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끝나고 국사를 가르치는 교사 세 명이 모여 교과협의회를 했다. 협의 주제는 조선후기까지의 정치사를 다 가르친 후 곧바로 경제사로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근현대사 부분을 가르치고 경제사로 넘어갈 것인가 였다.
현재의 국사 교과서는 선사시대(구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를 배운 후 고대(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까지) - 중세(고려시대) - 근세(조선전기) - 근대(조선후기) - 일제시대 - 현대의 정치사를 배우고, 다시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경제사를 배운 다음, 사회사를 배우고 문화사를 배우는 분류사 형식으로 교과과정이 편성돼 있다.
그동안은 일본강점기와 현대 부분을 가르치지 않고 넘어갔었다. 가장 큰 이유는 주 3시간(국사 2시간+재량국사 1시간)의 국사 수업시수로는 아무리 미친 듯이 진도를 나가도 문화사까지 끝낼까 말까 해서였고, 또 근현대사 시간에 이 부분을 배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장일치로 근현대사 부분도 가르치기로 결정했다. (물론 토론과 논쟁이 진행됐다) 한국근현대사를 선택하지 않는 학생도 있기 때문에 국사에서라도, 적은 분량이라도, 꼭 우리의 근현대사를 알려줘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잊을 수 없는 2008년, 갑작스럽게 결정된 교과서 교체
2008년은 내게 잊을 수 없는 해였다. 나는 역사와 교육 중에서 역사 쪽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역사교사다. 때문에 어쩌다 교육관련 뉴스가 생겨서 누가 내게 물어보더라도 잘 몰라서 대답해 주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작년에는 정말 희한하게도 내 전공 분야가 연일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바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좌편향이다, 아니다' 논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잘 알고 직접 관련된 일이 뉴스의 중심이 됐을 뿐 아니라, 내가 전문가적(?) 의견을 낼 수 있는 사건이 생긴 것이었다. 이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를 쓰고 있던 우리 학교도 교과서 교체 문제로 진통을 겪었다. 역사 교사 6명 전원이 좌편향이 아니고 수업하기 정말 좋은 교과서라며 교과서 교체를 반대했지만, 결국 교과서 교체 안건은 학교운영위원회를 통과했고 근현대사 교과서는 교체되었다. 예전에는 몰랐었는데, 정치가 내 삶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그 순간 뼈저리게 깨달았다.
올해 나는 1학년 국사 수업을 맡았다. 정치사 부분에서 여러 나라의 흥망성쇠를 다룰 때 작년과는 달리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자주 나왔다.
"얘들아 너희들은 성인이 되면 반드시 투표해라. 알았지?"
고조선은 지배층의 배신으로 멸망했고, 고구려가 멸망한 이유도 지배층의 분열과 배신이었다. 학생들에게 이 부분을 가르치면서, 너희들은 미래에 제대로 된 국민의 대표를 골라서 투표를 하든가, 아니면 너희들이 올바른 지도자가 되어 선거에 나가 이기라고 말한다. 그러지 않으면 방금 배운 서글픈 역사를 또다시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인다. 마지막에는 이 말로 말을 맺는다.
"그러려면 국사 수업 잘 들어서 올바른 대표를 볼 줄 아는 혜안을 길러야 해. 그러니 국사 수업 열심히 들어!"
나는 역사 전체 중에서는 고대사 쪽을 좋아한다. 고려시대로만 넘어가도 관심이 좀 줄어들고, 조선시대로 넘어가면 더더욱 관심이 떨어진다. 일제시대와 대한민국 시대는 전공이고, 직업이라 가르칠 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근현대사에 관심이 두고 있다. 고대사나 중세사를 가르치면서도 그것을 최근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과 대비시켜 설명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역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현재의 문제를 바르게 해결하기 위해 참고로 삼기 위해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실제적인 예를 들어 이해시키기 위해서이다.
바르게 알아야 하는 우리 역사
작년에 교과서 교체 건으로 학교운영위원회가 열렸을 때였다. 역사 교사를 한 명도 참석시키지 않고 학교운영위원회가 열렸지만, 운영위원들 중 누구도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나중에 학교운영위원회가 기습적으로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회의장으로 찾아가 운영위원들을 설득했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운영위원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언론에서 좌편향이라며 문제를 삼는데, 그러면 문제 있는 거 아닌가요?"
운영위원들의 손에는 교감선생님께서 어렵게 구해오신 여러 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들이 들려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회의장에 들어오기 전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관련 설명을 들으신 것 같다. 하지만, 그 관련 설명은 균형잡힌 설명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분들은 그 책을 보며 깜짝 놀라고 정말로 근현대사 교과서가 더 나아가 근현대사 교과목이 문제가 있는 교과목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학교운영위원들은 대개 3공화국에서 5공화국 사이에 학창시절을 보냈을 것이고, 그 분들이 배운 국사에는 근현대사가 다르게 실려 있었다. 그 당시 교과서에는 좌익 계열의 독립운동은 거의 나오지 않았고,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만 나왔다. 전체 독립운동의 반쪽만 억지로 교과서에 싣다보니 학생들은 전후 사정이 연결도 되지 않은 채 뜬금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독립군들의 전쟁을 개별적으로 외우며 역사를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주도 4.3 사건도 여수순천 10.19 사건도 과거의 교과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하기 위한 공산폭도들의 반란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4.3 사건은 제주도 사람의 다섯, 여섯 중 하나가 죽은 사건인데, 이 논리대로라면 제주도는 공산폭도로 득실거렸던 지역이 되고 만다.
근현대사 교과서는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과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 모두를 사실대로 서술하여 독립 운동사 전체를 서술했고,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여 남한 내에서 벌어진 수많은 비극도 사실대로 기록했다. 하지만, 이것을 독재정권 시절 만들어진 반쪽짜리 교과서로만 배운 사람들은 위험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어릴 때 받은 교육의 힘이 참 크면서도 무섭다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1부는 지난 2일 근현대사 교과서를 저자의 동의없이 출판사가 직권 수정한 것이 잘못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도 교과부는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올 때까지 계속 수정된 교과서를 사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판결을 소개한 신문 기사를 보면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좀 더 잘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역사적 사실인지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모든 의견을 다 들어보고 기존의 견해도 잘못된 것이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열린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근현대사 교과서, 다시 바꿀 수는 없을까?"
올해에 한국근현대사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에게 새로 선정된 교과서가 어떠한지 의견을 물어 보았다. 한 분은 작년에 나와 함께 한국근현대사를 가르쳤고, 또 한 분은 올해 새로 온 교사였다. 두 분 모두 처음에는 교과서로 수업을 해 보려고 했는데, 꼭 필요한 주요 내용이 빠진 것도 있고, 실려있는 사진 자료도 원하는 것이 없는 등 예전 것에 비해 '부실'한 것 같다고 했다.
사실 교과서의 총체적인 내용은 모두가 대동소이 하다. 하지만, 과거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를 전국 고등학교의 절반 이상이 사용했던 것은, 꼭 필요한 주요 내용을 거의 빠짐없이 집어넣고, 시험에 잘 나올만한 사진자료를 적절하게 실었고, 눈에 잘 들어오도록 편집을 잘 했기 때문이었다. 현장에서 가르치는 교사들 입장에서는 전문적이고 학구적이며 자세하게 설명을 한 교과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만한 교과서가 필요하다.
한 교사가 "가르치기 불편한데 근현대사 교과서를 다시 바꿀 수는 없을까?"라고 물었다. 또다시 교과서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학생들에게 가장 괜찮을 것 같은 교과서도 현장에서 가르치는 교사 뜻대로 선정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씁쓸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