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을은 축제의 계절이다. 전국 곳곳에서 단풍놀이가 흥겹게 벌어지고 있고 야구장에서는 함성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지만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기도 하다. 그래서인가. 서점에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 둘러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는 것 같다. 이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단연 한국소설이다. 가히 풍년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읽을 만한 소설들이 많이 나왔다.
반갑게도 그 책들은 외국소설에 비해 책 가격이 싸다. 온라인 서점에서 혜택 받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웬만한 책이 아직까지도 '만원의 행복'을 누리게 해주고 있다.
이상문학상 수상작가들의 화려한 귀환
한국 문단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평가받는 이상문학상, 그 상을 수상한 작가들의 작품이 가을의 한국소설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가장 최근에 작품을 선보인 이는 김훈. <남한산성> <칼의 노래> <강산무진>으로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는 그가 장편소설 <공무도하>를 선보인 것이다.
<공무도하>는 '문정수'라는 기자를 주인공으로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이 시대를 그리고 있다. 문정수는 취재력이 뛰어나다. 그가 취재하려 하면 어떤 것이든 실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공무원 비리, 장기 밀매 등의 문제들이 그렇다. 그런데 문정수는 쓰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인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상,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비루하고 더럽고 치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왜 쓰지 않는 것인가.
<공무도하>는 기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진실한 주인공은 '삶'이다. 짓밟히면서도 다시 일어나서 걸으려 하는 사람들의 삶이 주인공인데, 소설은 그것의 다른 이름도 알려주고 있다. 희망이다. 이 지리멸렬한 세상에서도, 끈덕지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희망이라 일컫는 것이다. 덕분에 <공무도하>는 서점 한곳에서 희망을 만지게 해준다.
권지예와 김연수는 소설집으로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권지예는 <퍼즐>을 통해 어떤 문제의식을 던진다. 소설의 주인공은 집을 나간 여성들이다. 90년대 이후 여성들은 집을 나갔다. 길을 떠난 것이다. 그랬던 그녀들이 근래에 돌아왔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집'으로 왔다. 하지만 권지예의 소설 속 여성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가 되어 돌아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퍼즐> 속의 그녀들은 지금 길을 잃었다. 사랑이라는 욕망 때문에 집을 나갔지만, 그것이 이내 시들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길을 잃었거나, 막상 떠나갔지만 이제는 뭘 해야 할지 몰라 길을 잃었다. 권지예의 <퍼즐>은 그러한 여성들의 모습과 생각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다. 생각할 여지를 주는 소설이다.
반면에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위로의 말을 건넨다. 소설 속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잃었다. 상실이다. 그들은 그 상실의 고통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무언가를 하려 하면 더 아프다. 그들의 마음은 커다란 구멍을 뚫린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기회가 생긴다. 그처럼 아파하는, 상실의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만나며 치유하는 것이다. 외로움이 외로움을 치유한다고 했던가.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가슴 속 시린 곳에 바람을 불어넣어준다. '세계의 끝'을 함께 다녀온 것처럼 황홀한 것이다.
순수 문학의 즐거움 누리게 해주는 문학상 수상작
문학상 수상작들도 한국소설을 풍성하게 만든다. 눈에 띄는 작품은 <2009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과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인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다. 황순원문학상의 주인공은 박민규다. 그의 소설 '근처'의 주인공은 비참하다. 결혼도 못할 만큼 바쁘게 살았다가 갑작스럽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듣게 됐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할까? 그는 어린 시절에 살던 시골로 내려온다.
시골에 온 그는 친구들을 만난다. '근처'에 있던 친구들은 그가 성공했다며 기분 좋게 축하해준다. 그런 자리 '근처'에서 그는 잠시 행복해하기도 한다. 그는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묻었던 타임캡슐을 찾기도 한다. 그것을 묻었던 '근처'에서 그는 다시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웃기도 한다.
그는 행복했던 그 시절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던 것일까? 박민규의 소설은 장난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애틋하게, 그러면서도 코끝 찡하게 삶의 의미를 묻고 있다. 소설의 완성도가 높아서 그런가. 소설 '근처'에 머문 여운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장은진의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는 3년 동안 모텔을 전전하며 편지를 쓰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모텔을 돌아다니며 편지를 쓴다.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주소를 물어 편지를 보낸다. 그는 답장을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답장을 주면 여행을 멈출 작정이다. 하지만 답장 보내는 이가 아무도 없다. 그래서 그는 외롭다. 외로워서 또 편지를 쓴다. 그의 여행은 언제쯤이면 끝날 것인가.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는 상징적인 소설이다.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내도 소통할 수 있는 세상에서 '편지'라는, 대단히 아날로그적인 도구로 사람과 소통하려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인가. 소설의 여운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사회가 '첨단'이 되더라도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사람의 정을 갈망하게 만들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재밌거나, 역설적이거나, 감동적이거나
문학상이 아닐지라도 한국소설을 풍성하게 만드는 작품들은 많다. <달을 먹다>의 김진규의 신작 장편소설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은 소심한 남편 공생원의 이상야릇한 추리를 담아내고 있다. 공생원은 임신을 시킬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마나님의 배는 볼록해졌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인가? 범인을 추리하는 공생원의 소심한 모습이 김진규의 문장을 만나 읽는 재미를 쏠쏠하게 만들어준다.
요즘 주목받는 김숨의 성장소설 <나의 아름다운 죄인들>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어린 아이를 통해 역설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의 이름은 동화. 할머니 집에 맡겨진 동화, 그는 하루아침에 천덕꾸러기가 된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들을 견뎌내는, 그로 인해 세상의 죄인들까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는데 그 모습은 가슴 한곳을 아련하게 만들고 있다.
김이설의 장편소설 <나쁜 피>도 마찬가지. '가족' 때문에 한평생 고통 받으며 자라야 했던 어느 여자가 새로운 가정을 만들며 세상을 향해 당당해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가슴 속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카타르시스라고 해야 할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은 어떤 사람의 모습은, 감동으로 힘을 주는 것이다.
그 외에도 한국소설은 다양한 소설들의 등장으로 풍성해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오고 있을 것이다. 덕분에 독서의 계절은 더 시끌벅적해지며 다채로워지며, 더 재밌어지고 있다. 만원이면 충분한데 무엇을 고민할까.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 이때에 독서의 즐거움을 가슴 한가득 품어보자. 기대 이상으로, 그것은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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