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거세게 부는 가을날, 자전거를 끌고 골목마실을 합니다. 오늘은 아무래도 날이 만만하지 않아 털장갑을 낍니다. 맨손으로 나오려고 했으나, 맨손으로 나왔다면 손이 꽁꽁 얼어붙을 만큼 바람이 거세었습니다. 동네를 한참 달리다 보니, 맨손으로 자전거 타는 중학생 둘이 보입니다. 건널목에서 마주보고 있는 두 아이를 보니 손이 시려운지 자꾸 비벼댑니다. 문득 제 어린 날을 돌아보니, 어릴 적 자전거를 타면서 장갑을 낀 일이 거의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집에서 어머니나 아버지가 '자전거를 탈 때 알맞춤한 장갑'을 마련해 준 일은 딱히 없었다고 느낍니다. 이 아이들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한테는 어떨까요. 자전거를 탈 때에는 여느 장갑은 너무 두툼해서 브레이크를 잡기에 썩 나쁜데, 자전거를 탈 때에 낄 알맞춤한 장갑을 헤아려 주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두 다리로 거닐며 골목마실을 할 때에는 멀리까지 다니지 못합니다. 날은 쌀쌀해도 자전거를 모는 오늘은 제법 멀리 다녀올 수 있습니다. 십정동에 가 볼까, 효성동에 가 볼까, 학익동이나 용현동까지 돌아볼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지난 여름에 살짝 지나치기만 하고 못 둘러본 박문여고 둘레 골목길을 먼저 가 보자고 생각합니다. 학교 앞은 아이들이 학교를 드나드는 여느 날 한결 그림이 잘 나온다 하겠지만, 토요일 낮 한갓질 때에 살며시 돌아보아도 괜찮다고 느낍니다. 오히려 사람 발길이 뜸할 때에 조용히 자전거를 몰거나 두 다리로 거닐 때 깊이 생각하고 바라볼 수 있어 좋기도 합니다.
박문여고 앞으로 가기 앞서 서림초등학교 둘레 골목을 돕니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온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가을햇살은 구름에 숨었다 나왔다를 되풀이합니다. 햇살이 드리울 때하고 햇살이 숨을 때하고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햇살이 숨어 있을 때에는 골고루 맑은 느낌이 좋습니다. 햇살이 고개를 내밀 때에는 밝고 어두움이 또렷하게 나뉘는 느낌이 좋습니다. 어느 쪽이 한결 낫거나 더욱 좋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두 가지 모습으로 나란히 찍어 봅니다.
그러고 보면, 여태 골목 사진을 찍을 때마다 느꼈는데, 가까이 다가서며 찍는 모습과 몇 걸음 떨어진 채 찍는 사진과 골목을 통째로 보여주는 사진 가운데 하나만 고르라 할 때에 못 고르겠습니다. 세 가지 모습이 모두 좋은걸요. 가까이에서 바라볼 때에는 이 모습이 이대로 좋습니다. 살짝 뒷걸음을 하며 이웃집에 등을 대고 사진 한 장 담으면 이 모습은 또 이대로 좋습니다. 길과 집이 훤히 드러나도록 찍으면 이 모습 또한 이대로 마음에 듭니다. 다섯손가락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손가락을 꼽을 수 없듯, 골목을 담은 사진을 나란히 놓고도 어느 사진을 넣고 빼고 하지 못합니다. 사람들한테 '골목길이란 이런 모습입니다' 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어느 한 장을 선뜻 골라서 내보이지 못합니다. 세 가지를 통째로 내보이면서 "저는 이번에는 석 장만 보여드리지만, 알고 보면 이 길 한 곳에서만도 수십 수백 가지 모습이 있어요. 오늘 하루는 석 장을 찍었지만 한 해 삼백예순닷새가 다 다른 모습이요 아침과 저녁과 낮과 새벽이 또 다른 모습이에요. 그래서, 누구나 마찬가지일 텐데,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는다 하면, 한 자리에서 스물네 시간을 잘게 나누어 스물넉 장을 담아도 대단히 싱그럽고 좋아요. 날이 맑거나 궂을 때, 햇살이 반짝이거나 살짝 기울 때, 구름이 잔뜩 끼거나 옅게 낄 때,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 소낙비가 퍼붓거나 가랑비가 흩뿌릴 때, 함박눈이 오거나 눈이 녹아 질펄거릴 때 …… 꼭 이 동네 할매 할배를 사진으로 넣거나 아이들 뛰노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야 골목 사진이 되지 않는답니다. 우리 스스로 골목사람들 삶을 내 삶으로 받아들이며 늘 다른 매무새를 늘 다르다고 깨닫고 껴안을 수 있으면, 바로 이곳 인천 남구 숭의3동 85번지 골목길 한켠에서도 수천 장이 넘는 "작품"이나 "예술"을 길어올릴 수 있어요. 이렇게 길어올린 작품이나 예술은 사진을 찍은 우리한테 아름다움을 선사할 뿐 아니라, 이 골목동네에서 뿌리내리며 여태까지 살아온 분들한테 반가운 선물이 될 수 있어요. 괜히 멋부리거나 꾸미려 하지 마셔요. 있는 그대로 골목을 품에 안아 보셔요. 그러면 골목마실을 하는 언제나 새로움과 기쁨이 넘실거립니다." 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골목동네를 둘러싸고 수십 층짜리 아파트가 우쑥우쑥 올라서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면서도 온갖 느낌이 들도록 '손장난'을 부릴 수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아파트숲이 내려다보이도록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느낀다면. 우람한 아파트가 포근하게 골목동네를 감싸듯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바라보았다면. 아파트와 지붕낮은 골목집이 사이좋게 어울리는 듯하게 찍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예술이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예술작품이란, 또 예술작품이란 멀디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삶이 예술입니다. 우리 삶이 저마다 다 다른 채 예술입니다. 남을 따라하거나 흉내내거나 시늉짓에 머문다면 예술이 아니며 삶조차 아닙니다. 내 결대로 내 발자국을 가꾸거나 여밀 때에 비로소 예술이 되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고스란히 담아낸다면 사진예술이요 그림예술이며 글예술이고 영화예술입니다.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는 나 스스로 이 골목이 누구한테 어떤 삶인지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또한, 나 스스로 골목사람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저는 골목동네에서 태어나고 골목동네에서 자랐으며 골목동네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 사진은 늘 '골목사람으로 부대끼고 지내는 모습'입니다. 저처럼 골목동네에서 나고 자라고 사는 분이라면 그 삶결대로 사진을 담으면 됩니다. 그러나, 골목동네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든지, 골목동네에서 태어났어도 아파트동네로 옮겨 가서 산다든지 한다면, 눈길을 잘 가다듬어야 해요. 왜냐하면 골목동네와 아파트동네는 삶 얼거리가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삶 흐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삶 매무새가 다르고 삶 발자취가 다릅니다. 이 다름을 꾸밈없이 헤아리면서 삭여야 합니다. 삭이지 않고 바삐바삐 삼키기만 하면 겉으로는 그럴싸하지만 속알맹이는 텅 빈 '작품'만 쏟아져요. "참 작품"이 아닌 "그럴싸한 작품"입니다.
부탁이라고 해야 할까, 사진찍기를 좋아하고 '출사'를 골목동네로 찾아오실 분들한테 여쭙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진찍기도 좋고 출사도 좋습니다. 다만, 골목동네로 사진찍기나 출사를 하러 오시기 앞서 '답사'를 먼저 와 주셔요. 답사를 오실 때에는 사진기는 가방에 집어넣거나 집에 놓고 나와 주셔요. 빈몸과 빈손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도 좋고 사뿐사뿐 걸어도 좋은데, 부디 맨몸과 맨손으로 골목동네를 온 가슴으로 느껴 주셔요. 이렇게 느끼고 받아들이는 하루를 보낸 다음에, 나중에 다시 사진기를 갖추고 찾아와 주셔요. 처음부터 사진장비를 들이밀지 말아 주셔요. 처음부터 사진장비를 들이밀면 '기계 손놀림'만 사진에 담기거든요. 처음부터 '이것 찍고 저것 찍어서 기록으로 남겨야지' 하는 마음이라면 속내를 헤아리지 못하거든요.
홀로 찬바람 맞으며 여러 시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자니 이 생각 저 생각이 갈마듭니다. 이 생각조각은 좋을 수 있고 얄궂을 수 있습니다. 그저, 어찌 되든 제가 품는 생각이며, 제가 골목마실을 하면서 받아들인 생각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박문여고 둘레 샛골목 마실입니다. 자전거는 골목 어귀에 세우고 샛골목을 거닙니다. 고무신을 신었기 때문에 발자국 소리는 거의 안 납니다. 시골에서 일할 때에 고무신을 처음 신었는데, 도시에 와서 골목동네에서 지낼 때에도 고무신은 더없이 좋습니다. 고요한 샛골목을 걸어다닐 때에 아뭇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무신 차림새는 저절로 골목길 한켠에 스며듭니다.
그나저나, 박문여고 둘레 아리따운 이 샛골목을 박문여고 아이들 가운데 몇이나 알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서림초등학교 둘레 샛골목을, 동산중고등학교 둘레 샛골목을, 그 학교 아이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초등학교는 어렵다 쳐도, 중고등학교쯤 되면 사진부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 학교 사진부 아이들은 저희 학교 둘레로 예쁘장한 샛골목이 가득가득 있음을 알고 있을는지요? 사진부를 이끄는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마실을 하고 있을는지요?
행정구역으로는 송림5동이면서 간판은 '천주교 도화동교회' 앞에 섭니다. 골목동네 여느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그리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꼭 알맞춤한 크기입니다. 개신교회도 이처럼 골목동네에 스며드는 꼭 알맞춤한 크기로만 예배당을 지으며 동네사람하고 하나될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배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이삼백 남짓밖에 안 되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로만 맞춘다면, 천 사람 넘게 드나들지 않도록 하는, 주차장도 몇 칸 놓지 않는, 그러면서 예배당 앞뜰에 꽃밭을 마련하고 텃밭도 일구는, 그런 조촐한 동네 예배당으로 문화를 바꾸어 가면 얼마나 좋으랴 싶습니다.
천주교 도화동교회 성모님 앞에 절을 한 번 하고 나오다가 도화2동 붉은벽돌 울타리에 갇혀 있는 나무전봇대를 봅니다. 저로서는 인천골목길에서 꼭 열 번째로 만난 나무전봇대입니다. 제법 한길 쪽인 자리이며, 10미터쯤 걸어나가면 큰길인데, 이 자리에 이런 나무전봇대가 우뚝 서 있습니다. 더욱이, 붉은벽돌 틈에 갇혀 있습니다.
한참 올려다보며 사진을 찍다가 싱긋 웃습니다. '그래, 너는 이렇게 붉은벽돌한테 갇히는 바람에 외려 오래오래 이 자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구나. 너는 이렇게 이 틈바구니에서 네 몸을 가누면서 이 동네 사람들한테뿐 아니라 이 도시 사람들한테 '예전에 우리 나무전봇대들이 이렇게 동네를 지켰다구요'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나무전봇대한테도 절을 한 번 합니다. 자전거 머리를 돌려 숭의3동을 구석구석 돌아보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찬바람을 너무 많이 쐬어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춥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