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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심리를 상술로 이용하는 사람들

 

명절 전에 지인이 백화점 상품권을 건네주고 갔다. 오래 전 오만 원짜리 상품권 한 장 때문에 백화점에 갔다가 수십 만 원을 카드로 긁었던 씁쓸한  기억이 떠올라  이번에는 무조건 식품부로 내려가서 돈에 맞추어 먹을거리를 사 오기로 했다.

 

 단단히 결심을 하고 무조건 아들아이와 식품부로 내려갔는데 그 가격 상품권을 가지고 마음대로 살 수 있는 먹을거리가 생각보다 적었다. 명절 대목을 겨냥한 듯 굴비는 수십 만 원을 호가해 감히 만져볼 수 없었고, 고기 세트나 고급 한과 세트도 만만찮은 가격이라 눈길을 주기가 어려웠다. 겨우 아들아이가 좋아하는 돼지고기 오겹살 두 근, 목살 한 근, 생선 두 가지를 산 뒤 구만 원의 상품권을 내고 사천 백 원의 거스름 돈을 받아가지고 나왔다.

 

백화점 안을 함께 돌아다녔던 아들아이가 상상을 초월한 물가에 놀랐는지 내게 "그냥 상품권 쓰러 왔다고 생각하세요"라고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렇게 서민인 내가 피부로 느끼는 실질적인 경제 체감온도는 싸늘한 얼음에 둘러싸인 남극이나 북극만치 매섭기만 하다.

 

<쿠오바디스 한국경제>에서 날카롭고 예리한 시각으로 길 잃은 한국경제에 노정표를 제시했던 이준구 교수가 일반인을 위한 친절한 경제서 <36.5°C  인간의 경제학>을 출간했다. 경제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아하! 그렇구나!'를 연발할 만큼 책은 흡인력 있게 읽힌다.

 

서민경제는 나날이 얼어붙어 동토가 되어 가는데 시장경제를 움켜쥐고 있는 자본가들은 얄팍한 서민주머니에 아랑곳하지 않고 늘 주머니 속을 털어 낼 계책에만 골몰한다. 꼭 필요한 생필품을 패키지로 만들어 판매량을 두 배 가까이 늘린 것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치약값을 약간 할인하면서 네, 다섯 개의 패키지로 묶은 것은 인간 심리를 자극, 닻내림 이라는 효과를 판매 전략으로 이용한 것이다. 소비자는 애당초 정한 자기 기준의 위 아래로 조정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소비자가 닻을 어디에서 내릴지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소리다. 경제성에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고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내는 광고 전략이나 술수에 서민들만 피멍이 드는 셈이다.

 

당신은 혹시 나중에 돈을 내거나 싫으면 쓰다가 물려도 되니 우선 써보라는 권유를 받은 적은 없는가? 이제는 필수품이 되다시피 한 휴대폰, 케이블TV,  정수기회사  등에서 한 달간 무료로 사용해 보라는 친절한 제의를 받은 적은 없는가?

 

예를 들어 어떤 운동기구에 12만 원의 가격표가 붙어 있는데 소비자는 10만 원까지만 낼 용의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는 운동기구를 사지 않기로 결정할 것이다. 가게 주인은 사지 않겠다는 그를 붙잡고 늘어지면서 아무 조건 없이 한 달만 써보라고 강권했다. 그런데 그 물건을 써보는 과정에서 부존효과가 발생해 소비자는 이제 13만 원까지 낼 용의를 갖게 되었다. 한 달 후 그는 물건을 되돌려 주지 않고 12만 원을 내기로 결정한다. 케이블TV 회사나 가게 주인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런 효과다. 아무 조건 없이 써 보라는 권유를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이 제의를 할 때 가게 주인은 함정을 파 놓고 독자가 거기 빠지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학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경제이론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장사꾼들은 능란한 장사꾼일 뿐 천사가 아니다. 그들은 '갖고 있는 것은 놓치기 싫다'는  인간 심리가 만들어 낸 부존효과가 자연스럽게 소비로 이어질 날을 기다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저자가  어찌  독자들에게 이면에 숨겨진 상술에 유의하라고 충고하지 않겠는가.

 

이제부터 슈퍼마켓에 갔을 때 여기저기 나붙은 갖가지 선전 문구를 그냥 지나치지 말기 바란다. 그 속에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지 생각해 보면서 쇼핑을 하면 즐거움이 훨씬 더 커질 수 있다. 나는 행복에 관한 하나의 지론을 갖고 있다. 그것은 사소한 일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쇼핑을 하면서 경제학을 배우는 즐거움까지 느낄 수 있다면 독자는 아주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36.5℃ 인간의 경제학 - 경제 행위 뒤에 숨겨진 인간의 심리 탐구

이준구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2009)


태그:#이준구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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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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