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 타운도 아닌데 마을이 조용했다. 타는 태양을 피해 모두 시원한 그늘을 찾아 숨어버린 걸까. 제 본분 다하지 않고 늘어져 엎드린 개들은 시선 한 번 던지고는 귀찮다는 듯 다시 다리 위로 머리를 올려놓는다. 고지에 위치한 온두라스-니카라과 국경에서부터 신나게 바람을 가르며 달려왔건만 막상 평지에 다다르자 숨이 턱 막혀왔다. 이제 어쩐다? 채 몇 십 분도 되지 않아 짜릿한 다운힐의 감흥은 사라지고, 고난의 가시밭길이 열렸다.
당장 목이 말랐다. 지난 밤 국경근처에서 자면서 물을 챙기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라 생수 한 병 염두에 두지 못했다. 그 고집이 자주 난처한 상황을 파생시킨다.
거칠게 정비된 도로 옆에 몇몇 가구가 모여 있었다. 자전거를 밀고 흙길로 들어서니 땅과 부벼대는 바퀴소리만 퍼진다. 인기척이 작은 건지 누구하나 머리 내미는 사람이 없다. 그 때 시멘트 벽에 붙은 작은 슈퍼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콜라 한 잔 털어 넣기에 더 없이 좋은 순간이었다. 희희낙락거리며 철창으로 막아진 슈퍼 바깥에서 목 놓아 주인을 불렀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호기심 많은 꼬마 녀석이 날 발견했다. 거짓을 모를 까만 눈과 경계심 없는 옅은 미소가 낮고 둔탁한 목소리를 대신했다.
"여기 문 닫은 지 한참인 걸요."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부끄러운 괴성을 지르더니 자기 집으로 달려 들어갔다. 잠시 후….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마을 애들을 필두로 청년들과 아주머니들까지 합세해 나를 구경 나왔다. 대관절 우리 마을엔 어쩐 일로 방문했는지 궁금하다는 투다.
"목이 타서요. 시원한 콜라 한 잔 사 마시려고 했는데……보시다시피."
"호호. 우리 마을엔 슈퍼가 없어요. 물은 어때요?"
더위엔 콜라가 진리라고 믿는 나였지만 물이라도 감지덕지할 상황이었다. 아주머니는 낯선 방문자에게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게 좋은 건지 요란스레 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웃통을 벗어젖히고 거드름의 미학을 실습하던 아들을 채근했다.
"냉장고에 보면 페트병에 얼음 얼린 거 있을 거야. 그거 가져 와!"
기특하게도 어머니의 한 마디에 아들은 민첩하게 움직였다. 물은 옆집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그리고 자신은 얼음을, 그래서 둘을 합쳐 즉석에서 얼음냉수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데면데면하게 서 있는데 물을 건네는 손길이 고마워 즉석에서 500ml를 비워냈다. 그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자기네들끼리 낄낄거리며 연신 물맛 좋냐고 묻는다. 답례로 '싸랑해요 밀키스!' 뺨치는 액션을 보여주자 위를 올려보며 구경하던 아이들이 포복절도한다.
채 스무 가구도 되지 않는 산 아래 작고 조용한 마을이 시원한 냉수 한 그릇 때문에 부산해졌다. 멋쩍게 도움의 손길 청한 게 전부인데 이들은 가벼이 여기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최선을 다해 나그네를 섬겨주었다. 여행 중에 시원한 냉수 한 그릇 대접받는 감사, 아마도 마음까지 시원케 하는 진심이 담겨있어 더욱 그러하리라. 받는 자보다 주는 자의 기쁨이 더 큰 특권을 누가 놓칠까?
니카라과 호수 근처에 살던 인디언 부족의 추장 니카라오(Nicarao)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는 니카라과. 호수의 나라답게 입국하자마자 물 한 그릇으로 선한 인상 톡톡히 안겨 준다. 니카라과를 향한 일말의 기대감이 마음속에서 더 커졌다. 답답하고 열불 터지는 세상에 나는 과연 누구에게 시원한 냉수 한 그릇인 인생이 되는지 그들의 작은 선행을 통해 곱씹어보았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