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인과의 대화 도중 "숙대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보고대회 한다던데"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얼마 전 고려대의 희망콘서트라든지, 6월 연대에서 성공회대로 옮겨간 노대통령 추모 콘서트라든지, 대학 내에서 치러지는 각종 진보단체 행사가 당국의 불허 방침으로 표류하는 상황을 보아온 터라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숙대에 2년째 다니고 있는 재학생으로서, 친일인명사전 발간보고대회 같은 건 보수적인 숙대 본부에서 허용해줄 만한 행사가 아닌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언론을 통해 확인해보니 아니나다를까, 일방적인 대관취소로 파장이 일고 있더군요. 보수단체는 반대집회를 한다 하고, 민족문제연구소는 예정대로 행사를 추진하겠다 하구요. 학교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살고 있는 자취생이기에, 궁금한 마음에 나가 봤습니다. 낮 12시부터 웬지 시끌벅적한 듯 했습니다.
행사가 예정됐던 장소인 아트센터가 있는 제2창학 캠퍼스 앞에는 평소에 보지 못한 보안요원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차량 진입을 막기 위해서인지 화분도 죽 늘어놓았네요. 평소에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다닐 때는 보지 못한 모습들입니다.
이미 한바탕 접전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반민특위 현수막을 들고 계신 분들이 행사 장소가 효창공원 내 백범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알리고 있었습니다.
백범기념관이라는 말에 무릎을 쳤습니다. 아, 백범기념관이 있었지! 어쩌면 숙명여대 아트센터보다 애초에 백범기념관에서 행사가 치러지는 것이 더 적절했을 지도 모르겠네요. 역시 시민은 위대하다는 괜한 울컥함을 느끼면서 백범기념관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학교 뒤편의 언덕을 오르면 효창공원이 나오고 길을 따라 죽 내려가면 효창운동장이 있습니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어 올라가야 백범기념관입니다. 짧은 여정의 대로변에는 온갖 취재 차량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입학한 이래, 학교에 이렇게 많은 취재진이 몰리는 건 처음 봤습니다.
시청앞에서나 보고 광화문에서나 보던 전경 버스도 여러 대 서 있더군요.
행사장은 인파로 가득했습니다. 아침까지 오던 비가 그쳐 조금 흐리지만 야외행사를 진행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형 펼침막은 친일인명사전 발간 보고대회가 열리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의 발언이 끝날 때마다 시민들은 박수를 연발합니다.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참 '다행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행사가 무사히 개최되어서 다행이고, 우리 학교 근처에 백범김구기념관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비가 그쳐 다행이고 큰 사고는 없는 듯해 다행입니다.
작년 촛불 당시, '숙대' 깃발을 들고 광화문에 나가면 꼭 '아륀지 총장'에 대한 지적을 받곤 했습니다. 일개 학생으로서, 학교 당국이 워낙 보수적이고 강경한지라 무력한 기분만 들었지요. 6월 노대통령 추모 콘서트 때, 이를 불허한 연세대도 역사의식이 없다고 지탄받았지요. 이번 경우는 당국의 불허는 아니고 관리업체의 대관취소라는 형태를 띠고 있어 그나마 비난이 덜한 모습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행사가 무산된다면 어디 가서 숙대생이라고 말하기 참 미안할 일이었지요. 아무리 우리 아빠가 사전 발간에 소액을 보탰어도 말입니다.
법적 공방과 보수단체의 반발, 장소 대관 취소까지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고 총3권으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 연구소에 축하를 보냅니다. 아니, 우리 민족과 역사의식 있는 시민 모두를 축하합니다. 축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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