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물들어가고 있다. 지리산 피아골에도 붉은 단풍이 물들었다고 한다. 시골들녘은 마지막 황금물결이 출렁거린다. 풍년이다. 사방을 들러보아도 고객숙인 벼이삭, 배부른 비둘기 한 무리가 전깃줄에 앉아 포만감을 달래고 있다. 농부는 녀석들의 작태가 얄밉겠지만 허수아비를 만들어 논두렁 곳곳에 세워가면서 녀석들을 매몰차게 쫒을 만큼 마음이 성급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딱새 노래 소리가 힘차게 들린다. 녀석은 빨갛게 익은 감나무 주위를 맴돌며 노래를 부른다. 새색시 볼처럼 붉어 터질 것 같은 홍시에 욕심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녀석이 홍시 먹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찬 서리 맞아 당도가 오를 대로 오른 홍시를 차지하는 것은 주로 직박구리 녀석이었다.
가을 하늘은 청명하다. 코끝에서 느껴지는 냄새가 깨끗하다. 밤샘 야근에 흐리멍덩한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다. 분명 나를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남자들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 텃밭 귀퉁이에 자리 잡은 노란 가을꽃이 눈부시게 화사하다. 노란 꽃잎이나 크기는 분명 루두베키아 꽃 같은데 무더운 7~8월에 핀 루두베키아는 아니다.
"돼지감자 꽃이다."
궁금해 하는 필자의 모습을 보자 아버지는 "돼지감자 꽃"이라고 한다. 성숙한 숙녀처럼 예쁜 꽃에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돼지감자 꽃이라는데 어떠하랴, 청명한 가을날에 정말 잘 어울리는 꽃인데. 표범나비는 돼지감자 꽃술에 푹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다.
시골의 아침은 재잘거리는 참새소리에 활기를 더한다. 처마 밑을 왔다 갔다 하면서 떠들어대는 녀석들의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흥이 절로 난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점점 더 붉어지는 홍시는 깊어가는 가을을 이야기하고 황금들녘 가을걷이를 하는 아낙의 손길이 바쁘다.
들녘을 가로질러 배추밭으로 가는 길. 물수제비를 뜨듯 한 쌍의 잠자리 행동이 이채롭다. 두 마리가 한 몸이 되어 물기를 머금고 있는 촉촉한 바닥에 일정한 리듬으로 몸을 부닥친다. 사랑의 몸짓임에 틀림없다.
몸집 가꾸기를 시작한 가을배추잠자리의 마지막 가을 사랑의 몸부림은 결렬해지고 무더위가 채 가시기도 전인 8월 말경에 널따란 논에 심어놓은 김장용 배추는 몸집이 통통 불어났다.
농부는 배추의 속살을 채우기 위해 배추몸통 묶을 줄을 자르고 있다. 가는 줄로 묶어 놓은 김장용 배추는 이발을 한 것처럼 단정하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자유롭게 자라났지만 이제부터는 농부가 바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자세다.
"알차라고."
"알이 차요?"
"알이, 커져야 되지."
"이 살짝기 묶어나야지 이 알이 차면 배추가 커지지."
가는 줄로 배추 몸을 감싸 묶으려 하자 손바닥과 손목이 따갑다. 피부는 어느새 붉은 반점이 생겼다. 찬바람에 딱딱해진 배춧잎 가시가 거세게 반항을 한다. 가을배추를 묶는 할머니의 손놀림이 익숙하다.
자유분방하게 자란 배추 잎을 가는 줄로 묶어주어야 한다고 한다. 김장용 배추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제는 외모보다 속살을 채워야 한다고 한다. 찬바람이 성성하게 불어오는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필자의 속살을 채우기 위한 끈을 묶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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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집 가꾸기를 시작한 가을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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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도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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