은 악연으로 시작되었다.
5·16 쿠데타, 김대중과 군부의 악연의 시작국회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세 차례 고배를 마시고, 1961년 5월 14일 4번째로 도전한 제5대 민의원 보궐선거(강원도 인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이틀만에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미처 의원선서도 하지 못한 그는 민주당 간부라는 이유로 쿠데타군에 의해 연행되어 2개월간 옥고까지 치른다.
"천신만고 끝에 국회의원이 됐는데, 3일만에 자격을 상실했다. 나는 운명의 얄궂음을 통탄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85년 발간된 저서 '행동하는 양심으로'에서 김 전 대통령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야당 정치인 김대중은 꼭 10년 뒤 벌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군부와 다시 부딪힌다. 1970년 11월 19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현 향토예비군은 이중병역의 의무를 강요한 위헌적인 것이며, 경찰의 보조기관으로 전락되고 지휘계통이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에 이중으로 되어 있어 정치적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고 생업에 지장을 초래할 뿐 아니라 민폐를 조성, 부정부패를 가져올 뿐"이라며 "예비군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공약을 한다.
쿠데타로 집권해 권력의 기반을 공고화해가던 군부에게 김대중 후보의 이런 소신은 아주 위험한 것이었다. 김대중 후보는 "국군은 특정 정당이나 개인의 사병이 아니며… 군이 정치에 자주 개입하면 정국의 안정과 민주발전을 해친다"며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지만, 군부와 여당은 "군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며 김대중 불가론을 유포했다.
"사상이 못미더운 DJ, 집권해선 안 돼"지난 2006년 별세한 강창성 전 의원(전 국군보안사령관, 민주당 14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총재 권한대행)은 생전에 <동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71년 대선 당시 군부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군부가 DJ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DJ의 '사상'에 대한 못미더움이고, 또 하나는 5·16의 연장선상에 있던 당시 군 주체세력들이 DJ가 집권할 경우 보복 가능성 등을 우려했다는 점이다."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김대중 후보는 70년대 내내 투옥과 망명, 연금 상태에서 지내야 했다. 유신으로 영구집권의 길을 걸어가던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잠시 '서울의 봄'이 찾아왔지만, 군부는 여전히 그를 불신했다. 김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씨는 자서전 '동행'에서 당시의 시련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정국이 요동치는 가운데 우린 여전히 연금 중이었다. 불안한 가운데 사태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중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참모총장이 11월 28일 언론계 간부를 육군본부로 초청해 말한 내용이 전해졌다. "김대중은 사상이 좋지 않다. 그는 용공이다. 최고사령관은 고사하고 일개 소위도 할 수 없다" 이는 김대중 비토 세력인 정치군인들의 일관된 태도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군인 집단이 모든 권력을 거머쥔 25년 동안 그가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남은 것이 오히려 기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이 발언을 하고 불과 2주 뒤 정승화 참모총장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이 일으킨 12·12 쿠데타로 체포된다. 하지만 신군부라고 그에 대한 인식이 다른 것은 아니었다. 독재자의 비호를 받으며 기득권 세력으로 성장해온 신군부 세력에게 "사상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정치인"(전두환 보안사령관 발언) 김대중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잠시 연금에서 해제되어 자유의 몸이 된 그는 "군의 정치적 중립은 절대로 유지 돼야 한다. 본인은 앞으로 정치개입이라는 부당한 사태를 감히 저지를 군인이 있을 것으로 믿지 않는다. 국민이 절대로 원치 않기 때문이다"(80년 4월11일 대전연설)라고 군에 대한 신뢰를 역설했지만, 그 믿음의 결과는 참담했다.
신군부 세력은 80년 5월17일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함께 광주민주화 항쟁을 총칼로 탄압했고, 계엄군에 연행된 그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국내외적으로 대대적인 구명운동이 벌어진 결과 군사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데 이어 82년 12월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열어 활동하다 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귀국한다.
87년 6월 항쟁으로 군사정권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였을 때도 군부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박희도 육군참모총장은 "김대중씨의 대통령 출마를 반대한다"는 공개선언을 했고, 모 장성은 사석에서 "김대중이 대통령 된다면 수류탄을 들고 뛰어 들겠다"는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정치적 라이벌인 김영삼은 이 같은 분위기에 편승해 '군이 원치 않는 사람은 군 통수권자가 될 수 없다'는 논리로 대통령 후보 사퇴를 압박했다.
국민의 정부 햇볕정책, 군 출신 보수집단과 충돌
민주화 세력의 분열로 87년 대선에서 패배하고, 이듬해 치러진 13대 총선 이후 그는 적극적으로 군부를 포용한다. 그는 군부와의 관계개선을 염두에 두고 국회 국방위원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92년 14대 총선을 앞두고 김윤호 전 합참의장,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을 비롯하여 임복진, 나병선, 정영주씨 등 예비역 장성을 대거 영입하여 자신에 대한 군부의 거부감을 없애는데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97년 대선에서 그는 대한민국 제 1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역설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등장은 한국사회에서 민군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음을 반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군부의 정치개입을 가능케 하는 구조적 요인이나 정치화된 군인들은 발붙이기 힘들게 되었다. 하지만 국민의 정부 5년 내내 햇볕정책으로 상징되는 대북정책과 국방정책을 놓고 보수진영은 그를 끊임없이 공격했다.
87년 이후 한국사회에서 군의 탈정치화가 진행되어 민간정부에 대한 군부의 영향력은 미미해졌지만, 재향군인회와 성우회로 대표되는 군 출신 보수집단은 목소리를 높여 "북한의 핵개발을 방조하는 퍼주기 정책"이라며 그의 대북화해협력정책을 비난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는 "6·15공동성명에서 북한의 독재체제를 수용해 연방제로 한반도를 통일하려는 것은 국사범에 해당된다"(박세직 전 재향군인회장)는 평가를 했다. 이런 불신의 근저에는 평생 그를 따라다닌 좌익혐의자라는 낙인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 좌익이었을까? 워싱턴포스트 기자였으며 한국 전문가인 '돈 오버도퍼'는 그의 저서 <두 개의 한국>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80년 필자의 대담에서 일부 고위 군 관련 인사들은 김대중이 과거에 북한의 사주를 받았거나 현재까지도 사주를 받는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다수는 김대중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김대중과 여러 차례에 걸쳐 인터뷰해온 필자로서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1980년대 말 CIA 전문 요원 출신인 제임스 릴리 주한 미 대사는 김대중의 과거 행적을 면밀하게 조사한 뒤 그가 공산당에 가담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정치 인생의 시작과 동시에 군부와 맞닥뜨렸던 김대중에게 반세기에 걸친 군부와의 불화는 어쩌면 숙명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 현대정치사에 큰 그늘을 드리웠던 군부독재의 망령은 정치인 김대중을 탄압했고 그를 사형수로 만들기도 했다. 독재정권의 음험한 정보기관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를 '빨갱이'로 채색했고 이 딱지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민주정부 아래서 국민과 국군의 일체감이 조성됐을 때만이 우리 안보는 철벽 태세를 확립할 수 있다"(80년 4월 11일 대전 연설)는 그의 믿음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었지만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는 너무나도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