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요즘엔 뭘 배우고 있어?""많지. 월요일엔 댄스 스포츠, 화요일엔 영어회화랑 에어로빅, 수요일은 아침에 노래 교실 가고 오후엔 봉사활동 가고, 목요일엔 중국어 배우고, 금요일엔 에어로빅이랑 장구.""헉! 엄마, 안 힘들어? 게다가 화요일엔 점심 먹는 시간도 없네.""화요일에는 시간이 없어서 점심을 굶어. 그래서 아침을 늦게 먹고 가.""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밥까지 굶고 다녀? 그럼 목요일 오후 스케줄은 왜 비워두셨어? 여기도 다 채우시지.""아, 그거. 원래 그 시간에 일본어 배우려고 했는데, 벌써 7과까지 진도를 나갔다고 하잖아. 그래서 할 수 없이 못 한 거야. 내년에는 꼭 할 거야. 난 할 수만 있으면, 수영, 일본어, 탁구, 자전거 다 배우고 싶어.""하이고… 그러시면 주말은 왜 비우셨나?""에이, 주부 경력 40년인데, 주말에는 집안 살림도 해줘야지. 등산도 갈 수 있으면 가고, 친구들 애들 결혼하면 예식장도 가야 되고. 아참, 그건 그렇고 넌 대체 언제 시집갈 거야? 친구들이 우리집 애들은 언제 국수 먹여줄 거냐고 만날 물어본다. 만날!""엄마! 여기서 그만!"
장구, 에어로빅, 컴퓨터... 48시간도 모자란 우리 엄마평생 장사를 하시던 부모님은 몇 년 전 하시던 가게를 팔고 생업에서 은퇴하셨다. 아주 오래 힘들게 일하셨기 때문에 두 분께서 편하게 쉬시게 된 것은 기뻤지만, 주변에서는 많이 걱정을 했다. 갑자기 일거리가 없어지면 어르신들이 무료해 하시고 힘드실 수 있다고.
장사를 하던 시절 엄마는 항상 입버릇처럼, 시간만 있으면 뭐든 배우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가게를 하던 시절에도 바쁜 시간을 쪼개어 에어로빅과 컴퓨터를 배우러 다니셨다. 은퇴를 준비하시며 이제는 뭐든 하루 종일 배우러 다닐 수 있다고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았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은퇴 후 엄마는 가게를 하던 시절보다 훨씬 더 바빠지셨다. 에어로빅과 컴퓨터에서 댄스 스포츠, 고전 무용, 장구로 배우는 과목을 야금야금 늘리셨기 때문이다.
"저번 주에 루틴 10개를 배웠고, 오늘은 루틴 4개를 배웠어. 그런데, 할머니들이 그걸 다 잊어버리고 왔더라. 그런데, 엄마는 다 기억하고 있거든. 제일 잘 외운다고 선생님이 칭찬하셨어." 엄마의 자랑이 이어졌다. 난 효녀라서, "당연하지 똑똑한 우리 엄만데!"하고 장단을 맞춰드렸다. 어느 날엔가는 고전 무용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이 살풀이 공연을 하신다며 함께 배우시는 다른 아주머니들과 국립극장으로 관람하러 가기도 하셨다. 때때로 집에서 악보를 펴고 장구채로 연습을 하는 엄마의 모습도 가끔 볼 수 있었다.
엄마의 화려한 날들과 아빠의 훌륭한 외조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엄마에게 새로운 친구 분들이 생겼다. 고전 무용반에서 만나 지금은 아주 친해지신 '고전 아줌마', 컴퓨터 교실에서 만난 'ㅂㅅㅈ 아줌마'(이 분은 성함을 직접 부르셔서 다른 별명이 없으시다. 그래서 한글 이니셜로 처리했다), '청주 아줌마' 같은 아주머니들이 그 분들이시다.
한 분은 자식들 다 키우고 난 후 삶이 참 우울했는데, 고전 무용을 배우고, 이렇게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다보니 많이 밝아지셨다고 한다. 다른 분도 우리 엄마와 함께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니 사는 게 재미있어졌다고 한다. 아주머니 사총사는 자주 어울리시며 함께 영화도 보시고, 가끔은 호프집에서 맥주도 함께 하신다. 그러면서 갑자기 우리 아빠가 노년기의 가장 이상적인 남편이 되셨다.
엄마와 함께 장사를 하던 시절 우리 아빠는 그냥 평범한 남편이었다. 가게를 그만둘 때쯤, 은퇴 후에는 남자들이 더 심심해하고, 가족들을 힘들게도 한다며 엄마도 은근히 걱정했었다. 하지만 아빠는 모두의 우려를 기우로 만드셨다. 컴맹 상태에서 주민센터 컴퓨터 교실을 다니기 시작했고, 이후 몇 년 동안 모든 컴퓨터 강좌를 듣고 또 듣고 하시더니 요즘에는 그곳에서 '윈도우', '인터넷', '한글 2007' 강의를 하기 시작하셨다.
은퇴 후엔 집에만 있으면서 자꾸 참견을 해 마누라를 귀찮게 하는 남편들도 많고, 컴퓨터 배우러 가라고 권해도 안 가시는 분들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아빠는 아침에 나가서 건전하게 강의하다가 저녁 때 들어오시고, 알아서 식사도 챙겨 드시며, 설거지도 해 놓으시는 등 엄마의 자유로운 외부활동을 전혀 방해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이상적인 남편이 되셨다고 한다. 엄마의 화려한 날들 뒤에는 이렇게 아빠의 조용한 외조(?)도 큰 힘이 되었다.
예순 넘은 우리 엄마, 반짝이 옷 입고 훨훨 날다
처음에는 배우기만 할 뿐 무대에는 서지 않겠다고 하시더니, 엄마도 공연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반짝이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에어로빅 대회도 나가시고, 한복을 입고 전모를 쓴 채 구민의 날 행사 축하 공연 무대에도 서셨다.
"야, 육십도 넘은 우리들이 반짝이 달고, 민소매에 목 뒤로 묶는 옷을 입고 나가니까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더라. 거기에 참가한 사람들 중에 우리 옷이 제일 화려하고 멋있는 거 있지."엄마의 공연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니 의상이 참 멋(?)있고 과감(!)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이런 공연이 아니면 엄마랑 다른 아주머니들이 이런 옷을 입어보실 기회가 있을까? 사람들의 환호성과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에 서 볼 기회가 있을까? 그 후 내가 입지 않고 가지고만 있던 무대용 의상들이 엄마의 옷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옛날에는 너무하다며 입어보지도 않으시던 옷이었다.
"야, 생전 안 오더니 구민의 날 행사 공연에 네 아빠가 다 왔더라."딴 집들은 엄마가 공연하면 아들, 딸, 며느리까지 다 와서 사진 찍어주고 꽃다발도 주는데, 우리집은 무뚝뚝한 아빠와 열심히 일하는 아들*딸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단 한 번도 엄마의 공연을 가서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빠가 모처럼 가서 보신 모양이었다.
"아빠가 뭐래? 잘 했다고, 우리 마누라 멋있다고 그래?""잘 했다고 하기는! '지 혼자 틀리더구만' 그러더라. 옆 사람이 틀려서 내가 할 수 없이 맞춰 준건데, 꼭 그렇게 말을 해요." "요즘이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야, 정말 행복해"
몇 달 전에는 엄마의 학습에 도움을 드리고자 전자사전을 하나 사드렸다. 처음 며칠은 뭐가 안 된다 뭐가 안 된다 전화를 하시더니, 이제는 매뉴얼도 보고 전자사전 회사에 전화도 해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시며 잘 쓰고 계신다. 엄마는 그 전자사전으로 영어, 중국어의 모르는 단어도 찾아보시고, 중국어 CD 속 음성 파일을 mp3로 변환해서 전자사전에 담아두고 듣기 연습을 하신다. 물론 엄마는 나중에 일본어도 배울 예정이시므로 일본어 사전 기능도 갖춘 것으로 골랐다.
환갑을 훌쩍 넘기신 연세에도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엄마의 열정과 용기가 놀랍다. 하지만 동시에 엄마에게 이런 열정과 용기를 준 것은 엄마가 배우고 있는 이 프로그램들이 아닐까 싶다. 평생 돈 벌고 가족들 챙기느라 바쁘기만 하셨는데, 이제는 댄스 스포츠로, 고전 무용으로, 에어로빅으로 살아 숨 쉬는 자신을 느끼며 살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맘만 먹으면 뭐든 배울 게 널려 있는데, 집에 쪼그리고 앉아서 우울증 걸리고 그런 사람은 정말 이해가 안 돼. 이 좋은 세상에 조금만 움직이면 배울 거, 할 것이 얼마나 많아. 난 요즘이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야. 정말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