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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IC입구 사거리에서 42번 수인사업도로 아래를 지나 골프장과 맞닿은 부곡동에 이르러, 안산부곡공원으로 나아가면 한편에 자리한 묘역을 볼 수 있습니다.

 

콘크리트 담벼락과 철문으로 둘러싸인 묘의 주인은, 조선시대 선조의 후궁이었던 정빈 홍씨의 소생인 정정옹주의 것입니다. 왕자의 적자는 대군(大君)이라 부르고 서자의 경우는 군(君), 왕의 적녀(嫡女)의 경우 공주(公主), 서녀(庶女)는 옹주(翁主)라 합니다.

 

 

해주행궁에서 선조의 아홉 번째 딸로 태어난 뒤 선조 37년(1604)에 정정옹주에 봉해졌으며, 광해군 2년(1610)에 진안위 유적과 결혼했습니다. 광해군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증살하고 인목대비마저 폐모하려 하자 진안위와 함께 반대했으며, 인조반정 후 이를 인정받아 진안위는 통헌대부에 추증되고 정종옹주도 두터운 예로 대우받았습니다.

 

아참 선조의 첫 번째 왕후였던 의인왕후 박씨는 자식이 없었고, 후공 공빈 김씨가 낳은 두 아들이 바로 임해군과 광해군으로, 훗날 인목왕후 김씨에게서는 영창대군과 정명공주를 얻습니다. 당시 서자였던 광해군은 대군이 될 수 없었지만 적자 소생이 없었고, 임진왜란이란 혼란 속에서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정정옹주는 어릴 때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성장함에 따라 단정하고 스스로 예법을 배워 실천했고, 혼란 속에서 출가한 후에는 연로한 시모를 극진하게 봉양해 그 행실이 한결같이 공손했다 합니다.

 

묘는 진안위 유적과 합장했으며, 묘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 그리고 좌우에 동자석-문인석 등이 각기 배치되어 있습니다. 유적은 유시행의 아들인데 아버지 유시행은 태천현감, 홍문관 교리를 지냈고 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기도 했습니다.

 

유적은 정정옹주와 결혼하면서 선조의 부마(駙馬)가 되었는데, 후사가 없어 시동생 유영의 아들 유명전을 양자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유명전도 문과에 급제한 지 2년 만에 요절하고 이후 2년 만에 옹주도 타계해 현종은 정사를 폐하고 장례 비용을 후사했고 스스로 빈소에 나아가 진안위 묘에 합장하도록 했다 합니다.

 

그 뒤 안산의 유수한 명문가로 알려진 유씨 집안은 정정옹주 대로부터 안산에 세거하게 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뉴스와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정정옹주묘#안산#부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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