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억새물결 희미해질 때면 단풍 곱게 번져간다. 지금은 산산이 단풍 최절정이다. 온 산하를 울긋불긋 오색단풍 물들여놓고 마음 붉게 타오르는 산 꾼들을 산으로 모은다. 산마다 불쏘시개로 불 지펴놓았을까. 북에서 남으로 불을 지핀 듯 타내려와 온 산하를 붉게 물들이면 가을은 절정, 곧 겨울의 문턱으로 들어서리라.
고운 단풍은 10월 중순에서 10월말까지 최절정을 이루고, 늦으면 11월 초까지 산산이 불을 지펴 가다가 식은 재처럼 낙엽으로 뒹굴 것이다. 단풍으로 붉게 타는 가을, 산으로 든다. 산에 당도하기도 전, 산으로 첫발을 내딛기도 전, 마음은 어느새 '오매, 단풍 들겠네'.
얼음골 사과 맛, 얼음처럼 차고 달다
이번 산행은 영남알프스 중에 하나인 재약산(1108m)이다. 목적지에 당도하는 길은 여러 갈래 길이 있다. 얼음골에서, 배내골에서, 배내재에서, 혹은 가지산에서 능동산에서 가는 길도 있고 밀양 표충사로 해서 이르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이번엔 밀양표충사에서 재약산으로 간다.
양산에서 언양까지 국도를 타고 가다가 언양읍을 통과하고, 언양에서 밀양까지 이르는 국도에 이르니 산을 뚫은 긴 터널을 지나고, 터널을 벗어나자 곧 밀양이다. 여기서 높은 산을 깎아 만든 고갯길을 넘노라면 높은 경사길이라 제법 험준한 길이지만 길은 잘 나 있다. 밀양 얼음골을 지나면서 길가에서 파는 얼음골 사과를 좀 샀다.
오늘 아침에 땄다는 얼음골사과는 어떤 사과 맛보다 당도가 높은 것 같다. 얼음처럼 차고 시원한 사과를 깨물며 사과밭 가득 붉게 익은 사과를 홀린 듯 바라보며 달린다. 아침 밥 짓는 것일까. 지붕 위로 피어오르는 굴뚝의 하얀 연기는 시골 운치를 더한다. 표충사에 도착하니 오전 9시 35분이다. 표충사 경내에는 많은 차들과 등산객들이 와 있다.
표충사에서 재약산 가는 길은 여러 갈래 길이 있지만 오늘은 옥류동천 계곡 길을 따라 재약산으로 간다. 오른쪽으로 든다. 계곡 길 따라 산보하듯 걷는 길, 바람은 차고 상쾌한 데다 낙엽 뒹구는 소리, 단풍 든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서걱거리는 소리, 청량한 계곡 물소리와 어우러져 좋다.
옥류동천 계곡길에, 흑룡폭포, 층층폭포
오솔길 걷다가 계곡을 가로질러 건넌다. 점점 고도가 높아지는 바윗길, 흙 섞인 돌투성이 높은 경사길이다. 갈수록 고도는 높아지고 길은 좁고 험하다. 옥류동천 계곡 길은 깊은 계곡 물소리 들으며 가는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길은 좁고 험준하다. 자칫 잘못하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것 같은 험로다.
깊은 계곡 아래로 뿌리내린 거대한 수직 벽, 바위산을 옆에 끼고 간다. 바람소리, 높은 암벽을 타고 내리는 폭포소리까지 깊은 계곡에도 높은 산에도 타는 듯한 단풍 곱게 물든 풍경에 압도되어 오르고 또 오른다.
기암절벽을 타고 떨어지는 흑룡폭포 옆을 지난다. 고도는 점점 더 높아진다. 두 갈래길, 이정표가 없다. 오른쪽 길은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일까. 이정표가 없는 갈림길에서 높은 경사길 왼쪽으로 접어든다. 잠시 계곡과 더 멀어진 것 같다. 계속되는 험로다. 작은 출렁다리 하나 건너고, 다시 경사 길로 이어진다.
험한 경사길이 계속되니 체력이 많이 소모되어 힘이 빠진다.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소리, 우리 앞서 올라가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다리에 쥐가 나서 올라가지 못하고 아예 좁은 바위 길에 누워버렸고, 옆에서 한 사람이 다리를 주무르고 있고 옆에 동행자들이 서 있다. 여기까지 오는 길만 해도 꽤 힘든 길인데다 산행에 단련이 되지 않은 사람들에겐 무리일 수 있을 것 같다.
층층폭포에 당도한다. 여기까지 힘겹게 땀 흘리며 올라와 만난 층층폭포는 심한 갈증을 채워주는 시원한 생수처럼 반갑다. 고도 높은 험로를 따라 올라온 길에 만난 폭포, 아무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이대로 앉아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듣노라면 시간의 흐름도 잡념도 잊겠다.
여름이면 층층폭포 물소리는 장쾌하게 온 산과 계곡을 뒤흔들겠다. 지금은 물이 말라 높은 직벽을 타고 떨어지는 물이 속삭이듯 한다. 층층폭포에서 표충사는 3.2km, 재약산은 2km 남았다. 끝도 없어라. 이제 좀 쉬고 나니 다시 오를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층층폭포에서 쉬어 오르는 길은 높은 나무계단이다. 길 끝에 갈림길이 나온다.
하늘아래 첫 학교 고사리분교터
작전도로다. 이곳 작전도로에서 고사리분교까지는 500m쯤의 거리다. 재약산 정상은 눈앞에 저 멀리 조망되건만 까마득히 높아 보인다. 눈길 닿는 곳마다 곱게 단풍들어 가을도 절정, 단풍도 절정이다. 상쾌한 바람 속, 단풍 곱게 든 길을 걷는다. 사자평원이 시작되는 지점 한쪽에 있는 고사리분교 터에 이른다.
고사리분교가 있었던 빈 터에는 수령이 오래 된 단풍나무가 불이라도 난 듯 유독 붉디 붉게 물들어 있어 눈길을 끈다. 붉게 타오르는 듯한 단풍나무 옆이 바로 고사리분교가 있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풀만 무성하고, 그 앞에는 운동장이었던 아담한 공터가 있다. 아이들이 뛰어놀았을 하늘 아래 첫 학교 고사리분교는 이젠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운동장 앞 한쪽에 교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 학교는 1966년 4월 29일 개교해서 졸업생 36명을 배출하고 1996년 3월 1일에 폐교되었다고 한다. 30년 동안 매년 한 명씩 졸업생을 배출한 셈이다. 한때는 사람 사는 몇 가구가 있어 민박을 받으며 식사를 팔곤 했다는데 모두 철거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해발 850m 언저리에 위치한 하늘 아래 첫 학교 고사리분교 자취만 남아 있다. 표충사에서 옥류동천 계곡을 끼고 이곳 사자평원에 이른 것만 해도 웬만한 산하나 등정하는 것과 같은데 여기서 바라보는 재약산 정상은 까마득히 멀어 보인다. 넓디 넓은 사자평원에서 재약산 정상까지는 새로 시작하는 것 같다.
고사리분교 터를 지나 진불암 갈림길에서 재약산 쪽으로 또 다시 계속 오르막길이다. 원래 나무계단길이 있었던 것 같진 않은데, 재약산 가는 길에 나무계단길이 한참을 이어진다. 숨을 헉헉대며 한 발 한 발씩 정상으로 내딛다보니 나무계단 끝나는 곳에 조망바위가 있다. 조망바위에 앉아서 사자평원과 저 멀리 이어지는 곱게 물든 산을 바라보며 앉아 쉰다.
가을 절정, 단풍도 최절정
재약산 정상도 좋지만 이대로라도 좋을 것 같다. 단풍은 그야말로 최절정이다. 사자평원은 '사자가 뛰어놀 만한 평원'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해발 800m 지점인 8부 능선에 있는 125만평(400만km2)에 이르는 거대한 사자평원은 규모면에서 순위를 다투는 간월, 신불억새평원보다 2배나 크다고 한다.
지금은 잡목과 소나무 등을 식재해 억새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억새평원으로서의 옛 명성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지만 곱게 단풍이 들었다. 사자평원 넓디 넓은 곳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시야가 넓어진다. 휴식 후 이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재약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단풍든 나무들 사이 억새꽃 너울댄다. 바로 위엔 재약산 정상이다.
드디어 우뚝 솟은 재약산 정상이다. 참 많은 사람들이 단풍소식 듣고 왔다. 재약산은 원래 천황산 사자봉을 최고봉으로 하고 재약산은 수미봉으로 불렀지만 일제 때 재약산을 천황산이라 하였고, 지금도 등산객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부르고 쓰고 있다. 지형도나 옛 등산지도에는 재약산(수미봉 1108m)과 천황산(사자봉 1189m)이 따로 표기되어 있다.
우리이름 되찾기 일환으로 밀양시에서는 천황산 사자봉을 재약산 주봉으로 부르고, 이에 따라 한국의 산하에서는 지도상의 천황산(사자봉)을 재약산으로, 이전의 재약산을 수미봉으로 표시한다. 김형수 저 <한국 400 산행기>에도 재약산(천황산)은 현재 재약산 정상표시석이 서 있는 수미봉을 수미봉(1108m)이라 이름하고 있다.
우리 이름 찾기 일환으로 재약산 최고봉을 사자봉이라 하고 현 재약산을 수미봉이라 한다면 혼란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도 정상표시석을 새로 하는 것이 혼란을 없애는 길이겠는데, 아직 그대로 천황산, 재약산이라 표시하고 있어 다소 혼란스럽다.
취서산을 영축산으로 바꿔 부르면서 정상표시석을 영축산이라 표시하였고 산을 찾는 사람들이 또한 영축산으로 부르고 있듯이 혼란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표시석을 새로 하는 것이 옳은 듯하다. 현재 천황산 재약산 두 개의 산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이 두 산을 연계 산행하는 게 대부분이다.
혼돈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천황산 정상석을 재약산 최고봉인 사자봉으로, 현 재약산 표시석을 수미봉으로 바꾸는 것이 옳은 것 같다. 단풍든 산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정상석 앞에 섰다가 햇살 좋은 바위에 앉았다. 눈에, 마음에 하나하나 담아 가려는 듯 그렇게 오래오래 앉아 있다. 재약산에서 천황재로 가는 길은 바위를 넘나들며 더듬더듬 힘들게 간다.
얼마쯤 가다 보면 억새능선이 펼쳐진다. 어느덧 은빛 억새물결 출렁이던 억새바다는 그 빛을 많이 잃어 희미해지고 있지만, 여긴 그런 대로 아직 억새물결 여운이 길다. 천황재로 이어지는 나무계단 길 양 옆으로 억새물결 바람에 나부낀다. 우리 천황재에서 천황산으로 가지 않고 곧장 천내원암 방향으로 내려간다.
이젠 무리한 산행보다는 더 오래 느끼고 더 오래 숨쉬는 산행을 즐기려 한다. 하산하는 길은 돌 섞인 흙투성이 길인데다 급경사다. 내리막길이라고 우습게 보다간 큰 코 다친다. 어쩌면 하산 길은 더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영남알프스 산군은 어디에서 접근하든 쉽지 않다는 것을 또 한번 실감한다. 진불암 갈림길이다. 여기서 천황 재까지는 3.1km, 표충사까지는 1.2km 남았다. 전에 없던 시멘트 길이 깔려 있어 하루 온종일 시달린 발바닥이 더 아파 절뚝거리듯 걷는다. 내원암 지나 표충사 경내로 들어선다. 표충사에서 올려다보는 재약산은 조망이 탁월하다.
지금은 10월의 절정, 가을도 절정, 단풍도 최절정이다. 만산홍엽을 이룬 산들, 눈길 닿는 곳마다 단풍이 불을 댕긴 듯 타오르고 있다. 예서제서 옮겨 붙었을까. 산산이 꽃불 같은 단풍 불꽃 지펴놓았다. 바야흐로 가을도 절정, 가을의 끝자락이 보인다.
산행수첩 |
1. 일시: 2009년 10월 24일(토). 맑음
2. 산행기점: 밀양 표충사
3. 산행시간: 6시간 55분
4. 진행: 표충사(9:35)-층층폭포(11:25)-작전도로(11:50)-고사리분교 터(12:05)-나무데크 끝 조망바위(1:00)-재약산 정상(1:30)-점심식사 후 출발(2:10)-천황재(2:40)-진불암갈림길(4:05)-내원암(4:15)-표충사(4:30)
5. 특징
①표충사 입장료: 3,000원, 주차료 2,000원(소형)
②층층폭포-작전도로:5분거리
③고사리분교터 옆: 재약산 정상 등산로에 약수터 있음.
④천황재-표충사: 급경사
⑤나무계단 끝 조망바위: 사자평원 조망 뛰어남
⑥출발: 양산-언양-밀양 표충사/돌아오는 길: 밀양표충사-밀양댐-배내골-원동-양산
♥주의: 가을산행엔 기온차가 심하기 때문에 장갑, 모자, 여벌옷 등은 필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