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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횡설수설은 수사관을 질리게 만들 정도였어. 그녀는 신경질적이면서도 교묘하게 논점을 피해 나갔지.

"제발 실속 있는 말씀 좀 해 보세요."
"내가 말 안하는 게 뭐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납치된 게 사실이라면 납치한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럼요. 범인에게 납치된 것이라니까요."

"납치범은 몇 명이었습니까?"
"잘 모른다고 했잖아요."
"납치범이 아무 말도 안 했습니까?"
"안 했으니까 내 기억에 없는 거겠지요."

"납치 다음에 어디론가 가셨을 거 아닙니까?"
"그럼요, 갔지요."
"뭘로 갔습니까?"
"자동차였겠지요. 그 산 속에서 자동차 말고 또 뭐가 있겠어요?"

"시간은 얼마나 결렸습니까?"
"그런 건 모른다고 했지 않았습니까?"
"끌려 간 장소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눈을 가려서 모릅니다."

"몇 층이었습니까?"
"모릅니다."
"엘리베이터를 탔나요?"
"기억에 없어요."

"한강에서 보트에 태워질 때의 정황을 아는 대로 말씀해 보시지요."
"기억에 없어요."
"범인에게 들은 말을 한 마디라도 해 보세요. 제발."
"그만 가 주세요. 제발."

이숙희와의 대화는 주로 이런 식으로 겉돌았을 뿐이었지.

보고서를 읽은 수경은'내가 한 번 이숙희를 만나 보면 어떨까'했다가 그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다고 했지. 맞는 판단이었어. 프로파일러는 현장과 문서로만 추정해야 주관을 배제할 수 있는 법이지.

아마도 수경은 이런 생각을 했을 테지.

'프로파일링은 수사의 도구일 뿐이다. 내 일은 범인을 잡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찰관이 한다.'

수경은 사건의 성격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고 했지. 직장에서는 무력감을 느끼고 집에 가서는 허탈감에 빠졌다고 했어. 실제로 수경은 사건이 진행되던 기간에 4킬로 정도 체중이 줄었다고 했어.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이었을 거야. 수경에게 언제나 애틋한 마음을 일게 했던 어머니와도 대화를 별로 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어.

저녁을 먹으면 제 방으로 와 넋을 놓고 방바닥에 앉아 있거나 손으로 두 뺨을 감싼 채 하염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고 했지. 사건을 해결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공포감으로 바뀌었고, 그 공포감은 그것과 사촌 격인 우울증으로 번지고 있었던 거지.

수경은 자신의 머리를 깨끗이 비우고 싶었을 거야. 그래야 선입견 없는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 그래서 수경은 텔레비전을 켜기 시작했어.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텔레비전만큼 좋은 게 어디 있겠어? 그러나 집중해서 본 프로그램은 없었다고 했지. 자꾸만 사건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거야.

'조수경 수사관' 앞으로 범인의 편지가 배달된 것은 수경의 그런 생활이 일주일쯤 계속 되었을 때일 거야. 발신자가 없는 편지였지만 처음 수경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봉투를 열었다고 했어. 수경은 편지가 영어 대문자로 작성된 것을 보는 순간 초긴장 상태로 바뀌었지. 긴장 때문이었는지 수경은 편지를 읽으며 다시 한 번 기침을 했어. 놀랍게도 편지는 범인이 보낸 것이었지.

당분간 징벌은 없다.
우리가 죽이려 했던 EXTREMERIGHTIST(극우주의자)가,
마침 스스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년 6월 15일에는,
또 다른 악인들이 한꺼번에 강물에 떠오를 것이다.

편지는 단 세 문장으로 되어 있었어. 당분간 범행은 없을 것인데 그 이유는 자기들이 죽이려 했던 사람이 스스로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 대신 내년 6월 15일에는 한꺼번에 복수의 피살자가 강물에 띄워질 것이라는 범행 예고가 담겨 있었지.

일단 경찰은 범인이 지목한 '극우주의자'가 누구인지를 쉽게 알 수 있었어. 이철식의 죽음은 신문에도 보도되었지. 그는 해방 정국에서 반탁 운동의 첨병이었고 청년 시절인 자유당 때에는 이미 정가의 거물이 되었지. 한때 그는 대통령 후보군에도 포함된 적이 있었어. 80대 초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민족자유연맹 이사장직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이지.

확인되지 않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가 미국 CIA의 요원이라는 소문이 나돈 적이 있었어. 그는 "'양키 고 홈'을 외치는 자는 먼저 '고우 투 헬(Go to hell)'하라"고 말하고는 했지. 그는 북한에 대한 경제 원조를 '조공(朝貢)'이라고 표현했어. 

다음으로 편지의 소인은 인천공항 우체국의 것이었어. 그러나 수경은 그것에 의미를 두지 않았지. 왜냐하면 얼마든지 범인이 공항에 가서 편지를 붙이고 서울로 되돌아 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 그러나 우체국 소인을 완전히 무시할 수만은 없었어. 경찰은 공항 톨게이트 카메라에 찍힌 차량과 탑승자를 조사하느라 많은 노력을 들였지. 그리고 공항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도 샅샅이 검토했지.

그러나 수경은 카메라 검토 작업에 기대를 하지 않았어. 범인이 카메라에 잡힐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거지.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고 오가면 톨게이트 카메라에 찍히지 않을 것이며, 이번 사건의 범인처럼 주도면밀한 자가 공항청사 내 카메라에 수상쩍은 점을 노출할 리가 없다고 본 것이지. 수경은 국과수에 밀봉해서 보낸 편지의 성분 분석 결과에 더 기대를 걸고 있었어.

점심을 구내식당에서 혼자 먹고 난 후 수경은 머리를 비우고 싶어 로직 퍼즐을 하고 있었지. 내가 만나자는 연락을 해 왔다고 수경에게 전해 준 사람은 용 부장이었을 거야.

"신세대 수사관은 퍼즐을 하는군. 아브라함 박사가 전화해 달라고 했어."

수경은 내가 머무는 신라호텔로 찾아왔지. 나는 꼭대기 층 스위트룸을 빌려 집무실 겸 거실로 쓰고 있었어. 나는 수경이 들어오기 전 보고 있던 애니메이션 영화를 껐어.

"이렇게 오시게 해서 미안하오. 나는 서울 지리에 어두워요."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마치자마자 우리는 곧장 사건 얘기로 들어갔지.

"미스 조, 나는 이번 사건이 정치적 성격을 띤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편지를 보니 저도 그런 확신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민주화에 성공한 듯이 보이는 한국 정치는 어두운 터널의 기억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감나게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최소한도 해방 이후의 현대사를 공부하십시오."

수경은 아래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어. 진작 공부했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는 후회감 같은 게 표정에 어리더군. 그러더니 수경은 한두 번 기침을 했어.


#6`15#범행예고#연쇄살인#프로파일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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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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