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 앞을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궁금해 했다. 왜 저 집 마당에는 돌탑이 수백 개나 될까. 왜 그 집 할아버지(노승정, 80세)는 항상 부지런히 꽃을 가꾸고, 시간만 나면 돌탑을 쌓을까.
드디어 사람들의 궁금증을 안고 지난 5일, 그 집을 찾았다. 마당에 돌탑이 많다는 외관 못지않게 거실도 특이하다. 거실엔 잘 차려진 제단이 있다. 그렇다면 무속인의 집? 하지만 이런 선입견을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17세에 출가해서 20세에 주지승이 되다집 안팎의 외형만큼이나 그가 풀어 놓은 인생 스토리는 더욱 기막히다. 14~16세 때 살생의 아픔을 고민하다가 17세에 충남 마곡사에 출가한 것은 그의 기막힌 사연의 서곡. 법명은 '법천'스님. 당시 마곡사 승려들 사이엔 "마곡사에 천재가 들어 왔구먼"이라고 입소문이 돌 지경.
그런 소문을 입증이라도 하듯 20세에 충남 보령군에 위치한 중대사에 주지승으로 발령받은 것. 사람들은 그를 일러 '아기 주지스님'이라고 불렀다. 그가 간 중대사는 오래된 절로서 국보급이었다. 하지만 관리가 되지 않아 대웅전과 다른 전들이 다 쓰러져가고 있었다. 법천 스님에게 떨어진 사명은 그 절을 중수하는 것.
그는 먼저 보령군수와 경찰서장을 만나 '절 중수'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대대적으로 나무를 베어 숯을 만들어 팔아 절 중수 자금을 마련하는 일도 시작했다. 그 일로 인해서 도청으로부터 제재를 당하는 등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의 결연한 의지로 그 일을 일구어 나갔다. 비록 완공은 보지 못했지만, 3년의 주지승 생활을 남김없이 불태우며 절을 중수했다.
승려 생활에 환멸 느껴 승복을 벗다중대사를 나온 그에게 떨어진 사명은 충남 신원사 주지가 되는 일이었다. 승려들만 해도 400여 명이나 되는 큰 사찰에 23세의 주지승이 발령받는 일. 입후보들 중에 가장 많은 표를 받은 법천 스님은 갑자기 불꽃같은 선언을 한다. 절의 권력을 두고 승려들끼리 서로 다투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더욱 그 마음을 굳혔던 것.
"더 이상 내 양심으로는 승려로 살아갈 수 없다. 부처님의 이름으로 중생들이 바친 시주와 불전으로 살아가는 승려로는 더 이상 살지 않겠다. 땀 흘려 일하고 살겠다."그러고는 신원사 주지를 고사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승복을 벗었다. 승려들 사이에선 소위 잘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떨쳐 버렸다. 속세에서 절로 출가하더니, 이젠 절에서 속세로 출가한 꼴이다.
그는 승려 생활을 접고 난 후 그 스스로 땀을 흘려 소득을 벌기 위해 일선 직업 전선에 나섰다. 처음엔 경찰(경찰을 감찰하는 감찰)로도, 화원을 통해 꽃장사로도, 꽃다발을 만들어 파는 일 등을 하며 열심히 살았다.
돌탑은 돌단, 꽃밭은 화단"불당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지. 승복을 입고 수련한다고 해서 불도가 아니지. 불당이 아니라 개천이라도 마음이 있는 그 곳이 곳 불당이며, 승복을 안 입어도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곳 불도인 것을"이런 평소 주관은 팔순이 된 지금, 안성 시골집 거실에 '천제당'을 만들게 했다. 새벽 1~2시면 '천제당(거실)'에서 하늘을 향해 절을 한다. 하루 3번 향불을 피운다. 이 '천제당'은 물론 신도를 모으거나 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마음수련 장소라고.
이쯤 되니 돌탑과 꽃밭을 만드는 이유를 말해야겠다. 돌 하나 쌓을 때마다 마음을 쌓는 마음이라고. 꽃 하나 가꿀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가꾸는 마음이다. 그에겐 돌탑은 하늘을 향해 절을 하는 '돌단'이고, 꽃밭은 하늘을 향해 제사를 지내는 '화단'인 셈이다. 다른 이들의 선입견처럼 보기 좋으라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니란다.
그는 사람들에게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늘이 사람에게 내려 준 복(운명)은 불공을 드린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 것이여. 그것도 모르고 잘 되게 해달라며 절에 가서 열심히 불공드리고 시주하고 불전을 드리는 것은 헛된 짓이란 말여. 모두 승려들 먹여 살리는 짓이여. 허허허허"
이렇게 과감한 비판을 쏟아 놓지만, 그의 외모는 이웃 할아버지가 '딱'이다. 평소 시골집에서 돌을 쌓고, 꽃을 가꾸며 도를 닦은 결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