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가끔 엄마의 실험적인 요리에 기겁하곤 한다. 분명히 엄마가 본방 사수해가며 매주 보는 EBS 최고의 요리비결에 등장한 접시엔 맛깔나고 보기 좋게 명품요리가 담겨있었는데, 식탁 위에 떡 하니 올려져있는 건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고 나의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꿈꿔본 적도 없는 이상야릇한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처음 등장할 때 우리 반응도 여전했다. "우린 라면이 먹고 싶다니까!"
냄새는 라면, 근데 면발이?분명히 냄새는 익숙한 스프의 그것이었다. 근데 모양새가 조금 달랐다. 분명히 나무젓가락 끝에 딸려오는 면발이 꼬불꼬불하고 탱탱해야 하는데 얇고 미끈했다. 엄마는 분명 또 본인만의 실험을 우리가 먹을 요리에 가한 것이 분명했다. 아빠는 분통이 터졌고 나는 좌절했다. 우리가 엄마의 요리에 늘 요구하는 건, "남들이 먹는 평범한 것"이다. 우린 왜 그게 불가능한 건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엄마의 실험은 여전히 계속됐다.
그날도 그랬다. 아빠는 먹으면서 계속 구시렁거렸고, 난 이 새로운 요리가 라면과 어떻게 미감이 다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다시는 먹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명했다. 하지만 엄마는 평소보다 완고했다. 본인은 자신이 먹고 싶은 라면을 만들었을 뿐이고, 엄마가 먹고 싶다는 라면은 어린 시절 먹었던 라면국수의 맛이었다.
궁핍하지 않은 집도 라면이 귀했던 그 시절엄마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궁핍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았고 주변 집들에 비해서는 오히려 부유한 편이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고급공무원이셨고 할머니는 공장을 운영하는 여장부셨다. 집에는 식모도 여럿 있었고 한 명뿐인 집안의 아들에겐 과외선생님이 떨어질 날이 없는 정도로 유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어린 시절의 추억은 나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근처 쓰레기장에서 동네애들과 하루종일 쓰레기를 뒤져 찾아낸 치약을 짜먹었다거나, 막내이모를 업고서 잠이 들 때까지 동네를 몇 바퀴씩 돌다 지쳐 어린 이모를 우물에 빠뜨렸다거나, 하는 얘기는 엄마가 나와 다른 시대를 살았다는 걸 실감하게 해주었다. 엄마의 그 시절에 종종 해먹었던 것이 바로 이 라면국수다. 라면을 박스로 사다먹을 형편은 되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에 다섯 자식, 그리고 군식구까지 먹기에 라면은 늘 부족했다. 그래서 부족한 라면 면발의 양을 늘리기 위해서 함께 넣은 게 국수였다.
박스로 라면 사먹어도 옛날 라면국수가 그리워이젠 라면을 한 박스 사다놓으면 이거 누가 다 먹냐고 배부른 소리하지만, 엄마는 그 시절 이 라면국수가 종종 그립다고 했다. 그래서 집안 식구 모두가 군소리를 해도 엄만 떳떳하게 라면을 끓일 때마다 소면을 한 움큼 씩 넣었다. 너도 나이 들면 엄마가 해준 이게 먹고 싶을 거라며 아주 당당하게 말이다.
내가 나이 들어서 정말 이 요리가 먹고 싶어질지는 모르겠다. 외국 나가서 엄마가 해준 것 중에 먹고 싶은 거 없었냐는 속이 뻔히 보이는 질문에 "거기 음식 무지 맛있던데? 입에 딱 맞아서 한국음식 안 그리웠어"하며 지나치게 솔직한 답변을 하던 잔인한 딸이 나다. 그런데 어릴 적 그렇게 싫어하던 버섯과 마늘도 이젠 맛나게 찾아먹는 걸 보면 나이가 좀 더 들면 엄마 입맛을 따라갈 것 같기도 하다.
중요한 건 반평생을 자식들과 남편 밥 먹이는 데 바치셨던 엄마가 이젠 본인이 그리웠던 것, 하고 싶었던 것, 먹고 싶었던 걸 할 수 있는 자유 정도는 최소한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철부지처럼 머리 커서도 음식투정이라니. 나는 아직 멀었다.
※ 초간단 조리법 (1인분 기준)
준비물 : 물 750cc, 라면스프 하나, 소면 180~200g
라면스프를 넣은 끓인 물에 소면을 넣고 5분 간 끓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