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을 떠올리면, 많은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솟아오른다. 1980 ~ 90년대에 '월미도의 해맞이'는 젊은이들이 몰려들어서 대 장관을 이루었다. 한때 제주도 성산포 해맞이, 울산 간절곶 해맞이, 정동진 해맞이, 포항 호미곶 해맞이와 더불어 '한국의 5대 해맞이' 명소라고 불렸다. 새벽에 해돋이를 구경하고 까칠해진 위장을 보호하기 위해 지금은 어딘지 모르는 유명한 해장국집에서 얼큰한 뼈다귀해장국을 먹은 기억이 떠오른다. 추억은 항상 새 모양으로 날갯짓하고 비상하다가 사라진다고 했던가?
그 외에도 영종도 해수욕탕 사우나, 을왕리 해변, 월미도에서 영종도 들어가는 유람선 선창에서 만난 갈매기떼, 강화도 석모도 펜션에서 일몰을 보면서 구워먹은 삼겹살 맛 등등 잊을 수 없는 일상적 삶의 편린들이 문득 떠오른다.
인천을 찾아가야 하는 이유는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인천이 구한말에서 개화기를 거쳐 근대의 역사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수많은 풍상을 겪으면서 우리민족의 수난의 역사를 그대로 품안에 안은 채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인천하면 역시 서구열강들의 침탈과 구한말 수구세력의 결사적 저항으로 상징되는 '충돌과 긴장의 현장'이라는 표상적 의미가 좀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2007년 6월 구 제물포구락부(인천시 유형문화재 17호)는 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새롭게 오픈했다.
인천시가 중구 송학동에 6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복원한 제물포구락부는 1901년 세워진 2층 건물로, 1913년까지 독일.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미국 등 서양인들의 사교 클럽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일본 재향군인회관 등으로도 쓰였던 암울했던 역사를 안고 있다. '구락부'라는 말은 영어 '클럽'(club)의 일본식 발음을 한자로 차용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건물을 보면서, 우리 민족의 수탈의 아픈 역사와 서구 과학문물을 개방할 수밖에 없었던 세계사적 대세의 흐름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 건물은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찐(A. L. S. Sabatin)에 의해 설계되었다. 사바찐은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1883년 조선 정부의 총리아문참의로 활동했던 뮐렌도르프에 의해 발탁되어 우리나라에 왔다. 당시 그의 직명은 영조교사로 왕국건설을 위한 도면작성과 벽돌생산을 위한 벽돌제조 가마를 만드는 것이 임무였다.
하지만 벽돌 제조 가마 계획안이 실행되지 않자, 인천 해관의 토목기사로 근무하면서 인천해관 청사, 세창양행 사택(1884), 인천 최초의 부두(1884년 말) 등을 설계했고 부두공사는 감독까지 맡았다. 그 이후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제물포 각국조계지도(1888), 각국공원(1888), 홈링거양행 인천지점 사옥(1898), 제물포구락부 회관(1900) 등을 설계했다. 그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1904년 프랑스함선을 타고 귀국했다.
사바찐은 건물의 지붕을 일본식 합각지붕과 맨사드(Mansard) 지붕으로 처리하였으며, 마감재료는 양철을 사용하였다. 건물의 정면은 가로와 세로 방향으로 3개의 영역으로 분할하였다. 세로 방향으로는 가운데 부분을 약간 돌출시키고, 그 위에 맨사드지붕으로 처리하여 변화감을 연출하였다.(*참고로 맨사드란 목조건축용어로, 지붕에 패러미터 주위의 매우 급한 물매를 가진 형태로 벽 높이를 충분히 주어 공간을 완전한 층으로 확보할 수 있는 형태를 말함)
정면 중앙부와 오른쪽 부분에 설치한 창문 상부는 페디먼트로 장식을 두었지만, 좌측 창문 상부는 평아치로 처리하였다. 손장원 재능대교수에 의하면, 이는 전체적으로 대칭성에서 변화를 주고자 한 것이라고 파악된다. 제물포구락부 건물의 내부에는 사교실, 도서실, 당구대 등이 마련되어 있었고, 실외에 테니스장을 두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드디어 1901년 6월 22일, 1년여의 공사 끝에 제물포구락부의 회관 개관식이 거행되었고 주한 미국공사 알렌의 부인이 은제 열쇠로 출입문을 여는 것으로 활동이 시작되었다. 다시 내빈들은 회관 내부를 두루 돌아본 다음, 허버트 고페 영국영사가 경과보고와 함께 회관 신축에 기여한 건축가 사바찐, 미국인 데쉴러, 독일인 뤼어스 등의 노고를 치하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조계제도가 폐지된 후 이 건물은 그 기능을 상실해 1913년 이후 일본재향군인 연합회가 정방각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였고, 1934년부터는 일본부인회, 광복직후에는 미군 장교클럽, 1947년부터는 대한부인회 인천지회가 각각 활용하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북한군 대대본부와 미군 사병 클럽이 들어섰고 1952년 후 시의회, 교육청, 박물관, 중구 문화원 등으로 사용하다가 인천시가 제물포구락부를 복원하여 재개관하였다. 한마디로 제물포구락부는 '한국 근대사의 산 증인'인 것이다.
고종황제의 시의(侍醫)였던 독일인 분쉬박사의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를 보면, 제물포클럽에서 영국 영사, 프랑스 세관장, 큰 상사의 대리인, 세창 양행 총대리인 볼터씨 가족 등 50여 명을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보름마다 무도회가 클럽에서 열려 식사도 하고 "춤도 추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제물포 구락부의 정문을 나와 계단을 따라 5분 정도 올라가면 인천항 부두가 내려다보이는 자유공원이 나온다. 넓은 광장에 공연 무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인천방문의 해 기념 축하문화예술행사가 지속적으로 열리고 있다. 무대를 가로질러 걸어가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맥아더장군' 동상이 인천 시내를 내려다보며 서있다.
무대 세트를 가로질러 길을 따라 내려가면 인천 중구의 명물 '차이나타운'이 나온다. 차이나타운은 인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산에도 있다. 차이나타운을 걸어 내려가면 마치 중국 베이징에 온 듯 착각에 빠진다. 물론 왕푸징 거리처럼 골동품가게와 쇼핑센터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화교의 상징인 '자장면'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다.
자장면과 탕수육 등 중국요리집도 많이 있지만, 중국만두 전문점도 있어서 눈길을 끈다. 특히 관광객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중국음식점 담벼락에 「삼국지」 벽화를 그려놓아 역사성과 오락성을 되살리면서 문화적 접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삼국지」뿐만이 아니라 유교의 상징인 공자의 동상도 건립해놓아서 더욱 친근감을 준다. 마치 중국 산동성 곡부에 위치한 공자의 고향에 온 듯 착각에 젖어들게 만드는 것이다.
차이나타운을 벗어나서 구한말과 개화기의 중요한 역사적 공간 중 하나인 <화도진>을 찾아갔다. 화도진은 인천시 동구 만석동과 화수동의 경계인 화도고개 위에 위치하고 있는 화도공원 안에 있다.
'화도진'이 세워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강화도 조약 이후 무리하게 개항을 요구하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인천에는 고종 12년 1875년에 이미 '방어영'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1878년 8월 27일 고종황제는 어영대장 신정희를 인천 부평 등지로 파견해 진과 포대를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고종은 신정희로 하여금 축조공사를 맡기고 그 이듬해인 1879년 7월에 서해안 방어의 중요진지로 화도진을 완공하였다.
당시 일본과 서구 열강들은 제국주의의 야심을 가지고 호시탐탐 아시아와 중남미로 세력을 넓히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명목은 통상과 무역을 위한 수호통상조약을 맺자는 명분이었지만, 당시 조선의 조정은 외국과 무역거래보다도 그들이 가지고 들어올 천주교의 종교적인 이념과 과학문물이 중세봉건왕조에 미칠 악영향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쇄국정책과 문호개방이라는 양날의 칼을 들고 외래문화에 대해 무조건적인 차단벽을 치는 것이 아니라 소걸음처럼 느림보행보, 즉 점진적인 개방이라는 조심스런 행보를 펼쳤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당시 고종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정권대신 신헌이 미국의 전권대사 슈펠트제독과 이곳 화도진에서 '한-미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에서 확인이 된다. 이후 한-영, 한-독 수호통상조약이 연속해서 체결되었다. 그 후 고종 21년인 1884년 5월에는 친위진영으로 되었다가 그 이듬해인 1885년 6월에는 좌영으로 이속되었다.
갑오경장(1894)으로 군제가 개편됨에 따라 화도진은 불타 없어졌다가 1988년 옛 화도진도를 근거로 인천시에서 복원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 화도진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 이승훈 증손자인 이연귀, 이균귀 형제가 신미양요 때 처형된 순교지로도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화도진은 동헌, 내사, 사랑채, 전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병영 11동과 유물전시관에 총 192종 605점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진은 지방의 군사를 관리하던 지방관제의 하나인 진영의 준말로서, 진영장 품계에 따라 주진, 거진, 제진의 3등급이 있었으며, 화도진은 이중 만호, 도위가 주재하는 '제진'에 속한다.
동헌(東軒)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한-미 수호 통상조약을 체결했던 당시의 광경을 하나의 방에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한-미 수호통상조약은 1882년 5월 22일 대조선국 전권대관경리통리아문사 신헌과 대미국전권대신 총병 로버트 윌슨 슈필트제독 사이에 조인되었으며 1883년 5월 19일 서울에서 비준서를 교환하였다. 애초 슈펠트는 친분이 있었던 일본 관리를 통해 조선정부와 다리를 놓았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청나라의 이홍장에게 부탁을 하여 결국 조약체결을 성사시켰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사랑채는 흔히 수령이 향촌의 사족이나 행정관리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화도진의 사랑채는 수군기지의 특성상 병사들이 기거하는 병영의 건물로 사용되었던 점이 특징이다.
특히 당시 무기창고였던 곳을 개조한 유물전시관에는 외세에 의한 개항압력을 둘러싼 근대사의 물결을 쉽게 보여주기 위해, 당시의 조선이 소유하고 있었던 무기의 형태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던 신헌장군 등의 영정과 의복 등을 전시하고 있어 역사적 리얼리티를 주고 있다.
전시관에는 비격진천뢰와 같은 폭탄과 철환 40발을 쏠 수 있었던 별황자총통 그리고 연환 1발을 쏘았던 불랑기 4호, 대완구 등의 무기류가 전시되어 있어 외세와의 싸움에서 과학적 병기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야외전시장에는 명나라 때 정두원이 도입하였으나 실용화되지 못하다가 영조 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했던 홍이포(紅夷砲)를 비롯하여 신미양요를 겪은 후 국방력강화를 위해 강화도에 배치했던 중포와 소포 등이 전시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원병 파견을 계기로, 다양한 중국식 화포를 도입하였다. 불랑기, 백자총통, 호준포, 위원포, 장군포 등이 그 예이다. 이후 조선왕조는 이들 중국식 화포를 자체 생산하여 조선식 화포와 같이 사용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도 당총통, 목가포, 홍이포 등 각종 중국식 화포가 추가로 도입되었다.
불랑기(佛狼機)는 16세기 초에 중국에서 도입된 유럽식 대포이다. 불랑기는 모포(母砲)와 자포(子砲)가 분리되어 있다. 불랑기는 자포 안에 포탄을 장전한 상태로, 자포를 모포에 결합시키는 독특한 장전방식을 사용한다. 이 때문에 장전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나, 자포와 모포의 규격이 정밀하지 않으면 폭발할 위험성도 있다.
불랑기는 임진왜란 때 처음 우리나라에 도입된 무기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목동 지하철 공사장에서 1563년에 제작된 국산 불랑기의 자포(보물 제861호)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유물로 볼 때 이미 임진왜란 발발 30여 년 전에 불랑기를 자체 생산한 것이 확인된 것이다.
불랑기는 크기에 따라 불랑기 1~5호로 나뉜다. 현재 남아있는 실물 유물은 주로 불랑기 4호와 불랑기 5호이다. 불랑기 4호의 경우 전체 길이가 100cm 내외이고, 구경은 40mm 정도이다.
마침 유물전시관에 남자 아이를 데리고 온 부부가 들어섰다.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와우 철제 무기가 많네~~ 무엇하는 데 쓰는거야?" 엄마는 답했다. "아마도 조선왕조 때 나쁜 나라사람들이 쳐들어오면 사용했을걸?" 아이는 신기한 듯 다시 물었다. "우리나라도 상당히 싸움을 잘했구나?"
엄마는 그 다음 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빠가 나섰다. "그 때 우리나라는 외국과 무역거래를 하지 않아 무기도 시원찮았고 싸움도 잘 못했어. 그래서 결국 일본에게 나라도 빼앗겼지."
화도진 유물전시관은 인천지역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좋은 역사교훈자료로 활용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조정은 대원군이 집권 10년만인 1873년, 서원 철폐와 호포법의 실시 그리고 경복궁의 개축 등으로 기득권층인 양반세력과 기층세력인 민중 계층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어 실각하였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고종과 민씨 일족이 권력을 장악했다. 민태호, 민규호 등은 노론 북학을 계승한 인물로서 문호개방에 적극적이었다.
그 무렵 메이지유신 후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정한론을 앞세우며 조선침략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드디어 1875년 5월 부산항에 군함을 동원하여 한 차례 무력시위를 한 뒤 운요호를 강화도에 접근시켜 조선군대의 포격을 유도했으며, 그것을 빌미로 문호개방을 요구했다. 결국 민씨 정권은 1876년 2월 일본과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의 거듭된 횡포에 위협을 느낀 조선정부는 일본을 견제할 방도를 모색한다. 그 결과 청나라 이홍장의 주선으로 1882년 5월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던 것이다. 또한 청나라도 1882년 9월 조선과 '조-청민수륙무역장정'을 맺었지만 장정 속에 조선은 청의 속국이라는 조항과 함께 치외법권의 확대 등 상당히 불평등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어 조선정부는 영국, 독일(1883), 이탈리아, 러시아(1884) 그리고 프랑스, 오스트리아(1886) 등과 잇달아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구 제물포구락부는 이들 서양 외교사절과 통상관련 무역회사 관계자들과 그 가족들의 사교장이었다.
이러한 서구열강과 체결한 통상조약의 덕분에 개항 뒤 조선은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좋아진 점은 서울, 인천, 의주, 부산 등지를 연락하는데 사용된 전신이 들어온 것이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화도 들어오고 열차도 운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역구조의 변화는 부농과 빈농의 이원화를 가져왔다. 당시 수출품의 대부분은 쌀, 콩, 소가죽 등의 식량과 원료품이었고, 수입품은 면제품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품이었다. 이러한 대외교역은 쌀값 폭등 등의 물가상승을 가져왔으며, 그 결과 지주, 관리층은 부를 축적하게 되었으나 가난한 농민층은 추수 직후 값이 쌀 때 쌀을 팔 수 밖에 없었고 일본상인들의 고리대의 피해를 보기도 했다. 당시 산업화 단계에 들어선 일본은 노동자의 저임금을 유지하려고 값싼 조선 쌀을 대량으로 수입해갔다. 그 결과 조선 쌀값은 폭등하였고 민중들의 삶은 점차 피폐해졌다.
개항정국은 물가불안과 구식군대의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로 인한 봉기 그리고 동학농민전쟁 등으로 수렁 같은 혼란에 빠져들면서 조선정부 스스로 외세를 불러들이는 악수를 두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혼돈상황을 지켜보면서 인천은 서구세력 진출의 교두보역할을 맡은 데에 만족감을 느끼면서 안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제 '민족의 자주권'이 위협받은 상황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천으로 달려가 역사의 현장을 발로 밟아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먼 미래의 후손을 위해 수난과 아픔의 역사도 생생하게 남겨두어야 하며, 그것에서 교훈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우리나라에서 식민지시대의 아픈 역사를 사실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역사유물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것은 아무래도 슬프고도 암울한 역사이므로 감추고 싶은 민족적 자긍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아픔 역사도 역사의 일부이다. 특히 후손들에게 교훈을 주기위해서도 반드시 남겨두어야 할 귀중한 문화유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