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일반 연쇄살인범은 스스로 만들어지지만 테러살인범은 교육된다는 사실도 놓쳐서는 안 되겠지. 피교육생이 있으면 교관과 교장(敎場)이 있는 것은 불문가지이고. 세 번의 살인과 한 번의 납치를 흔적조차 없이 해치울 수 있었던 비결도 거기에 있을 거야. 그들은 교육되고 훈련된 살인 기계들이지.
수경, 한 번 이런 가정을 해 보면 어떨까?
- 이미 오래 전부터 범행을 준비해 오던 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는 위엄 있는 정체 미상의 한 실력자가 주도하고 있다. 그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을 납치하여 살인 기계로 훈련시켰다. 납치된 사람들은 겨울 추위와 굶주림으로 삶을 포기하다시피한 성인 남자들이었다. 범인들은 그들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홈리스 즉 노숙자들이었다. 범인들은 마치 시청에서 나온 공무원 행세를 했을는지도 모른다. 신체검사 결과 피랍자 중 대부분에게는 알코올 중독이나 지병이 있었다. 그들에게 얼마 동안 좋은 술과 음식과 샤워와 침대가 제공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음식에는 진정제가 섞여 있는 수가 많았다. 그들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범인들은 그들에 대한 세뇌 작업을 조심스럽게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모종의 파괴적인 이데올로기가 주입되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흉악한 살인을 대범히 해낼 수 있게 만드는 특수 약물도 그들에게 함께 주입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가정 말이야. 이런 가정이 아니고서는 그 기상천외하고 용의주도한 살인극을 결코 납득할 수가 없어. 나의 조언이 수사에 조금이라도 도움 된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꽤 오랫동안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수사에 진전이 있기를 빌겠어. 어머니에게 안부를 전해 줘.
그 날 집에 간 조수경은 어머니에게 미뤄 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혹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 알아?"
"나는 아는 외국인이 없다."
"한국인인데 이름을 그걸로 쓰는 사람이야."
"넌 어떻게 안 사람인데?"
"귀국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알고 보니 세계적인 범죄심리학자였어. 나한테 큰 도움을 주고 있는데 엄마에게 안부 전하라는 말을 두 번이나 했어."
조수경의 어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미국에서 온 분이겠구나?"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 낡은 사진첩을 가지고 나왔다. 조수경은 그 사진첩에 어떤 사진이 들어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진첩이었다. 어머니는 사진첩을 몇 장 넘기더니 사진 하나를 찾아냈다. 어머니는 사진첩을 수경 쪽으로 돌려놓았다.
"거기 맨 아래 사진."
빛바랜 흑백 사진이 있었다. 조수경의 아버지와 친구 몇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모두가 젊은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흰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거기 맨 왼쪽 사람을 잘 봐라."
흐릿하기는 했지만 조수경은 그가 젊은 아브라함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아빠 친구였다는 말인가?"
"그렇단다. 그 분이 약속대로 돌아왔구나. 미국에서 사업으로 크게 성공했다는 소문만 들었는데."
불현듯 조수경은 아버지의 존재를 똑똑히 인식하게 되었다. 기억에도 없고 실감할 수도 없었던 아버지였다. 그랬는데 갑자기 출현한 한 친구의 모습이 아버지의 실체를 체감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울러 그녀는 아브라함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나한테 미스 조라고 하지 않고 그냥 수경이로 부르고 싶다고 한 이유를 알겠네."
그녀는 미소를 띠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우리 아빠가 있기는 있었나 보네."
"내가 유령하고 결혼해서 너를 낳은 줄 알았니?"
요즘 수영과 헬스를 하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보기 좋은 분홍빛 물이 들어있었다.
조수경은 아브라함의 조언에 합리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 'B. K.'의 'K'가 Korea를 의미한다면 'B'는 Korea를 수식하는 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는 김인철에게 'B'의 의미를 연구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b로 시작하며 Korea를 수식할 수 있는 단어는 너무나 많았다.
김인철은 추정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범죄의 성격으로 보아 B는 bad 즉 '나쁜 한국'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B. K.를 범죄 집단의 명칭으로 보아 'bone Korea' 즉'뼈의 한국' 쯤으로 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식이었다. B를 beat로 보아 '한국을 때린다'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었고 benevolence나 beneficence로 보아 '자비의 한국'이라고도 할 수도 있는 등 그것은 붙이기에 따라 추정의 가능성이 무한정이었다.
다음으로 조수경은 테러의 정확한 개념을 알아보았다. 테러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폭력 수단'을 의미한다. 그것의 주체는 나라일 수도 있고 단체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사건을 두고 배후를 북한으로 지목하든 아니든 그것은 모두 테러라고 규정하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범인들의 정치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범인은 지금까지 네 개의 메시지를 남겼다. 탐욕, 수구파, 위선, 극우 등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죽인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염규호 부부의 위선적인 생활이 드러나지 않자 부인을 납치까지 하며 그들의 표리부동한 생활상이 국민들에게 알려지도록 했다. 단순히 보아서 범인은"그런 사람들은 징벌된다"는 메시지를 한국 사회에 보낸 것이다.
하지만 정치 테러일 경우 단순하게만 추정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역발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 정치테러였다. 조수경은 해방 정국에서 빚어진 한국의 테러들이 매우 교활한 계산을 하고 자행되었음을 상기했다. 이를 테면 우익을 죽인 배후는 좌익이 아니고 같은 우익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예컨대 장덕수는 임시정부의 미움 살 짓을 많이 한 친일· 친미파였는데, 정작 그를 죽인 것이 임시정부 쪽이었는지 아니면 임시정부 세력을 제거하려던 미군정이었는지를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익 인사 송진우를 죽인 것은 좌익이 아니었다. 하물며 좌파성 중도 인사 여운형을 죽인 것은 우익인지 좌익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번 사건들도 탐욕, 수구, 위선, 극우 등을 증오하는 쪽의 소행인지 아니면 증오하는 세력을 살인자로 만들어 그들을 궁지에 몰려는 교활한 역발상에 의한 것인지를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었다. 다만 대북포용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말대로 배후가 북한이라는 가정을 해 볼 수도 있는 일이지만, 조수경과 김인철이 조사한 바로는, 북한이나 친북 세력으로서는 지금 시점에서 그런 분란을 일으켜야 할 합리적인 이유나 동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조수경은 프로파일링에 조금씩 자신감이 붙어 가고 있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한층 더 의욕을 가졌다. 잘 하면 이번 주 내로 프로파일링을 완성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아브라함의 조언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 들었다. 며칠 후 그녀는 햇볕연쇄살인사건의 1차 프로파일링을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연말까지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