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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국회 앞마당에서 열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영결식장에서 천주교 종교의식이 진행되고 있다.
23일 국회 앞마당에서 열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영결식장에서 천주교 종교의식이 진행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남소연

지난 18일 서거한 김 전 대통령만큼 정치가로서 전 생애에 걸쳐 평화문제에 천착한 인물은 드물다. 정치인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인물 중에는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1971년),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레둑토 전 베트남 정치국원(1973년), 사토 에이사쿠 전 일본 총리(1974년),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 메나헴 베긴 전 이스라엘 총리(1978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1990년),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1993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2002년), 엘 고어 전 미국 부통령(2007년) 등이 있다. 이중에서 김 전 대통령과 가장 비슷한 삶을 산 인물은 빌리 브란트다.

불우한 집안에서 태어난 빌리 브란트 역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일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인물이다. 그는 권터 그라스 같은 양심적 지식인들의 공개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김 전 대통령처럼 끊임없는 이념공세와 흑색선전에 시달려야 했으며 결국 1974년 동독 간첩 사건으로 사임했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자 독일 언론과 국민들은 '독일통일의 아버지'로 당시 총리였던 헬무트 콜 대신 브란트를 꼽았다. 그리고 1999년 독일 수도가 본에서 베를린으로 이전하면서 연방수상관저와 연방의회가 위치한 베를린 정치의 중심지역은 '빌리 브란트 거리'로 명명되었다.

김 전 대통령도 생전에는 정치적 편 가르기, 지역감정과 수구언론의 왜곡보도 등으로 매우 인색한 평가를 받았으나 서거 후 평화통일에 대한 그의 신념과 진정성이 재조명되고 있다. 미래의 어느 날 남북한이 통일될 때 김 전 대통령 역시 '한반도 통일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서 김 전 대통령이 정치인으로서 평화문제에 탁월한 업적을 거둔 반면 정치 외에 다른 부문에서 그를 필적할 인물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일제 강점과 해방, 좌우대립, 국제전으로 비화된 한국전쟁, 미․소 냉전체제의 산물인 남북한 대치라는 현대사의 모든 질곡이 첨예하게 부딪친 한반도에서 김 전대통령에 필적할 만한 세계적 평화운동가가 없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유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상생과 평화를 상징으로 하는 종교분야에서 그만한 인물이 없는 것은 한국종교가 반성할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해외로 눈을 돌릴 때 역대 노벨평화상자 중에는 종교인들이 많다. 흑인민권운동의 상징 마틴 루터 킹 목사(1964년), 빈민의 어머니였던 테레사 수녀(1979년), 남아공 인종차별폐지에 앞장선 데스몬드 투투 주교(1984년),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1989년) 등은 가장 잘 알려진 예고 이외에 미국 퀘이커 봉사 위원회 및 영국 퀘이커 봉사협회(1947년), 동티모르 독립운동을 이끈 카를로스 시메네스 벨로 주교(1996년)도 세계평화에 큰 기여를 했다.

물론 종교인이자 사상가였던 함석헌 선생이 독재정권과 싸우면서 두 번이나 노벨평화상 후보자에 올랐고 고 문익환 목사 역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북한 김일성 전 주석을 만나 한반도 평화를 논의하기도 했지만 한반도라는 특수 상황에서 더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평화운동에 헌신했어야 함에도 소극적으로 임한 것은 그만큼 한국종교가 시대정신이 투철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평화보다는 갈등을 조장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개신교, 김일성 부자와 북한정권을 사탄으로 간주하고 분단체제 강화

대표적으로 개신교는 가장 첨예하게 갈등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북한정권과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사탄의 무리로 간주하면서 박정희, 전두환 등 역대 군사독재정권에 협조하면서 반북 활동에 동참했다. 민주화가 된 후 들어선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는 용공정권으로 규정하고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개신교의 반북, 반공산주의 운동은 해방 후 북한정권과 갈등을 빚고 남하한 북한출신 기독교인들의 영향이 크기는 하지만 일제시절 이미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와 대화하느니 일제에 협력하겠다는 입장을 가진 개신교인들도 많았다.

미국 근본주의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인들은 1920년~1930년대 사회주의와의 논쟁과정에서 공산주의를 기독교를 방해하는 가장 큰 위협임과 동시에 말세의 징조로 보았다. 당시 성결교단의 지도자였던 이명직 목사는 1938년에 쓴 '붉은 용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말세의 붉은 용은 소련의 공산주의이며, 그 증거로서 종교박해, 인명살상, 사상혼란 등을 들었다. 그는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이 사단 즉 붉은 용의 도래 사상과 건전히 싸움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명직 목사는 일본·독일·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이 결성한 반공연맹이 기독교의 입장을 지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신앙의 자유를 박해하는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일본·독일·이태리의 연합전선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공산주의를 반대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공산주의가 반종교적인 집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산의 사상이라는 것은 오늘날 종교를 무시한다. 그뿐 아니라 종교박멸 운동을 도와주고, 무신론을 장려하여 인생의 전도를 암흑화시키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던지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공산주의를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의 협력도 무방하다고 말할 정도로 당시 한국의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공산주의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해방 후에도 개신교의 반공주의는 미군정과 한국전쟁 기간을 거치면서 강화되었고 분단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대분열의 아픔을 겪었다.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WCC)와 미국교회협의회(NCC-USA)가 미국정부에게 중국의 UN가입을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자 미국의 보수교회들은 WCC와 NCC를 용공집단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했고 그 영향은 한국에도 미쳤다.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경우 WCC 가입 문제로 논란에 휩싸였고 WCC가입을 지지하는 측은 통합 측으로, 가입을 반대하는 측은 합동으로 분열했다. 1961년에는 감리교와 성결교도 같은 이유로 분열해 감리교는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와 예수교감리회(예감)로, 성결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로 갈라섰다. 한국교회 대분열의 배경에는 반공주의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려 했던 이승만 정권의 공작도 한 몫을 했다. 실례로 이승만 정권은 WCC회의에 참석하려는 인사들에 대해서는 비자발급을 거부하고 반WCC진영에 대해서는 재정적 지원을 하는 등의 많은 혜택을 베풀었다. 50년대 반공주의를 통해 이승만에 협조하고 교회분열을 앞장섰던 개신교 보수주의자들은 공산주의와 대결을 영적인 전쟁으로 이해했고 현재까지도 북한에 대해서는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불교, 비구·대처 분쟁과 정권의 간섭으로 통일문제에 소극적

불교의 경우는 해방 이후 종단내부 문제로 대외적 활동에 소극적이었다.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시작된 비구·대처 분쟁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고 박정희 정권은 불교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불교재산을 보호한다며 '불교재산관리법(불재법)'을 제정했다. 불재법은 일제가 한국불교를 장악하기 위해 만든 사찰령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종단의 인사 및 종통분쟁에서 재산분쟁에 이르기까지 국가권력의 개입을 허용한 비민주적인 법이었다. 불재법에는 불교단체의 종류 및 문화공보부 등록, 주지 또는 대표자 등록, 단체의 대표권 및 재산관리권 등을 규제하고 사찰 경내에서 공사를 할 경우 정부관청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또한 불교단체가 불재법을 위반하거나 분규로 인해 이 법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인정될 때는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 재산관리인(총무원장)을 임명 또는 해임할 수 있는 권한도 포함했다. 불재법은 1987년 11월 '전통사찰보전법'으로 바뀌기까지 불교계의 국가보안법과 같은 역할을 했다.

종단 갈등과 각종 규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불교계는 마침내는 호국불교론을 주장하면서 박정희 정권에 협력하기도 했다. 불교계 주류학자들은 서산대사(휴정)와 사명대사(유정)를 끌어들여 임진왜란 당시 승병 활동은 호국불교의 정점이었으며 한국불교사의 자랑스러운 전통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불살생이라는 불교의 기본교리는 무시하고 '단순한 애국행위가 아니라 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보살행', '신명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싸운 것은 불교인 본연의 자세로 한국불교의 호국정신과 승려의 애국정신이 살아 있는 좋은 증거'라고 치켜세웠다.

이에 대해 박해당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은 지난 22일 보조사상연구원(원장 법산)이 주최한 제2회 광해군 추선 기념 학술세미나에서 "임란 당시 의승활동의 잘잘못에 대한 판단 이전에 그 행위가 어디에서 연유했나, 살생에 임하면서 불교 가치를 구현하려는 고민이 보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불살생의 계율을 받은 수많은 수행자들이 무기를 들고 전장으로 달려가야 하는 이유로서 유정이 내세운 것은 오로지 '임금의 은혜를 갚을 의무가 있는 신하된 이의 도리'일 뿐, 어떠한 불교적 명분이나 근거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 연구원은 휴정, 유정 같은 조선 중기 고승들이 지닌 국가주의의 근원은 조선 중기 독실한 불교신자이면서 당시 명종의 섭정이었던 문정왕후의 후원 아래 불교의 부흥을 꾀했던 보우선사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후 조선후기 불교교단은 자신들에게 세속권력의 부당한 횡포에 대해서조차 저항하지 못하고 체제순응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조선이 멸망한 후에도 일제와 해방을 거치면서도 사회적인 비판세력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왜곡된 호국불교론의 영향과 세속권력과의 협력을 통해 불교계 이익을 옹호하려는 불교계 지도자들은 박정희 정권의 요구에 따라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승려의 군복무를 받아들였다. 박 정권 역시 남북대치와 월남전 등으로 국가가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위기에 처했다면서 승려의 군복무를 정당화했다. 일부 젊은 승려들이 엄지손가락을 태우는 소지공양을 통해 월남참전과 군복무를 피하기도 했지만 불교계가 공식적으로 승려들의 군복무를 받아들인 것은 한국불교계의 큰 오점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하버드대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으로 유명한 현각스님의 스승 숭산스님(2004년 입적)이 세계 4대생불로 알려졌지만 달라이라마, 틱낫한, 고사난다 같은 인물들에 비해 존재감이 부족했던 것은 평화문제같은 사회적 사안에 소극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에서조차 이케다 다이사쿠(국제SGI대표)같은 세계적 평화운동가가 나온 것도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한국불교가 평화통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정부시절부터였다. 1990년대 이후 북한의 식량난 해소를 위한 인도적 지원 사업, 남북 불교지도자간의 만남, 금강산 신계사 복원운동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천도교, 민족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평화통일운동에 적극 참여

천주교는 1960년대 요한23세가 주도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이후 확산되기 시작한 사회참여열기로 정의구현사제단 같은 소장파신부들은 물론 고 김수환 추기경․지학순 주교 같은 교계지도자들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기도 했으나 80년대에 이르러서야 통일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천주교에서 통일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인물은 문규현 신부다. 그는 천주교신자이자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 대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씨와 함께 판문점을 넘어 귀환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문 신부는 이후 수경스님(화계사 주지)과 함께 새만금 살리기 오체투지 대장정에 나서는 등 생명평화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불교, 개신교 같은 주류종교가 평화통일운동에 소극적이었던 반면 천도교는 매우 적극적으로 임했다. 천도교는 동학의 후신으로 서구 기독교에 대항하는 민족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출발했기 때문에 통일문제에 적극적이었다. 북한의 김일성 전 주석도 어린 시절 아버지(김형직)의 친구이자 천도교 신자였던 독립운동가 최동오 선생에게 신세를 지고 천도교의 '보국안민(輔國安民)사상"을 배웠기 때문에 천도교는 북한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종교가 되었다. 북한당국은 천도교의 뿌리인 동학에 대해 "19세기 중엽 최제우가 만들어낸 우리나라 고유의 종교철학 사상", "가혹한 착취와 압박, 외래 침략자들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농민, 수공업자를 비롯한 인민들의 자주적 요구가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천도교신자이면서 월북인사인 최덕신은 최동오 선생의 아들로 1936년 만주에서 중국 국민당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장교로 복무하며 항일전에 참가했다가 해방 후 귀국해 육군사관학교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중장으로 예편한 후 베트남 대사, 외무부장관, 서독주재 대사로 일하다 1967년 천도교 교령 자리에 올라 한국종교인협의회 회장을 맡은 후 1976년 미국으로 이민 갔다가 1986년 북한에 정착했다. 최덕신은 북한에서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지내다가 1989년 사망해 아버지 최동오가 묻혀있는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최덕신의 부인인 류미영 역시 상해임시정부 간부이자 천도교신자였던 류동렬 선생의 딸로서,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고문, 단군민족통일협의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공동의장 등을 맡다가 2000년 8월 남북 이산가족 방문단 북측 단장을 맡아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남한의 천도교도 해마다 평화통일대행진을 벌일 정도로 한반도 통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78년 8월에는 임진각에서 춘천교구장인 이도천씨가 '평화통일'을 외치고 분신자살하기도 했다. 그는 천도교인들과 평양을 향해 통일행진을 하다가 당국에 의해 저지당하자 철조망을 움켜쥐고 통곡을 하다 통일기원 기도를 올린 후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했다. 이 사건은 통일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유신정권의 방해공작으로 축소보도되었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1994년에는 동학혁명 100주년을 맞이해 남쪽의 오익제 천도교 교령과 북한의 류미영 천도교 청우당 위원장이 남북 천도교인들이 판문점에서 기념행사를 갖기로 했으나 북한 핵문제를 핑계로 김영삼 정부가 반대하면서 무산되었다. 행사가 무산되자 남한정부에 실망한 오익제 교령은 1997년 미국을 통해 북한에 들어간 후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회 고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직책을 맡기도 했다.

통일운동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종교계의 평화통일운동의 필요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통일에 대한 기본인식이 부족하고 북한정권을 근본적으로 불신을 가지고 있는 이명박 정권은 상황에 따라 통일정책을 바꿀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현 시점에서 남북화해와 상생을 위해 온 몸을 던질 지도자들이 절실해지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 주류가 여전히 반북, 반김정일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불상생 등 생명존중을 기본원칙으로 하는 불교계의 역할은 더욱 커지고 있다.

불교계가 개신교의 '예수천국 불신지옥'같은 저급한 선교정책에 일일이 대응하고 종교편향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보다 한반도와 세계평화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해 좋을 것으로 보인다. 달라이라마가 평화를 상징하는 인물로 존경받고 티베트불교를 세계인의 종교로 만든 것은 좋은 예가 된다. 원효․의상․지눌 같은 위대한 인물을 낳은 한국불교로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김대중#불교#기독교#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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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모.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씨알재단에서 홍보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씨알정신을 선양하고 시민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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