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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식전 아침부텀 학교 갈 준비는 안하고 뭔 놈의 첨대를 들고 갯너리박 강구맹킬로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냐. 그만 두고 얼릉 와서 대리미질이나 거들어라."
"하여튼 엄니는 내가 뭣을 하기만 하면 딴 일을 시킨당께. 어, 선길이 일어났네. 나는 시방 사무가 바쁭께 야, 선길아, 엄니 대미리질 한단다. 너가 조깐 잡어라."
"저눔 자석은 꼭 함박 시키면 종가리를 시키고 있어."

이제 겨우 어둠이 가신 이른 아침에 어머니와 내가 나눈 대화가 이러하였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내 또래의 생일도 사람들뿐이라면 눈치 안 보고 그 다음 얘기로 그냥 이어나겠는데 대개의 독자들은, 60년대 중반에 남해안 낙도의 어촌마을 앞마당에서 여남은 살 사내아이가 제 어머니와 주고받은 이 짧은 대화가 무슨 내용인지 얼른 이해하기 어려울 터, 간단하게나마 해설을 덧붙이자면 이렇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마당 한 켠의 헛간으로 달려갔다. 전날 오후에 희갑이네 대나무밭에서 말라 쓰러진 대나무 한 그루를 낫으로 베어다가 집에 갖다 두었던 것이다. 낚싯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거기서는 낚싯대를 '첨대'라 불렀다. 한자의 '첨'자 중에는 '낚을 첨(餂)'이라는 글자가 있다. 그래서 아마도 '낚시용 대나무'라는 의미로 첨대라 쓰였을 듯하다. 우리 동네 굴전리에는 유일하게 해변을 낀 언덕바지에 한 오백 평쯤의 대나무 밭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그 산 주인이 바로 희갑이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는 아예 대나무산 둘레에 울타리를 쳐놓고서 사람들의 출입을 봉쇄하였다. 박정희가 혁명공약에서 그 때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 하겠다고 선언했듯이, 희갑이 아버지는 자신이 대나무 산 들머리 군데군데에 세워놓은 '입산금지' 팻말이 그저 구호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실천해 보이려는 의지가 충만해 있었다.

하지만 요즘도 법적으로 미성년에 해당하는 청소년들이 이른바 '십구금(19禁)' 팻말이 붙은 사이트에 기를 쓰고 들어가려 하는 것처럼, 입산금지 팻말이 붙은 그 대나무산의 울타리를 넘는 스릴을 우리들이 마다 할 리 없었다. 무엇보다 어머니는 날마다 나무를 해오라 닦달을 하는데 동네 인근의 모든 야산들은 등걸이 뿌리째 파헤쳐지고, 가래이나무(떨어진 마른 솔잎을 갈퀴로 긁어모은 땔감)를 하겠다고 너도나도 갈퀴로 긁어댄 바람에 산비탈이 온통 피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희갑이네 대나무산은 희갑이 아버지가 워낙 금산·봉산(禁山·封山)을 철저히 하였기로, 거기 가면 소나무낙엽이 수북이 쌓였고, 대나무 숲 여기저기에 듬성듬성 서 있는 소나무나 재밤나무에도 땔감으로 꺾어올 자장개비(삭정이)가 지천이었다. 

"요노옴들 잘 만났다!"

내가 2학년이었을 때, 종석이와 내가 희갑이네 대나무산에 몰래 들어가 삭정이를 꺾기 위해 재밤나무에 올라가 있었는데, 언제 왔는지 희갑이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고 나무 아래에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빨리 내레와!"

우리는 희갑이 아버지의 호통에 오금이 떨렸다. 간혹 그 산에 몰래 들어와서 가래이나무를 하던 동네 아낙들도 희갑이 아버지에게 갈퀴를 압수당하기 일쑤였고, 아이들의 경우 종아리를 얻어맞기도 하였다. 나라에서 '산림녹화'를 구호로 내걸고 모든 산 주인들에게 '입산금지' 팻말을 붙이도록 지침을 내렸으면, 산을 갖고 있지 않은 주민들에게 달리 땔감을 조달할 방법도 알려주었어야 옳은 처사가 아니겠는가. 희갑이 아버지가 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얼릉 내레와!"

종석이와 나는 나무 위에서 내려가지 않고 버텼다. 내려가 봤자 얻어맞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알겄다. 갈쿠도 안 뺏고, 느그들이 해논 나무도 안 뺏고, 종아리도 안 때릴 것잉께 인자 그만 내려온나."

우리의 버티기가 성공하였다. 우리가 만일 희갑이 아버지의 엄포에 놀라 허겁지겁 내려가다가 떨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그 책임이 희갑이 아버지에게 있었으므로, 그는 아주 부드럽고도 상냥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조심조심 내레온나 이'를 연발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재밤나무 몸통을 부둥켜안고 단숨에 쭈루루루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 마찰 때문에 뱃가죽에 활활 열이 났다.

"요놈 자석들, 아랫도리 깨 벗어!"

갈퀴도 안 뺏고, 우리가 해놓았던 가래이나무도 안 빼앗았으며, 종아리를 때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희갑이 아버지가 약속을 어겼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희갑이 아버지는 우리가 벗은 바지를 들고 팔자걸음을 하며 동네로 가버렸다. 우리는 아랫도리를 깨를 벗은 채 (옷을 다 벗어서 벌거숭이가 된 채) 오도가도 못 하고 산속에 있었다. 마른 댓잎을 그러모아 아랫도리를 덮고 나란히 누웠다. 바닷바람이 가랑이 사이로 살랑살랑 스며들어 기분이 영판 상쾌하였다. 잠이 들었다가 주변이 요란하여 눈을 떠보니 달빛이 쏟아지는 밤중이었다. 산주인 희갑이 아버지를 앞세우고 찾아온 종석이 아버지와 우리 어머니가 우리 둘의 꼬락서니를 내려다보고 어이가 없어 했다.

"요놈아, 우리 종석이는 삼대독잔디, 아랫도리 잘 못 돼서 손(孫)이래도 끊기면 니놈이 책임 질 것이여!"

종석이 아버지가 희갑이 아버지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그런 일이 있었다.

나도 이제 정식으로 낚시질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자면 우선 낚싯대가 있어야 했다.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첨대를 마련해달라고 해봤자 아직 어린 것이 뭔 놈의 낚시질이냐고 타박할 게 뻔했기 때문에 혼자서 희갑이네 대나무산 주변을 맴돌고 있었는데,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맞춤한 대나무 한 그루가 말라죽은 채 울타리 바깥쪽으로 쓰러져 있었다.

'요놈은 죽은 놈잉께 괜찬해.'

나는 그 대나무 밑동을 낫으로 잘라 끌고 집으로 오면서 내 행위의 정당성을 스스로에게 그렇게 역설하였다. 울타리바깥으로 쓰러져 있었으니 도둑질이 결코 아니며 이미 죽은 나무를 잘라왔으니 설령 산감(산림 감독관)한테 들킨다 하더라도 죄 될 것이 없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나는 나와 동갑이면서도 이미 낚시에 입문한 희원이로부터 낚시 몇 개와 납으로 된 봇돌 둘을 얻어왔다. 마희원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낚시도사였다.

어쨌든 이제 방과 후에 채비를 챙겨들고 바닷가로 가서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물고기를 줄줄이 잡아 올리는 일만 남았다. 나는 신바람이 났다. 그렇다고 내가 낚시에 대한 예비지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른들이 주낙으로 쓰던 낚시 하나를 구해서 갯가 둠벙(웅덩이)에서 헤엄쳐 다니는 손가락만한 새끼고기를 상대로 수차 연습을 해본 적이 있었다. 미끼를 달리 구할 수 없어 갯바위에 기어 다니는 갯강구를 잡아 사용하였는데 고기는 손가락만하고 낚시는 워낙 컸기 때문에 번번이 미끼만 헌납하는 꼴이었다. 강구라는 놈은 아주 빠른 몸놀림으로 갯바위를 재재거리며 달려 다니기 때문에 어른들은 행동이 차분하지 못 하고 부산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아이들에게 '갯너리박(갯바위)의 강구같다'고 했다.
"얼릉 와서 잡으랑께 그래!"

어머니가 재촉을 했다. 나는 낚시채비를 헛간에 갖다 잘 세워두고 토방마루로 올라갔다. 오늘은 아버지가 생일도 동갑내기들이 모두 모여 만든 갑계(甲契)의 계갈이를 하러 큰 마을인 서성리에 가는 날이어서 입고 갈 외출복을 다리는 것이었다. 이른 아침에 다리미질할 옷을 마당의 빨랫줄에 걸쳐놓으면 이슬이 촉촉이 배이기 때문에 달리 물을 뿌리고 어쩌고 할 필요가 없었다.

"선길이 새끼 어디 갔어?"
"일찍 일어났는가 했듬만 오줌 누러 나왔든 모냥이다."

선길이는 어느 사이에 덜 잔 잠을 잇기 위해 도로 방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그랑께 함박을 시키면…"
"종가리 시키지 마라고? 알었어. 인자 성길이도 많이 컸는디 맨날 나만…"

나는 와이셔츠 옷깃을 두 손으로 나눠 잡으며 툴툴거렸다. 어머니는 다리미의 방향을 마당 쪽으로 향하고서 입으로 길게 한 번 후우, 불어서 숯불을 일군 다음 옷을 다리기 시작했다. 하기야 지난 설 명절을 앞두고 두루마기를 다릴 때 나보고 옷을 잡아달라는 것을 바쁘다는 핑계로 동생 선길이를 시켰는데, 녀석이 다리미질감을 시원찮게 붙잡았다가 그만 놓치는 바람에 숯불이 쏟아지고 난리가 났었다. 그 때 내가 어머니로부터 지청구를 당하면서 처음으로 들은 명언이 바로 '함박 시키면 종가리 시킨다'는 그 말이었다. 함박은 커다란 함지박이고 종가리는 조막만한 조롱박을 일컫는 말이다. '큰 녀석한테 무얼 시키면 제가 할 일이지 꼭 어린 동생한테 미룬다'고 얘기하는 것보다야 얼마나 더 맛난 말인가.

수업이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우리는 자꾸만 오른편의 바다 쪽을 흘끔거렸다. 내가 낚시에 입문하는 역사적인 날이었기 때문에 바닷물이 들고 써는 상황을 살펴야 했다. 여기서 '우리'라 한 것은, 낚시 도사를 아버지로 둔 탓에 일찌감치 낚시질에 눈을 떠서 나의 길잡이가 돼 줄 희원이와, 나와 마찬가지로 처음으로 바다에 정식으로 낚싯줄을 드리울 종석이 등을 아우른 삼총사다.  

"볼락낶기를 갈라먼 물때를 알어야 할 것인디 느그들 오늘이 멫 물인지 알어?"

낚시질 입문하는 날을 오늘로 잡은 것이 물때로 봐서 타당한지에 자신이 없는 듯 종석이가 그렇게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다. 보충설명을 하자면 생일도에서는 낚시질을 '낶기'라 하였다. 뭐 대단한 분석이 필요한 말이 아니라 '고기를 낚다'에서 비롯된 '낚기'의 사투리다. ('낚기'가 이[ㅣ]모음 역행동화의 영향을 받아 '낶기'가 되었다는 따위의 재미대가리 없는 음운학적 분석은 사실 별 볼 일 없는 사족일 것인데, 내가 왜 이렇게 외갓사람들에게  내 고향 사투리가 근거가 전혀 없는 말이 아니라는 설명을 이토록 구구이 늘어놔야 하는지 모르겠다.) 또한 바닷가 아무 데서나 쉽게 잡아 올릴 수 있는 고기가 볼락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낚시질을 그저 '볼락낶기'라 하였다.

"오늘이 메칠인디?"
"으음, 29일."
"그건 양력이고 물때는 음력으로 계산한다는 것도 몰르냐, 비잉신 같이."

종석이가 희원이로부터 제대로 한 방 먹었다.

"어지께 우리 조부님 지삿날이었응께 내가 음력을 알어. 오늘이 음력 14일이여."

희원이가 말했다. 이제는 그 14일을 재료로 삼아 오늘의 물때가 몇 물인지를 계산해야 했다. 그러자면 '며칠이 몇 물이다'라는 기준이 필요했다. 그런데 우리 셋이 알고 있는 기준들이 제각각이었다. 

"14일이라고? 그라먼 초사흘이 열 물잉께 초나흘은 열한 물, 초닷새는 열두 물…"
"야, 그렇게 해서 언제 14일까지 올라가겄냐?"
"우리 아부지가 늘 하는 말이 '스무사흘은 한 조금'이다 그랬어. 그랑께 스무나흘은 두 조금이고…" 
"쯧쯧쯧, 그렇게 해서 그믐까지 갔다가 또 새 달 14일까지 올라갈라먼 아이고…차라리 쩌그 백운산을 한 번 올라갔다 오는 거이 낫겄다."

희원이와 종석이가 길바닥에다 아예 나뭇가지로 달력을 그려놓고서 그날이 몇 물인지를 놓고 티격태격했다. 그 둘이 미리 설쳐서 그렇지 사실 나는 이미 그날이 몇 물인지를 계산할 수 있는 빠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보름, 일곱 물이여."

나는 제법 무게를 잡고 말하였다. 낚시질이야 희원이가 선수인지 몰라도 물때 계산은 내가 더 잘 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결론은 간단했다. 

"그라먼, 오늘이 14일잉께 여섯물이네."

그러니까 음력으로 초하루는 여덟 물, 초이틀은 아홉 물, 초사흘은 열 물, 초나흘은 열한 물…그렇게 이어지고 되풀이되다가 아흐레는 한 물, 열흘은 두 물, 열하루는 세 물…그런 식으로 물때가 정해져 있었다. 그렇다고 초하루부터 그믐까지 각각 몇 물인지 그 서른 개의 조합을 일일이 다 외우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섬사람들은 중간 중간 한 대목씩만을 기억해두고 활용하였다.

예를 들어서 '초사흘-열 물' '보름-일곱 물' '스무사흘-한 조금' 정도만 외우고 있으면 나머지 날짜들의 경우는 금방 물때를 계산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보름이 일곱 물이니 내가 첫 출조에 나서는 음력 14일은 당연히 여섯 물이 되는 것이었다. 여섯 물이면 언제쯤 가사리밭이 드러나고 또 언제쯤 바다 속에 잠겨 있던 엿둥(여)이 해초에 덮인 몸을 드러내고 그로부터 얼마가 지나면 우무(우뭇가사리)밭이나 톳밭이나 미역밭이 수면 위로 알몸을 드러내어 햇볕을 쬐는지를 섬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선길이 너가 낶기를 간다고? 흐흐흐…"

낚싯대와, 미끼를 담을 깡통, 잡은 고기를 담아올 망태 따위를 챙기고 나서자 어머니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는, 고기를 낚아다가 가족이 일용할 양식에 보태겠다는 뜻이 기특하다는 생각 한 편으로, '어린 네 낚싯줄에 잡혀 올라올 눈 먼 고기가 어딨겠냐'는 비아냥이 함께 묻어나는 듯했다.

"엄니도 꿀(굴) 깨러 갯바탕에 갈 것잉께 선호 너 요놈 한 다발 미고 같이 내레가자."

바구니와 조새를 챙기면서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는 낚시질 가는 길마저 나를 가볍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나는 한 쪽 어깨에 낚싯대를 메고, 또 한 쪽엔 이것 저것이 든 작은 망태를 메고, 그리고 두 팔로는 김치 담글 열무다발을 부둥켜안은 채로 바닷가를 향했다. 
바닷물은 가사리밭이 훤히 드러날 만큼 제법 빠져 있었다.

"여그다 빠체라."

어머니가, 밀물 때 잠겼다가 썰물이 지면서 생긴 갯바위 중간의 웅덩이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 웅덩이엔 이런저런 바닷말뿐 아니라 새우며 물고기 새끼 따위가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부둥켜안고 있던 열무 다발을 풀어서 그 웅덩이에 첨벙 빠뜨리고선 열무가 물속에 잘 잠기도록 큼지막한 갯돌 두엇을 주워다가 눌러 두었다. 갯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쯤이면 그 열무의 숨이 어지간히 죽어 있을 뿐 아니라 짭조름한 바닷물로 적당히 간이 배여 있어서 소금을 별도로 칠 필요 없이 김치를 담그면 되었다. 생일도 사람들은 간장 역시 바닷물을 길어다 가마솥에 붓고 다렸다.

"엄니는 쩌그 가서 꿀을 깰 것잉께 너는 동무들하고 가서 어디 괴기를 한 번 잡어봐라."

어머니가 바구니와 조새를 들고 갯바위 그늘로 돌아가면서 그렇게 말했다. 역시 '괴기를 한 번 잡어 봐라' 그 어투에는 '고기가 어디 아무한테나 쉽게 잡힌다더냐'라는 비아냥이 은근히 배여 있는 듯 했다. 나는 그러는 어머니를 깜짝 놀라게 해줄 자신이 있었다. 

우리는 깡통 밑바닥에 소금을 깔고 호미를 들고서 갯가로 나섰다. 갯돌 틈 모래밭을 호미로 헤집었다. 한참을 헤집어 파자 갯지렁이가 나왔다. 얼른 집어서 깡통에 넣었다. 소금 바닥에 떨어진 녀석이 한바탕 몸을 배배 꼬았다. 금방 토막 나지 않고 질긴 미끼의 상태를 유지하자면 어쩔 수 없이 소금에 절여야 했다. 그러나 갯지렁이를 파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반시간 여를 낑낑거렸으나 성에 찰만큼의 미끼를 확보하지는 못 하였다. 생일도 사람들은 미끼로 쓰는 갯지렁이를 '갈가시'라 했다. '가시'는 지렁이나 회충 따위를 일컫는 '거생이' 혹은 '거시'에서 비롯된 말인 듯하나 '갈'이라는 접두어가 무얼 의미하는지, '갈파래'나 '갈고동' 따위의 '갈'과는 또 무슨 관계가 있는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앗다 우리가 여그 잇갑 파러 왔냐. 괴기 낚을라고 왔제. 자, 시작해보드라고. 그란디 희원아, 괴기가 잘 무는 구멍이 따로 있담서? 거그가 어딘지 조깐 갤체주라."

종석이가 호미로 미끼 깡통을 통통 치며 말했다. 희원이가 씨익 웃더니 갑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아랫도리 윗도리를 모두 벗는가 했는데 그 옷을 이마에 둘러 감는 것이었다.

"너 시방 뭣을 하는 것이여?"

종석이와 나는 눈동자를 휘둥그레 키우고서 영문 몰라 했다.

"물이 안즉 많이 안 나서 갯갓에서 해봤자 괴기가 잘 안 잡히그등. 그랑께 쩌그 저 엿둥으로 헤엄쳐서 갈라고 그라제."

우리 둘 역시 희원이를 따라서 옷을 벗어 머리에 둘렀다. 망태는 벗은 어깨에 걸치고, 낚싯대는 엿둥(여. 물이 나면 드러나는 바위 섬) 쪽으로 미리 밀어 던져놓고, 갯지렁이를 담은 미끼 깡통은 왼손에 쥐고서 공중으로 치켜든 채로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 아주 묘한 자세의 수영이었다. 그러나 가장 실용적인 영법이기도 했다. 뒷날 서울에 갔을 때, 서울 아이들과 수영장에서 함께 헤엄칠 일이 있었는데, 그들은 고개를 꼿꼿하게 물밖에 내놓고 헤엄을 치는 내 자세를 보고는 폭소를 터트렸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녀석들에 대한 푸념을 일기장에 다 이렇게 풀어놓았다.

'비잉신들. 느그들은 깨구락지 헤엄을 치면서도 쉴 새 없이 머리를 물속에 처박았다 꺼냈다 하던데, 그런 자세로 비상시에 두 시간이나 세 시간 이상을 바다에서 헤엄칠 수 있겄냐? 왼손에 미끼 깡통을 공중으로 치켜들고, 머리에는 젖지 않도록 옷을 둘러 이고, 고개를 물밖에 내놓은 채로, 오른손만으로 헤엄을 쳐서 바위섬으로 건너가는 그것이야말로 실사구시의 기 막한 영법이라는 것을 도시에 사는 느그들은 모를 것이여.'


#물때#낚시질#갯지렁이 #입산금지#숯불 다리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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