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지식인인 조국 서울대 교수는 한 강연에서 "언제까지 장례식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에서 두 전직 대통령을 가슴에 묻었다. 이는 떠나간 이들에 대한 슬픔이기도 하겠지만 현실의 암담함에 대한 절망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이제 장례식은 끝났다. 남의 자의 몫은 그 슬픔을 모아 절망을 이기는 힘으로 만드는 것이다.
어려운 숙제다. 인격화된 김대중, 노무현에게 기대지 않고 그들이 생전에 추구했던 가치를 온전하게 평가하고 선별해서 계승해야 하기에 어렵다. 민주당이 두 전직 대통령 사진을 당사에 걸면서 요란을 떠는 것은 어려운 숙제를 쉽게 풀려고 한다는 의심이 든다. 군부독재에 저항하고 민주화운동을 만들었던 힘은 이제 두 상징적 인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운동과 대안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을 강조했다. 한 편의 연극 관람기일 수도 있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이런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방송통신대 법학과 학생들이 준비한 연극 "진실을 외쳐라"를 관람하면서 내내 머릿속을 채웠던 생각은 두 전직 대통령이 남긴 숙제를 풀 수 있는 시작이 여기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용기는 하나의 목소리에서 시작된다
지난 8월 28일 토요일 4시, 대학로에 위치한 아리랑 극장의 입구에는 이런 A4 용지가 붙어있었다. "인권연극제 '진실을 외쳐라!'" 대학로의 즐비한 연극 포스터에 비한다면 수줍어 보이기까지 하는 흰색 A4 용지 위의 검은 글씨였지만, 어쩌면 이 연극의 본심이 드러난 모습이기도 했다.
방송통신대 학생들의 공연. 반 이상이 태어나서 연극이라고는 한 편 본 적 없는 이들이었다. 대부분 직장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는 이들이기에 연극연습은 저녁 7시 반이 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기말고사가 끝난 7월말부터 꼬박 한 달을 준비한 연극. 그러나 이들의 연극은 단지 아마추어의 '학예회'가 아니었다. 이들은 이 연극을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한 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게 헌정하겠다고 말했다. 흰색 위의 검정 글씨는 소박하지만 단단한 '근조' 이자 '약속'이었다.
"진실을 외쳐라"는 미국의 저명한 인권운동가 케리 케네디가 전 세계 51명의 인권운동가들을 직접 인터뷰한 내용의 원작에 바탕을 두고 있는 목소리 극이다. 존 말코비치, 시고니 위버, 케빈 클라인 등 저명한 배우들이 참여한 이 연극이 미국 50개 주를 돌면서 공연되었을 때 매 회 15분 이상의 기립박수를 받았을 만큼 감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대학로에서의 '진실을 외쳐라' 역시 뭉클했다. 인물이 등장할 때 목소리는 말한다. "용기는 하나의 목소리에서 시작된다." 고문과 납치, 탄압을 견디면서 인권을 위해서 싸운 사람들이 진정 원했던 것은 목소리였다.
과테말라에서 납치당했던 수녀 다이애너 오르티스는 말한다.
"날 고문한 사람들은 재판을 받은 적이 없어요. 고문을 지휘한 미국인도 재판을 받지 않았어요. 난 이제 무고한 시민이 심문당하고, 고문당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어요. 어둠속에서 고문을 기다리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어둠속에서 진실을 기다리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그녀는 1996년 백악관 앞에서 자신의 사건에 관한 문서와 함께 1954년 이후 과테말라의 인권유린과 관련한 미국 정부 문서 일체를 공개를 요구하면서 농성을 시작한다. 진실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시작되었다.
코스타리카의 대통령을 지낸 오스카 아리아스 산체스는 주장한다.
"군사기지. 이것은 우리 문명의 우선순위가 완전히 왜곡되어 있다는 뜻이다. 매년 7천 8백억 달러가 살인도구에 투자되고 있다. 사람을 죽이라고 만든 대포나 전투기에 투자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돈을 인류발전을 위해서 쓸 수도 있다. 만일 앞으로 10년간 그 돈의 딱 5%만 빈곤방지 프로그램에 투자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기본적인 사회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대포나 장군이 아니라 학교와 의사가 필요하다고 외친다." 그는 전세계적인 비무장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평화를 위한 사고의 근본적인 전환 역시 이처럼 하나의 목소리에서 시작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텍스트
이번 공연에서는 원작을 넘어 장준하와 전태일의 삶이 보태어졌다. 전태일은 말한다.
"나는 이 땅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노동자 전태일입니다. 매일 꼬박 16시간을 일해야 겨우 먹고살 수 있는 사람. 피를 토하면서도 미싱을 돌리는 어린 누이를 보면서 너무 아팠습니다. 대학생 친구 하나 있었으면 했지요.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스스로 근로기준법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전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재단사들의 모임을 만들었지요."전태일이 만든 모임은 '바보회'였다. 기계처럼 일만하는 자신들은 바보라고. 하지만 바보처럼 되든 안 되든 한 번 부딪혀 보자고. 이미 '바보'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난의 가시밭길을 스스로 자처하고, 세태와 타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기에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바보일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사람 누군가는 우리들 바보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처절한 외침은 똑똑한 사람들에 의해 무참히 구겨졌습니다. 그 때 알았습니다. 세상에 말을 걸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전태일은 죽음으로써 외쳤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학대하지 말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지금의 나를 잊지 말아 달라." 39년 전 전태일의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연극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으며, 직접 장준하 역할까지 맡은 방송통신대의 곽노현 교수는 이 공연을 군부대에서, 경찰서에서 교도소에서, 고등학교에서 이어갈 것이라 말했다. 이 연극이야 말로 인권감수성, 인권의식을 기르는 것에 최상의 교재라고 했다.
두 대통령이 남긴 것
2006년에 번역되어 나온 "진실을 외쳐라"의 추천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이 무엇을 남겼는가를 말한다.
"독재정권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많은 사건을 조사해서 진상을 밝혀왔다. 민주화운동 유공자들을 포상하고 그 명예를 회복시켰다. 국제적 기준에 합당한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었고, 지금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이제 한국은 인권선진국의 대열에 올라섰음을 당당히 밝혔다. 2006년 5월의 글이었다.
2009년.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얼마 전 그 활동을 종료했다. 250여 건이나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고, 냉동고에 장례도 못 치른 시신이 20구나 있었지만 한나라당이 연장에 반대했다.
'내 자식이 군대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부모들은 신지호 의원실에서 통곡을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전여옥 의원은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지정된 부산 동의대 사건 관련자들을 "부모에게 칼부림을 한 패륜아에게 효자상을 안긴 것"이라며 재심을 청구하겠다고 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문외한인 헌병철 위원장과 함께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고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일까? 오히려 시작은 그곳이다. 그동안 밝혀낸 의문사의 진실. 국가폭력에 희생된 억울한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 국가인권위원회의 유보될 수 없는 인권을 옹호한 결정문. 그것들을 그냥 문서로만 놓아둘 것인가? 아니면 그 진실이 외쳐지도록 만들 것인가. 그 속에서 우리가 지난 시간 쌓은 것이 무엇이며 지켜고 이어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명확해 질 것이다.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지닌 방송대 학생들이 무대에서 진실을 외치는 모습은 '가능성'이라고 느껴졌다. 행동하는 양심,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 그 시작은 이처럼 평범한 시민들의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일 수밖에 없다. 이 학생들은 한 달 동안 국가의 억압과 폭력에 맞선 이들의 삶을 담은 연극을 준비하면서 분명 진실이 가진 무게와 그것을 기억해야 하는 의무를 느꼈을 것이다.
연극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장준하와 전태일을 넘어 용산참사 철거민의 절절한 죽음을 담는다 하더라도,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바보 노무현의 삶을 담는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어둠속에서 고문을 맞이해야했던 인권운동가들은 연극을 통해 말한다. "진정 두려운 것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그 어떤 형태라 하더라도 진실이 끊임없이 외쳐질 수 있다면,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서라도 진실을 뇌까릴 수 있다면, 우리는 행동하는 양심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더운 여름, 감동적인 연극을 위해 고생하신 방송대 법학과 학생분 들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