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공사 중인 고양향교와 중남미박물관을 엿본 뒤 고양동 주택가에 들어 옛군청길 따라 내려오면, 조선시대 역관인 벽제관지 터를 만나게 됩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에 자리한 벽제관지는 사적 제 114호로, 면적은 4175 m2에 이르는데 현재는 역사의 윤곽과 터만 남아 있습니다.
고양향교, 향교골 은행나무와 함께 이 지역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인 벽제관지는, 이곳 지명이 고양동이라 하는 것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625년부터 1914년까지 289년간 고양군청과 벽제관과 같은 주요한 공공기관이 있어 붙여진 동명입니다.
그리고 고양동은 파주, 양주, 고양지역이 만나는 곳으로 옛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유명했고,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연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서울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관서로 또는 의주로, 연행로에는 이와 같은 역관이 10여 처에 있었다 합니다.
이곳에서는 주로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절이 숙박과 휴식을 취했고, 특히 벽제관은 때로 국왕이 제릉 친제시에 숙소(행궁)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중국에서 오는 사절들도 역관에 머물러 휴식하는 공용 숙박시설로, 벽제관은 한양에 인접하고 있어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은 입경전 1일전에 반드시 이 역관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예의를 갖추어 입경하는 것이 정예로 되어 있었다 합니다.
본래 고양군의 고읍치는 벽제관에서 북방으로 5리 정도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위치는 읍치를 옮긴 인조3년(1625)에 이곳에 새로 새웠다 합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일부가 헐렸고 한국전쟁때 전소되었고, 1960년경까지 객관문은 남아 있었으나 퇴락하여 무너져버렸다 합니다.
1900년대 초반에 촬영한 사진에는 이곳 벽제관의 모습이 잘 남아 있는데, 우선 입구에는 삼문이 있었고 여기에 벽제관이란 현판이 씌여 있고 중문에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일설에는 명필 한호 한석봉의 현판 글씨라고도 합니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이여송 군과 왜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이른바 벽제관싸움의 전장터 중심지기도 하며, 국왕이 중국사신을 친히 영송하던 모화관에 버금가는 역사입니다. 1998년 경기도 박물관과 연세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당시 사진과 유사한 건축물이 나왔고 도자기, 동전, 못 등 187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합니다.
오랜 역사속에 조용한 마을 속에 자리한 벽제관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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