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오르면 나라가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가 내린다."
한힌샘 주시경 선생의 말씀인데 요즈음 돌아가는 사정은 딴판이다. 말이 오르기는커녕 제 나라말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다. 돈 버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명박 정부에 와서는 더욱 그러하다. 돌아보면 '오륀지'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공동대표 김경희·김수업·김정섭·이대로)에서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더럽히고 짓밟고 있는 데 앞장서는 학자와 경제인 공무원을 고발하고, 우리말을 버리고 영어로 이름을 짓거나 바꾸어 제 나라 말과 글을 어지럽히는 정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공기업을 우리말 헤살꾼으로 뽑아온 지 11년째다. (헤살꾼이란 '남의 일에 짓궂게 훼방을 놓는 사람'을 말한다.)
KT(사장 이석채), 충북제천에 있는 대원대학, 대전시 유성구청, 지방자치단체공무원, 보건복지가족부, 정부기관, 케이블방송, 서울시, 서상기 한나라당 국회의원, 공기업 10곳(인)이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에서 뽑은 2009년 우리말 헤살꾼이다.
[헤살꾼1] KT(사장 이석채)
이 회사는 본디 국가 체신부 아래 기관인 전화국이었다. 1981년에 한국전기통신공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2002년에는 KT란 영문으로 이름을 지은 최초의 영문 이름 공기업이다.
이 회사의 영어사랑, 한국말 푸대접은 끝이 없다. 지점마다 달린 영문 간판은 말할 것이 없고, 광화문 광장에 달린 "art Hall"이란 영문 간판은 길가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당신을 위한 최고의 감탄사라며 "alleh kt!" 를 외치며, 사람들 가슴 속의 한글 지우기에 열심이다. "QOOK&SHOW 강!추(秋) Festival" 란 말은 또 뭐냐! 어디까지 갈지 지켜볼 일이다.
[헤살꾼2] 대원대학(총장 유재환)
이 대학은 영어와 중국어 못하면 밥도 못 먹는다.
"16일 오후2시 교양관 107호에서 개점하는 대원대학 외국어 매점에서는 오직 영어와 중국어로만 물건의 구매와 일반대화가 가능하며 일체 한국어 사용은 금지된다."(충북일보 2009년 9월 15일자)
아무리 교육을 위해서라지만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영어특구니 외국어 전용공간이 하나둘 씩 늘어나 섬처럼 떠도는 걸 보면,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한글이나 소리없이 녹아내리는 북극의 빙하나 머지않아 사그라질 운명같아 마음이 짠하다. 세종대왕은 동상으로 광화문 한 복판에 납시었지만, 한글은 점점 변두리로 몰려나니 낯이 화끈거린다.
[헤살꾼3] 대전 유성구청(구청장 진동규)
대전시 유성구는 인구 5만 명을 넘어선 구즉동의 행정구역을 나눈 뒤 관평동, 용산동, 탑립동 8300여 가구와 합쳐 이 지역의 행정업무를 총괄하는 행정동을 새로 만드는데 이름을 '테크노 동'이라고 할 작정이란다. 우리말을 짓밟는 짓이다.
"우리 법령에 외래어를 지명으로 쓰지 말라는 규정이 없으니 문제 될 게 없다고 말했다"는 관계 공무원의 말이 기 막힌다. 법이 없어도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게 근본이고, 법보다 도덕과 겨레 얼을 지키는 게 우선이란 건 상식이건만, 외국어로 세계화 경쟁만을 앞세우는 이 땅에서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 걸까. 외국인이 보고 알 수 있도록 표기도 'Techno'로 써야한다고 우길까봐 걱정이다.
[헤살꾼4]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서울시가 내놓은 '어반 테라스(urban terrace) 조성계획'을 만든 공무원이 대표적이다. 마포대교와 원효대교 사이 한강 강턱에 만들 폭 35m, 연장 1300m, 면적 1만 8000㎡ 규모의 완만한 접근로를 '어반 테라스'라고 이름지었단다. 우리말을 푸대접하고 시민을 무시하는 짓이다. 여의도 한강공원을 쉽게 오갈 수 있도록 새 길을 만드는 사업이라는데, 이름을 이렇게 붙여서야 시민들이 제대로 찾아올 수 있을까.
부산시 공무원도 뒤지지 않는다. 녹색 도시를 조성하겠다면서 '그린 부산(Green Busan)', 해운대구는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청사포로 이어지는 달맞이 길을 '문 탠 로드(moon-tan road)'로 이름 짓고, 지난해 수영만 매립지를 '마린시티'로 정했단다. 우리말을 부끄럽게 여기다 못해 증오하는 공무원들, 제발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마시라! 그것이 오히려 시민을 돕는 길이니.
순위를 매길 수 없는 헤살꾼 여럿 보건복지가족부, 부랑인과 노숙인을 '홈리스'로 불러 부랑인 노숙인들 살림살이 좋아지셨습니까?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콘덴츠산업실 게임콘텐츠산업과 디지털콘텐츠과 영상콘텐츠과 미디어정책국 뉴미디어홍보과로 이름 바꾸어 국격 좀 높이셨습니까?
와우, 세련되셔라! 잉글리쉬
케이블방송의 영어사랑은 남다르다. 방송 제목부터 튄다. "뉴스라인, 뉴스 타임, 나이트라인, 뉴스 매가진, 선데이 뉴 플러스…. 상품광고는 토씨만 한글 차지고 나머지는 알 수 없는 영어다. "핑크컬러가 러블리한 느낌을 줘서 페이스를 더욱 큐트하게 보이고…"
서울시, 영어는 물론 한자 사랑도 특별나다. 지면을 아끼면서 한번에 영어 한자를 섞어 쓰는 것이 달인수준이다. 버스나 전철역들에 붙인 "일어서自!" 동대문구가 중랑천에 내 건 "중랑천愛 놀자." 서울시 산하 공기업인 서울도시철도공사의 광고문은 "중소 企UP"이다. 서울동물원은 "스타夜놀자!"란 광고문을 냈다고 한다. 서울시는 광화문광장에 세종대왕 동상을 세웠는데, 동상 뒤에 꾸민 꽃밭 이름이 '플라워 카펫'이다. 대왕님 목덜미가 근질근질하시지나 않을는지.
서상기 국회의원(한나라당)- 교육국제화특구의 지정·운영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안
올해 4월 30일, '교육국제화특구의 지정․운영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안(의안번호 4727)'을 서상기 의원((한나라당 대구)이 대표로 한나라당의 국회의원 30명이 제출했다. 이 법안은 우리말을 버리고 영어 해방구를 만들려는 법안이다.
이 법안을 제안한 이유는 "국가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교육국제화특구를 지정․운영함으로써 통합형 국제학교의 설립, 외국어전용타운의 조성 등 교육국제화 인프라 구축사업을 비롯해 초․중등학교 외국어교육 강화사업, 외국인 유학생 유치 강화, 외국대학과의 교류사업 등의 사업을 통해 혁신적 교육국제도시를 조성․육성하여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려는 것임."이다.
한글나라가 아니고 영어나라가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자랑스러운 영문 이름을 가진 공기업들 국민이 낸 세금으로 회사를 만들고, 국민을 대상으로 돈을 버는 공기업들이 제 나라 말과 글을 버리고 영문으로 이름을 바꾸는 짓... 일제가 강제로 우리말을 못 쓰게 하고 일본식 창씨개명을 했다면, 기업들은 돈으로(자기 돈도 아니면서) 영어사용을 강요하는 것일 터.
눈만 뜨면 유혹하고 부추기는 헤살꾼들 놀음에, 나도 한글을 업신여기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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