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보쌀(보리쌀) 안칠 때가 돼부렀어야. 선호야, 너는 지게 지고 저 건네 조부님 묏등에 가서 해우 조깐 걷어 온나. 선길이 너는 나와서 남새밭에 있는 해우 걷고. 꼬채이는 내뿔지들 말고 따로 잘 모태서 갖고 와야 한 대이. 엄니는 미역 걷어야겄다."
어머니의 작업지시가 분주해졌다. 당시 우리 집엔 시계가 없었을 뿐 아니라 어머니는 시계를 볼 줄도 몰랐지만 나름으로 시각을 재고 읽는 법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보통 해가 서산 위로 두 뼘쯤 기울었을 때 광에서 보리쌀을 꺼내 와서 절구에 넣고 찧었다. 그런 다음 솥에다 삶고, 삶은 보리쌀에 서속이나 콩 따위를 섞어서 다시 밥을 안쳐 저녁을 지으면, 해가 서산 너머로 거의 정확하게 똑 떨어졌다. 그래서 우리 역시 어머니가 '보쌀 안칠 때 됐다' 고 얘기하면 아하, 오후 몇 시쯤 됐다는 얘기구나, 그렇게 시각을 가늠하였다.
나는 지게를 지고 동네어귀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로 갔다. 거기다 이른 아침에 김을 널어두었던 것이다. 바다에서 채취해온 김은 민물에 씻은 다음에 아버지가 도마에 놓고 잘게 다지고, 그 다진 김을 커다란 양푼에 넣고 물을 부어 적당한 농도로 탄다. 그 옆에다 띠를 말려 엮은 발장을 쌓아놓는다. 김 규격에 맞게 짠 나무틀을 왼손으로 잡고 발장 위에다가 올려놓는다.
오른 손으로는 김을 탄 물을 작은 나무 됫박으로 한 됫박 뜬 다음, 발장 위의 나무틀에다 확 뿌리듯이 일시에 붓는다. 그러면 물은 아래로 쪼옥 빠지고 발장에는 김 한 장의 모양이 만들어진다. 그것을 '해우를 뜬다'고 했다. 그것들을 남새밭이나 산소 등의 잔디밭으로 가지고 가서 넌 다음에,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대나무 꼬챙이로 양쪽으로 찔러두면 김을 너는 작업이 끝난다. 많은 양의 김을 한 군데에다 널 수 있도록 건조장을 별도로 세웠던 것은 역시 나중에 양식으로 대량생산이 되었을 때부터였다.
마른 김을 발장 째로 걷어서 새끼줄로 묶은 다음 바지게에 담아 지고 집으로 가져왔다. 그 사이에 선길이는 집 옆 남새밭에 널어두었던 김을 걷었다.
"선호하고 엄니가 벳길 것잉께 선길이하고 선유는 발장 추레라."
어머니와 내가 마른 김이 붙어 있는 발장을 나란히 쌓아놓고 토방에 앉았다. 김을 벗겨내고 빈 발장을 오른 쪽으로 젖혀내면 선길이와 선유가 그 발장을 가지런히 추려야 한다.
"넌 엄니 발장 맡어. 내가 성님 것 맡을 것잉께."
"아녀. 나, 엄니 것 안 맡어."
선길이와 선유 사이에 가벼운 말다툼이 일었다. 결국 힘이 센 선길이가 내 쪽을 담당했다. 발장 양쪽 끝을 잡고 팽팽하게 잡아당기면 마른 김이 발장에서 어느 정도 떨어지게 되고 고놈을 벗겨낸 다음 발장을 토방 아래 마당 쪽으로 던지는 식이었다. 넉 장까지는 나도 깨끗하게 잘 벗겨냈는데 다섯 장 째를 벗길 때 김 귀퉁이 일부가 발장에 붙은 채로 마당 아래로 떨어졌고, 기다렸다는 듯이 선길이가 발장에 붙은 김 조각을 벗겨 얼른 입으로 가져갔다.
"안 찢에지게 조심해야제!"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의 지청구가 날아왔다. 어머니는 워낙 천천히 조심스럽게 김을 벗기기 때문에 잘못 벗겨서 발장에 묻어나가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나는 조심성 없이 후다닥 해치우려고 덤볐기 때문에 내 발장을 추리는 선길이게는 김 자투리를 뜯어먹는 기쁨이 있었다. 당시 생일도의 돌김은 워낙 비쌌기 때문에 대부분이 수협을 거쳐서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아무리 그렇기로 김을 만들어내는 집에서 맛조차 볼 수 없대서야 말이 안 되었다.
"자, 요놈은 벳게서 우리 식구 저녁 반찬하자."
어머니가 등 뒤에 쌓아두었던 발장 한 뭉치를 들어다 앞에다 놓았다. 시퍼런 파래에다 김이라고는 양념 치듯 조금씩만 섞었기 때문에, 김이라기보다는 마른 파래라 해야 옳았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저녁 밥상에 둘러앉은 식구들에게 마다 구운 파래김 두 장씩이 분배되었다. 우리는 어머니로부터 분배받은 그 김을 적당한 크기로 뜯어서 왼손바닥에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밥을 한 숟가락 떠서 놓고서 김을 오므려 밥을 감쌌다. 그런 다음, 가사리 국에 퐁당 빠뜨려 두어 바퀴 떼구르르 굴려서 푹 적신 고놈을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었다. 생일도 사람들이 김으로 밥을 싸먹는 방식이었다.
1학년이 끝나갈 즈음 희철이와 나는 육지에서 온 여선생님의 초대를 받아 학교 옆 관사에 가서 저녁밥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 여선생님은 쬐끄맣게 잘라놓은 김을 소꿉놀이 하듯이 젓가락으로 집어서는 아예 손을 대지 않고 밥을 감싸서 입에 넣는 것이었다.
'저렇게 묵으면 몰른 해우가 입천장에 달라붙을 것인디…'
나는 그것이 걱정이 되었다. 자고로 김에 싼 밥은 국에다 흥건하게 적셔서 입에 넣어야 고소한 맛이 느껴지는 법인데…내가 보기에 그 여 선생님은 참 멍청하였다. 아니 지금의 내가 보기에도 서울 사람들이 김으로 밥을 싸먹는 모습은 도통 맘에 들지 않는다.
우리 삼형제가 자는 작은방 윗목은 그 동안 말려둔 미역을 쌓아두는 장소였다. 아마도 열댓 손(한 손은 스무 가닥) 쯤은 족히 될 것이었다. 그렇게 모아둔 미역은 동네에 미역 수집상이 오면 그 편에 팔기도 했고, 혹은 어머니가 육지에 가지고 나가 직접 돈을 바꿔오기도 했다. 그런데 윗목에 쌓아둔 바로 그 마른 미역더미가 우리에게 '견물생심'이라는 옛말의 위력을 실감하게 만든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 온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동생 선길이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엄니, 선자 누님이 지난번 밤에 미역 두 가닥 몰래 갖고 가서 즈그 동무들하고 우동 사묵었어! 나도 우동 묵고자픈디…"
순간 선길이와 막내 선유를 제외한 모든 식구들이 일시정지 상태로 숟가락질을 멈추었다. 아마도 선자 누나가 동무들과 국수추렴을 하기 위하여 작은방 윗목에 쌓아둔 미역다발에서 두 가닥을 몰래 빼갔고, 그 모습을 하필이면 동생 선길이가 목격했던 모양이다. 그 무렵 미역은 돈보다 오히려 더 확실한 돈이었다. 미역을 가지고 나가면 광목도, 고무신도, 밥그릇도, 옹기도, 곡식도, DDT 농약도, 머리빗도…뭐든 다 바꿀 수 있었다. 졸지에 도둑질을 들켜버린 누나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빈 숟가락을 입에 문채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어머니 아버지는 그러는 누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이 없었고, 나는 그 묘한 상황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눈치만 살폈다.
"선자 너 밥 묵고 나 조깐 보자."
어머니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누나도 가만있지 않았다.
"내가 그것 갖다가 국수추렴 한 중 알어? 수놓다가 실이 떨어져서 수 실 샀어!"
"수 실을 사야 하면 에미한테 말을 해야제 왜 미역을 몰래 갖고가!"
"수 실 사야 한다고 멫 번을 말했는디 언제 돈을 줬어?"
누나가 지지 않고 어머니에게 항변하다가 이내 눈물바람을 했다. 결국 그만들 하라는 아버지의 불호령이 있고서야 간신히 잠잠해졌다. 어젠가 선자 누나가 동무들과 국수추렴을 하겠다고 조르자 어머니가 미역 한 가닥을 내어준 일이 있었는데, 이후 선길이는 미역만 보면 국수가 생각나던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 나이가 어렸으므로 감히 미역 가닥을 빼내어서 무엇을 사먹을 엄두까지는 낼 수 없었다. 대신에 우리 삼형제로 하여금 군침을 흘리게 만든 것은 미역귀였다.
"나, 한 번만."
"나도 딱 한나만 띠묵으께."
선길이도 선유도 미역귀 하나만 떼먹자고 통사정을 했다.
"알었어. 내가 띠 주께."
나는 미역귀 한 귀퉁이씩을 떼서 녀석들에게 나눠주고 나도 한 귀를 떼어 입어 넣었다. 처음엔 말라서 딱딱하던 미역귀는 한참을 입에 넣고 굴려가면서 씹으면, 침에 불어서 미끌미끌한 질감에 고소한 맛까지 겹쳐서 심심풀이 주전부리로는 만점이었다. 그런데, 미역을 팔려고 상품으로 내놓았을 때 미역귀가 제대로 붙어 있지 않으면 상품(上品) 취급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가 미역을 내다 팔기 위해 작은방 윗목의 미역더미 쪽으로 가려는 기색이 보이면 우리는 불호령을 피해서 지레 사립 밖으로 도망을 쳤다.
학교가 파하고 바닷가로 난 길을 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름철이라면 책보를 내던지고 바다에 뛰어들어 한바탕 해수욕이라도 할 터인데 이른 봄이라 그럴 처지가 아니다. 또한 사리 때라면 점심 먹고 갯가에 나가서 게나 고동을 잡거나 낚시질을 할 생각에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생기가 돌 법도 하겠지만 물이 거의 빠지지 않는 조금이다 보니 그런 기대를 할 수도 없었다. 갯자갈을 휩쓸고 오르내리는 파도소리를 무심히 귓가로 흘리며 타박타박 걷고 있는데, 갑자기 마을 아래 갯바위 쪽에서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고함소리에 이어서 꽹과리 소리도 들린다.
"어어? 마, 맞어. 지줏녀들이 나타난 모냥이여!"
"지줏녀? 머구리가 아니고?"
"머구리든 지주녀든 일단 우리도 얼릉 저쪽으로 달례가 보자!"
"좋았어. 내가 돌팔매질 실력을 봬줄 것이여!"
우리는 동네로 향하는 오르막길에서 이탈하여 바닷가 쪽으로 뛰어 내려간 다음에 소리 나는 쪽을 향하여 부리나케 내달렸다.
조금 때에는 바닷물의 수위가 높아서 미역이며 톳 같은 해초들이 깊은 바다 속에 잠겨버리기 때문에 섬사람들은 아예 바닷가에 발길을 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기회를 틈타서 약탈자들이 나타났다. 그 중 하나가 머구릿배다. 기계를 통통거리며 해안에 나타나 닻을 내린 다음, 머구리 역을 맡은 사람이 우주복에 달린 투구 비슷한 것을 쓰고 신생아의 탯줄 같은 걸 몸에 매단 채로 풍덩 물속에 빠져든다. 그러면 배위에 있는 사람은 흡사 시소와 같이 생긴 펌프를 일정 간격으로 움직거려서 물속의 머구리에게 산소를 공급하는 것이다. 우리는 머구릿배가 바다에서 작업하는 모습이 보이면 이런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야, 만약에 배에 있는 사람이 공기를 안 내레보내면 어치게 되까?
-물속에 들어간 사람이 숨이 맥헤서 죽어불겄제.
-그랑께 머구리하고 바람 여주는 사람은, 친 성제간끼리만 한다든디?
-재덕이 느그 성제간은 맨날 쌈만 항께 머구리 그런 것 같이 하면 큰일 나겄다.
-뭣이여?
-하하하…
머구릿배가 간혹 해안으로 바투 다가와서 섬사람들의 소중한 양식인 미역이나 톳을 머구리질 해가는 경우도 있긴 했으나, 그들은 상대적으로 깊은 바다에서 소라나 전복 따위를 따는 작업을 주로 했기 때문에 주민들과 마찰이 생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문제는 지줏녀였다. 나는 '해녀'라는 말을 육지의 중학교에 진학해서야 처음 들었다. 이전까지는 물속에 잠수하여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자의 공식 명칭이 '지줏녀'인 줄 알았다. 사람들이 제주를 '지주'라 했기 때문에 지줏녀는 곧 '제주의 여자'였다.
"쩌그 봐라. 지주가 안 뵉이냐."
며칠째 비가 내리다 그치고 날씨가 활짝 개인 어느 날 아침, 아버지는 나를 마당 끝으로 데리고 가서 멀리 청산도 뒤쪽을 가리키며 제주도가 보인다 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비비고 바라봐도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청산도 너메 수평선 욱으로 하늘 쪽을 잘 보랑께."
"맞어, 높은 산이 하늘에 붕 떠 있는 것 같은디라우?"
"그거이 바로 지주의 한라산이여."
구름 위쪽으로 아스라이 떠 있는 한라산의 모습을 처음 발견하던 날 나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환상적이어서 어린 나에게 한라산은 현실세계가 아니라 선계(仙界)에 있는 어떤 곳으로만 느껴졌다. 그런데 그 곳에서 왔다는 지줏녀들은 선녀가 아니었다.
"쩌그 바우 밑에 징하게 큰 지줏배가 지줏녀들을 한 배 태우고 와서 시방 우리 미역이랑 톳이랑 다 캐가고 있당께!"
어느날 재 너머 밭에 갔다가 해녀선을 발견한 영길이 어머니가 허겁지겁 우리 집으로 달려와서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했다. 무슨 소린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영길이와 나도 어른들을 따라서 갯바위 쪽으로 달려갔다. 여남은 명의 해녀들이 태왁을 띄워놓고 잠수질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갯바위에 모여든 동네 사람들은 달리 대책이 없었다.
-이 나쁜 지주녀들아! 그만 하고 안 갈 것이여!
-물질을 할라면 느그 지주 바다에서 할 일이제 놈의 동네 와갖고 그거이 뭔 짓거리여!
-미역 도둑질 그만하고 빨리 가!
사람들이 고함을 내질렀으나 그들은 못 들은 척 물질을 계속했다. 태왁 아래 매달린 그물 주머니를 배에 올리는 걸 보니 탐스런 미역이 넘쳐나도록 가득 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바닷가에서 속수무책으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자니, 동네 사람들로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우리도 덴마(작은 목선)래도 내레서 타고 쫓아가드라고!
사람들이 다시 동네 쪽으로 들어왔다. 조금이라서 갯돌밭 위쪽으로 추켜 올려놨던 목선을 끌어내려 물에 띄웠다. 건장한 청년들 대여섯 명이 올라타고서 해녀선 쪽을 향해 있는 힘껏 노를 저어 나아갔다.
-저놈의 지줏녀들, 내 손에 잽히기만 하면 가만 안 둘 것이여!
이장이 팔소매를 걷어 걷어붙였다. 그러나 섬사람들의 손에 순순히 잡힐 그들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삿대를 하늘로 치켜 올리며 잡히기만 하면 금방 요절을 낼 듯이 분기가 탱천했는데, 노를 저어 굼벵이걸음으로 다가가는 소형 목선을 기다리고만 있을 그들이 아니었다. 덩치가 큰 그 해녀선은 마을 사람들의 목선이 삿대 두어 개 길이만큼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약을 올리듯 기계를 일으켜 통통거리며 쏜살같이 도망가 버렸다. 검은 해녀복을 입은 '지줏녀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만이 허연 포말이 되어 목선 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마을에서 수차 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조금 때면 당번을 정해서 해안을 감시하기로 했다. 해녀선에 대항하는 투쟁의 수단으로 새로 도입된 것이 바로 꽹과리와 돌멩이였다.
마을 사람들은 비상시에 대비하여 돌멩이가 없는 갯바위 해변 곳곳에다 갯돌을 주워다 무더기로 쌓아놓았다. 야전초소의 무기고 같은 곳이었다.
우리 꼬마들이 도착했을 때에는 마을 사람들의 온갖 소음공세에도 불구하고 해녀들이 태연자약 물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같은 배가 이미 두 번째로 나타나서 수중의 해산물을 약탈 중이라 했다. 처음 나타났을 때 꽹과리를 치고 욕설을 퍼 부으면서 항의하자 잠수작업을 포기한 듯이 섬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던 해녀선이 한참 만에 반대쪽 바닷가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그야말로 게릴라식 출몰이었다.
"야, 우리도 독을 땡기자!"
"누가 더 멀리 나가는지 시합하자!"
어린 우리들도 덩달아 흥분이 되어서 돌멩이를 집어 해녀들의 태왁을 향해 내던졌다. 그러나 거기까지 미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어쩌다 힘센 청년들이 던진 돌멩이가 태왁 가까이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자 입으로는 해녀들을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붓던 한 할머니가,
"그라다가 독 덩어리가 지줏녀 대그빡에 참말로 맞어뿔면 어짤라고 그래!"
그렇게 말리고 나섰다. 적개심으로 불타올라도 모자랄 판에 그런 온정주의가 끼어든 판이었니 제대로 싸움이 될 리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평소에는 해녀들을 '지줏녀'라고 부르다가, 그 해녀선을 앞에 두고 싸우는 현장에서는 '지줏녀'의 '녀' 밑에다 니은(ㄴ)을 아주 거친 발음으로 받쳐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 해녀선들 모두가 제주도에서 온 배들인 것만은 아니었다. 더러는 인근에 사는 선주가 제주 해녀들을 고용하여 주변 도서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섬 주민들의 해산물들을 그런 식으로 약탈해가기도 했다.
80년대 후반 무렵, 나는 제주도 출신의 한 절친한 선배 소설가에게 술기운을 빌려 이렇게 항변한 적이 있었다.
"선배님은 걸핏하면 제주도 사람들이 육지 사람들 혹은 중앙권력으로부터 탄압받고 수탈당했다고 분노하시던데 내 고향 생일도 사람들은요, 육지 사람들로부터 수탈당한 그 제주도 사람들로부터 무시로 수탈당하며 살았다니까요."
어쨌든 남들은 대학에 가서야 '운동'에 눈을 떴다는데 나는 이미 코흘리개 국민학교 때 투쟁의 현장에 나가서,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무리들에 저항하여 갯바위에서 집회를 하고, 시위를 하고, 농성을 하고, 구호를 외치고, 심지어는 투석전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불온한 운동권 어린이'였다! 우리들의 모듬살이를 지켜내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