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끝난 5일간의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정운찬 총리가 보여준 모습은 두 가지다.
국회 무시(無視), 정국 현안에 대한 무지(無智), 준비되지 않은 무비(無備) 등 '3무 총리'의 참모습을 보여준 게 첫째다. 두 번째는 임명된 지 불과 40일 만에 완벽한 MB맨으로 거듭났다는 점이다.
한나라당 출신 이윤성 국회 부의장 "이런 총리는 처음 봤다"정 총리가 국회에서 보여준 답변 태도는 여당의원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대정부질문 5일 동안 그는 "불성실하다"는 이유로 두 차례나 공개 경고를 받았다. 두 번 다 한나라당 소속 이윤성 국회부의장에게서 받은 경고다.
그는 대정부질문 첫날인 5일 자유선진당 박상돈 의원과 세종시 문제로 설전을 벌이다가 "장차관은 공부 좀 하시라"는 핀잔을 듣자 "그러면 국회에서 장관들 나오라고 하지 말고 실무국장들 불러라"고 비아냥거렸다.
정 총리의 답변을 들은 이 부의장은 "이런 총리는 처음 봤다"고 기막혀 했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오늘 아침부터 처음이라 그런 것이라고 넘어갔지만 답변 태도나 부실한 답변 내용, 국회를 경시하는 태도에 유감을 표한다"고 점잖게 경고했다. "(국무총리) 참모들은 뭐하냐"고 꼬집기도 했다.
하지만 정 총리의 태도는 나아지지 않았다. 대정부질문 세째날인 9일 정 총리는 이 부의장에게 또 한 차례 경고를 받아야 했다. 정 총리는 이날 한나라당 한선교 의원과 설전을 벌이다가 "학생 대하듯 질문하지 말라"고 대들었다.
발끈한 한 의원이 "의장이 경고해야 한다"고 요구하자 이 부의장은 "국민의 대표 앞에 답변할 때 신중을 기하라"고 거듭 주의를 줬다.
731부대 묻자 "항일독립군인가요?"... 뒤늦게 무마했지만 '망신살'정 총리는 자신의 전공인 경제분야 외에는 식견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압권은 '731부대' 발언이다. 대정부질문 둘째날인 6일 정 총리는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으로부터 "마루타가 뭐냐"는 질문을 받고 "대강 알고 있다"고 답했다. 이어 박 의원이 "731부대는 뭐냐"고 묻자 "항일독립군인가요?"라고 대답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뒤이어 그는 한나라당 김동성 의원 질문 시간에 "급히 답변하느라 문장을 마치지 못했다"며 "731부대는 일본이 항일독립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던 세균전을 위해서 운영했던 부대"라고 황급히 정정했다. 하지만 당일 국회회의록을 보면 정 총리는 "항일독립군인가요?"라고 박 의원에게 분명히 되묻고 있었다. 논란이 되자 황급히 무마하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정 총리는 또 세종시 문제로 설전을 벌이다가 슈뢰더 전 독일총리를 접견한 내용을 설명하며 "통일 독일도 본에서 베를린으로 행정부처를 옮겼다가 원상회복을 검토하고 있다"는 요지의 주장을 폈다. 하지만 여야 의원들이 "본과 베를린 사이 거리가 얼마인 줄 아느냐", "당시 독일 수도였던 본의 인구가 얼마냐"고 구체적으로 반박하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망신만 사야 했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이 남북정상회담 비밀접촉 여부를 캐물으며 "서울대 총장이라고 과잉 홍보된 총리의 답변이 실망스럽다"고 몰아붙이자 그는 "서울대 총장 했다고 남북정상회담까지 다 알아야 되냐"고 되받기도 했다.
밑천이 드러난 정 총리는 "경제학만 공부하고 인문학은 공부 안 했네"(민주당 김성곤 의원), "팩트 파인딩(fact finding, 사실 확인) 좀 하고 오시라"(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는 야당의원들의 비아냥도 감수해야 했다.
말문 막히면 장관 뒤에 숨기... 농식품부장관 부르려다 "장관 안 왔는데?" 핀잔준비되지 않은 총리의 모습도 여실히 보여줬다. 그는 의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말문이 막힐 때면 배석한 장관들 뒤에 숨기도 했다. 대정부질문 세째날 홍희덕 민주노동당 의원이 "국토해양부의 4대강 TV광고가 너무 과장됐다"고 비판하자 정 총리는 "환경부장관이나 국토해양부장관에게 대답을 넘겨도 괜찮겠느냐"고 어물쩍 넘어갔다.
전현희 민주당 의원이 신종플루와 관련된 대책을 추궁하자 정 총리 대신 전재희 보건복지부장관이 나서 "제가 답하겠다"며 장황하게 반박해 눈총을 사기도 했다. 황당한 표정의 전 의원이 "복지부장관을 부르지 않았다, 들어가라"고 여러 차례 주의를 줬지만 전 장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정부질문 마지막날인 11일에는 정 총리가 출석하지도 않은 농식품부장관을 부르려다가 핀잔만 들었다. 최규성 민주당 의원이 쌀값 관련 대책을 묻자 정 총리는 "저보다는 현장에 있는 분(농식품부장관)이 답하는 게 좋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농식품부장관은 오늘 안 왔다"고 핀잔을 주자 정 총리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대정부질문 준비는 여러 모로 부족했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철학'은 완벽하게 소화한 모습을 보였다. "이 대통령의 친서민, 중도실용론에 동의한다"고 적극 옹호한 정 총리는 특히 세종시 문제에 관해 여야 의원들의 공세를 육탄방어했다.
한나라당 이정현 "어디서 잘 먹고 잘살다가 정권 만들어 놓으니까 와서..."대정부질문 첫날 박병석 민주당 의원이 "금년 3월 이 대통령이 행복도시건설청을 방문해 '건설청장 안 바꾼 이유는 행복도시를 계획대로 만들려는 데 있다'고 말했는데 왜 말을 바꾸느냐"고 공격하자 그는 "그 계획이 원안대로라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어 자유선진당 박상돈 의원이 "'계획대로'와 '원안대로'의 차이가 뭐냐"고 따지자 그는 "'원안대로'라는 말이 좀 더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것 같다"는 말로 차이점을 부각시키려 애썼다. "세종시를 계획대로 하겠다고 했지만, 원안대로 하는 것은 아니다"는 '헌재식 궤변'이다.
정 총리는 스스로 '이명박 대통령의 심부름꾼'을 자처하기도 했다. 대정부질문 세째날 한나라당 이정현 의원이 '세종시 논란'을 촉발시킨 정 총리를 몰아붙이자 그는 "의원님은 국민의 대표지만, 저는 정부에서 심부름하는 사람들의 대표다"라는 다소 엉뚱한 대답을 내놨다.
정 총리의 이런 모습은 여야 의원들 모두의 빈축을 샀다. 김부겸 민주당 의원은 "총리가 되더니 어떤 공무원 출신보다 더 과잉 충성하는 듯하다"며 "보기에 민망스러울 정도"라고 꼬집었다. 이정현 의원은 정 총리를 향해 "어디서 잘 먹고 잘살다가 정권 만들어 놓으니까 와 가지고 이따위 소리(세종시 수정)나 하는 거냐"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