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습니다.
여름과 가을의 경계를 훌쩍 넘어 이젠 가을입니다.
이른 아침 나선 산책길, 가을의 편린들이 하나 둘 손짓을 합니다.
'편린', 그랬습니다.
물고기의 작은 비늘 하나 속에 바다가 들어있는 듯, 작은 이슬 방울 속에 우주가 들어있음을 봅니다.
메밀꽃으로 유명한 봉평은 아니지만 그와 다르지 않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피어난 메밀꽃. 자신이 서있는 상황을 탓하며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온전히 피워내지 못하는 나약한 나의 모습을 질책하는 듯합니다.
연약함, 그것은 그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연약한 자식에게 부모가 더 많은 사랑을 주는 것처럼, 그래서 연약하지만 살아가는 것처럼 나의 단점으로 인해 오히려 내가 사는 것입니다.
강함이 자신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함이 자신을 살게 한다는 역설을 깨닫는 순간, 그 순간 사람은 겸손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해안가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해국을 만났습니다.
어쩌다가 바다와 멀리 떨어진 이 곳까지 와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곳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낸 해국이니 대견스럽습니다.
바다가 그리웠을까요?
이슬 방울 속에 잠겨있는 해국, 아침햇살에 꽃잎들이 기지개를 펴며 하늘맞이를 합니다.
강아지풀의 꽃술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열매가 맺히는 것은 모두 꽃이 있습니다. 그냥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니 꽃이 피어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구태여 사람의 눈에 뜨일 만한 꽃이 아니어도 자신들의 삶을 이어가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면 안달하는 현대인들의 허황된 꿈을 꾸짖는 듯, 곱지도 보이지도 않는 꽃을 피우다 갑니다.
풀섶에서 이슬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었다면 그 작은 이슬방울에 눈길을 주는 사람들 조차도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가지 조건들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한 방울의 이슬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 세상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잠시잠깐 피었다가 서둘러 떠나는 것이겠지요.
어떤 풀들은 솜털이 많이 있습니다.
그 솜털에 이슬이 송글송글 맺히는 모습은 조금 색다릅니다.
보석을 꿰어놓은 듯, 작은 솜털 하나마다 이슬방울이 층층이 맺혀 있습니다.
풀섶을 가만 바라보면 상하고 잘리고 밟힌 풀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인의 노래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상처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상처받은 풀들이 있어 또한 연록의 새순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는 세상도 그렇습니다.
상처받은 영혼들의 위로함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니 그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가을빛을 담은 이슬방울을 보니 가을이 이만큼 왔구나 느껴집니다.
고운 빛으로 물든 단풍이 낙엽이 되고, 그 낙엽이 다시 이른 아침이면 키작은 풀줄기에 맺힌 이슬을 물들입니다.
고운 빛으로 물든 이슬방울들을 모우면 수채화물감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가을빛, 모든 빛깔이 다 아름답지만 붉은 열매들은 특히나 매혹적입니다.
붉은 립스틱 보다도 더 붉은, 그러면서도 결코 요염하지 않은 수수함으로 다가오는 붉은 빛 가을 열매의 추파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저렇게 고운 입술을 가진 여인을 이 가을에 만나는 사람은 행복할 것 같습니다.
아스팔트 가장자리에 모인 흙먼지를 대지 삼아 피어났던 강아지풀, 작은 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린 탓에 늘 목말랐을 강아지풀이 이젠 자기의 할 일을 다했다며 시들어 갑니다.
그들의 꿈은 무엇일까요?
올해 맺은 씨앗들이 자신들이 뿌리를 내렸던 척박한 땅이 아니길 바라는 그런 꿈을
꾸겠지요.
'나 같은 삶을 살지 말아라!'
그러나 삶은 참으로 애꿎습니다. 그런 꿈들을 개꿈으로 만드는 현실이 대부분입니다.
그렇다고해도 그 꿈을 버릴 수는 없겠지요.
분명, 저 고단한 과정을 통해 영근 씨앗 중에서는 옥토에 뿌리를 내리고 풍성하게 피어날 씨앗이 있을 것입니다. 그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길.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카페<김민수 목사님의 들꽃교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