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인 일본국민이 변화를 선택했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가 이끄는 민주당은 총 480석 중 308석이란 압도적 지지를 받고 화려하게 '새 일본(新日本)'의 문을 열고 있다. 창당 이래 거의 54년간 권좌에 마물렀던 자민당은 선거 전 300석에서 무려 181석을 잃은 119석의 초라한 야당으로 전락했다. 역사적 사건이다.
패전의 잿더미로부터 경제기적을 이룩하고, 상대적으로 평등하고 안전한 사회를 구축했으며, 든든한 국가안보의 공을 쌓은 자민당에 국민이 심판을 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3년 일본의 유권자들은 난공불락처럼 여겨졌던 자민당을 버린 바 있다. 장기집권에 따른 부패와 무능 때문이었다. 대중적 인기를 지닌 호소카와(細川)를 중심으로 반자민당 연합이 등장, '새 일본'의 기대를 한껏 고양시켰으나 불과 1년을 못 버티고 붕괴되었다. 자민당은 연립정권을 구성해 권좌에 다시 올라 이후 15년을 통치했다.
자민당 몰락, 예고된 혁명
그러나 그때 동요했던 자민당의 지지기반은 결코 복구되지 못했고, 장기불황과 양극화 심화, 고령화에 따른 사회적 활력의 저하 등 구조적 도전 속에서 정치와 정책은 표류했다. 고이즈미(小泉)의 5년 장기집권을 예외로 치면 자민당 연립내각의 평균수명은 1년을 조금 웃돌 따름이었다.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정책변경, 미봉책, 뒤로 미루기 등을 반복했다. 오늘의 선거결과는 그간 진행되어온 지각변동이 지진으로 이어진 것이다. 하토야마의 표현처럼 이것이 '혁명'이라면 이는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이제 일본은 어디로 가나.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인가. '新시대'의 '新'이 새로운 집권세력의 등장을 의미한다면 분명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정책과 비전의 새로움이라면 일본의 미래는 새로운 진로일 수도 있고, 1993년 이후와 유사한--다만 민주당연립정권 하에서의--정치적 표류의 재현일 수도 있다.
여기서 관건은 국민에게 철저히 불신당한 자민당의 향배에 있지 않다. 공은 민주당으로 넘어왔다. 민주당이 지향하는 이념과 정책, 사회경제적 지지기반, 그리고 정치적 능력(리더십)이 일본의 장래를 가늠할 것이다. 과연 민주당은 자민당과 차별되는 우월한 비전과 정책을 갖고 있는가. 이를 실천할 만한 지지기반을 구축하였는가. 지지를 정책으로 연결시킬 통치 리더십을 갖고 있는가.
우애의 자본주의와 지역질서 수립이라는 도전
민주당은 국회에서 압도적 의석수를 배경으로 개혁을 추진할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에 거는 기대만큼 도전 요인 또한 만만치 않다.
첫째, 일본이 직면하고 있는 도전의 깊이다. 대내적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성장동력을 찾는 동시에 사회적 양극화를 완화하고 고령화에 따른 미래의 불안을 불식시킬 수 있는 지속가능한 경제체제 모델을 찾아야 하는 고난도의 숙제를 안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동맹국인 미국의 상대적 쇠퇴와 경쟁국인 중국의 급격한 부상으로 전략적 딜레마에 빠져 있다. 미국과 동아시아를 새롭게 엮는 해법을 마련해야 정체된 일본 외교의 출구가 보일 것이다.
하토야마는 '우애(友愛)'를 키워드로 하여 새로운 자본주의와 외교정책을 주창하고 있다. 그는 비인간적인 미국식 시장자본주의가 지구화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침식해왔으며, 자민당이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일본의 전통과 관습을 담고 있는 경제질서가 와해상태로 전락했다고 비난한다.
그는 시장의 대체개념으로 우애가 담긴 신자본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한편, 국제정치에서도 우애를 주요 개념으로 내세운다. 동아시아 지역주의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일방주의는 이라크전 실패와 금융위기로 쇠퇴하고 있으며 세계는 다극화의 길로 가고 있다.
이런 속에서 일본은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모색하는 동시에 국제협력의 구조적 대안으로서 동아시아공동체를 실천해야 하며 특히 달러기축 통화체제의 쇠퇴를 계기로 동아시아 공동통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내적으로 미국식 시장자본주의체제, 대외적으로 미국중심주의로부터의 변환이라는 거대전략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 방안의 부재와 보수성향 리더십 문제
그러나 이러한 거대전략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정책콘텐츠는 잘 보이지 않는다. 민주당은 아동수당 지급, 고교 무상교육, 고속도로 무료화, 농촌 호별 소득보상제, 중소기업 법인세 인하 등 구체안을 내놓고 있으나 이는 대안적 자본주의의 요소라기보다는 불황대책적, 선거전략적 성격이 짙다.
정책을 추진할 재원의 확보방안이 제시되지 않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외교 역시 대등한 미일관계를 내걸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느 상태를 대등한 것으로 지칭하는지 불명확하다. 미일지위협정 개정, 오키나와 미군기지 조정 정도를 얘기할 뿐이다. 나아가 동아시아공동체를 추진하겠다는데 그 핵심과제로서 강대국화한 중국과 어떻게 관계해갈 것인지 언급이 없다. 또한 동아시아공동체가 미일동맹과 같은 수준의 전략목표인지도 명확치 않다.
이상의 과제가 발상 혹은 주장의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두번째 도전, 즉 민주당 리더십이 보수적 성향을 넘지 못하는 데 있다. 민주당은 과거 사회당, 신당사끼가께(新黨さきがけ) 등 진보그룹과 시민운동그룹, 자민당 탈퇴그룹 등 다양한 구성원이 모여 있는 정당이다.
그러나 실세인 하토야마, 오카다(岡田), 오자와(小澤) 모두 자민당 출신이듯이 기본적으로는 보수정당이다. 지지기반도 대도시 중산층이다. 창당 이래 줄곧 보수 자민당과 행정개혁, 지방분권, 규제개혁 등 동일한 주장을 외치며 경쟁해왔던 만큼 양당은 정책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정부에 국회의원 100인을 배치하고 수상 직속의 국가전략국을 설치함으로써 관료를 견제하고 정부와 여당의 일체화를 꾀하겠다는 이번 선거공약 역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자민당도 추진해 온 일이다. 새 발상을 정책으로 구체화하기가 힘겨운 까닭은 여기에 있다. 20세기 보수의 패러다임으로는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을 넘는 신자본주의, 미국과 아시아의 이분법을 넘는 신외교정책의 해법을 내어놓기 어렵다.
불안한 지지기반 딛고 미래비전 보여줄 것인가
이는 세번째 도전으로 연결된다. 양당이 이념적·정책적으로 근접해 있기 때문에 민주당의 지지기반은 그리 단단하지 않다. 일본국민이 이번 선거에서 보여준 민주당을 향한 압도적 지지는 자민당 반대의 결과이지 민주당의 정책과 리더십에 대한 평가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선거 전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권교체가 현재 일본의 정치상황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란 질문에 24%만이 그렇다고 대답했고, 56%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과반수가 민주당의 간판정책인 아동수당, 고속도로 무료화에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낸 바 있다. 민주당을 향한 국민의 시선은 불안하고 그런 만큼 정권의 장래는 유동적이다. 정권 운영능력을 의심받을 때, 그리고 자민당과 유사한 정책노선을 넘나들 때 민심은 급격히 멀어질 수 있다.
향후 민주당의 일본은 새로운 진로와 또다른 표류 사이를 오갈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일본이 당면한 도전 자체가 워낙 난제인데다 문제풀이의 주역인 민주당의 정책지향이 명확하지 않고 구체성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대를 접을 수는 없다. 시장경쟁과 사회 가치를 복합하는 자본주의, 동맹과 공동체를 동시에 끌어안는 외교모델을 만들려는 하토야마의 꿈은 21세기 동아시아의 미래기 때문이다. 일본의 유권자는 역사를 썼다. 이제 정치가가 쓸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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