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미국 우주선 바이킹 2호가 화성에 착륙했고, 양정모 선수가 대한민국 국기를 달고 첫 금메달을 땄으며,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겐 훨씬 중요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바로 만화가 내 안에 들어온 해다. 비로소 나는 좁디좁은 동네를 벗어나 시공간을 초월해 지구와 우주를 날아다닐 힘을 얻은 것이다.
그 해 나는 <로보트 태권 V>와 <철인 캉타우>를 만났다. 당시 TBC에선 <날아라 태극호>(원제 타임보칸)가 인기를 끌면서 장난감이 인기를 끌었다. 나 또한 태극호 장난감을 샀다 잃어버리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는지 모르겠다.
마음을 '붕' 뜨게 만들던 만화(와 애니메이션)가 한 편으론 슬프게도 만들었다. 1978년 TBC에서 방영된 <우주소년 짱가>(원제 : 아스트로 강가) 때문이었다. 짱가가 악당과 함께 자폭하고 주인공 소년을 지구로 홀로 보낼 때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그날 한동안 TV 앞에 멍하니 있었던 기억이 난다.
기쁨, 슬픔, 희망, 분노, 좌절, 공포와 같은 느낌들을 좀 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만화 덕분이었다.
매달 20일경이면 <소년중앙>을 맞이하러 문방구에 가다1980년엔 잡지만화에 발을 담갔다. 초등학교 2학년에 <소년중앙>이라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매달 20일경이 되면 문방구 앞에 달려가 가장 먼저 <소년중앙>을 샀다. 이따금씩 <어깨동무>나 <새소년>도 보면서. 혹시나 나왔을지 모른다며 밤 9시에 서점으로 가는 아이 때문에 부모님이 살짝 걱정도 하셨더랬다.
타이거마스크, 로봇찌빠, 이겨라 벤, 요철발명왕, 20세기기사단 등을 보면서 때론 하늘을 날고 때론 바닷속 깊이 들어갔다. 공룡이 나오는 먼 과거로 갔고, 레이저광선이 난무하는 미래로도 떠났다.
그랬던 시절 우산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서 뛰어내리는 연습을 하는가 하면 배를 모으기 위해 우유곽을 모았다. 발뒤꿈치를 세 번 부딪치면 울트라맨으로 변신하는 비밀을 깨달았으나 결코 해보진 못했다.
내가 본 만화엔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청난 힘을 얻고 싶기도 했으나 한편으론 다시 돌아올 것을 걱정하는 소년이었다.
<마루치아라치>와 <로보트 태권 V>를 보면서 태권도학원에 등록했고, 공상과학만화를 보면서 로봇을 만드는 꿈을 꾸었다. 초등학교 시절 꿈은 그래서 과학자였다.
고등학생 시절 3년 동안 만화암흑기(?)를 거친 뒤 대학에 들어가자 만화세계로 복귀했다. 그 뒤에도 만화책 파는 곳만 있으면 기웃거린 결과 책장 두 개를 만화책으로 채우게 됐다. 그렇게 만화와 함께 나이를 먹었다.
코주부, 고바우, 구영탄, 오혜성... 만화 캐릭터를 통해 한국 사회를 보다<내 인생의 만화책>(부제 : 캐릭터로 읽는 20세기 한국만화사)은 해방 이후 한국만화를 수놓았던 유명 캐릭터를 다룬 책이다.
60년 넘는 기간 동안 한국만화사를 수놓았던 캐릭터 중에서 고르고 골랐으니 저자도 꽤 골치가 아팠을 듯 싶다.
그 결과 책에 실린 캐릭터가 28개.
주먹대장(김원빈), 꺼벙이(길창덕), 요철이(윤승운), 독고탁(이상무), 강가딘(김삼)은 만화잡지로 만난 주인공들이다. 독고탁이 S자로 휘어지는 공을 던질 무렵, 똑같은 자세로 공을 던지는 연습을 하기도 했고, 요철이를 따라 한다며 발명에 나서기도 했다.
구영탄(고행석), 최강타(박봉성), 오혜성(이현세)은 만화방에서 만났다.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한 동안 만화방을 들락거릴 때 이들이 선보인 괴력에 얼마나 감탄했던지. 만화방 생활을 청산한 뒤엔 둘리(김수정), 독대(이두호)와 만났다.
코주부(김용환), 고바우(김성환)는 해방 직후 나왔지만 오랫동안 활동했기 때문에 낯익다.
만화책 속에 파묻힌 이들 캐릭터들은 이야기를 통해 생명을 얻는다. 독자에게 공감을 얻은 캐릭터들은 이제 이 세상에서 살아 숨쉬는 생명인 셈이다. 둘리에게 주민등록번호(830422)가 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독자들은 만화에 몰입하면서 거기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감정이입되거나 또 그 캐릭터를 통해서 현실에서 실현하지 못했거나 충족시킬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해 대리만족을 얻게 된다. 그래서 그 캐릭터의 매력에 한껏 도취되고 나아가 그 캐릭터를 만든 작가는 물론 그 작가의 작품들에 대해서도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22p)이 책이 지닌 장점은 시대순으로 정리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 시대 정서와 문화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13세에 일본 제일고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학을 거쳐 프랑스 파리대학을 수석 졸업"한 땡이는 1960년대 우리가 꾸었던 꿈을 보여준다. 수영장까지 갖춰진 대저택이 3000만원이라는 <꺼벙이>(길창덕)에선 1970년대와 지금 주택 가격을 비교해볼 수 있다.
1990년 <변금련 뎐>이 게재된 <스포츠 서울>에 일부 독자들이 게재 중지를 요청하며 이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는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한 사례에선 오랜 불매운동 역사와 만화가 지닌 위력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캐릭터 소개 뿐만 아니라 2장 정도 분량으로 만화가 나온다. 이들 맛보기 장면을 보고 난 뒤에 해당 만화를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기 힘들었다. 이처럼 유혹하는 장면들이 책엔 가득하다.
저자는 황민호다. 1991년 <소년챔프> 창간에 참여한 뒤 <소년챔프> <월간챔프> <영챔프> <투엔티세븐> <주니어챔프> 편집장을 지냈다. 1996년부터 명지대학교 문화예술과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대원씨아이(주) 편집인이다. 이 만한 경력을 쌓은 만화인이 몇 명이나 될까 싶다.
그런 경력이 책에 대한 믿음을 주지만 편집실수로 보이는 반복장면이나 몇몇 오타는 눈에 거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