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덜컹거리는 바람소리도 없이 첫눈이 내렸다. 펑펑 쏟아지는 새벽길을 산책하는 기분은 11월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것 같다. 세상에 부산에 첫눈이 이렇게 일찍 온 적이 있었나? 나보다 산책을 데리고 나온 강아지가 더 좋아한다.
여기 저기서 창문이 열리고 "어머 진짜 눈이네 ?" "어머 눈이다. 눈" "언제부터 눈이 내렸지?" 내가 오늘(17일) 새벽 골목길을 나온 것은 5시. 그러니까 첫눈은 2-3시부터 쯤 내렸을 것이다. 아니 더 빨리 내렸을지도 모른다. 첫눈이 내린 시간보다 더 빨리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있었을까. 눈 위에 발자국들이 선명하다.
어느 시인의 말이 문득 생각난다. "눈은 모든 것을 청결히 표백한다. 눈과 얼음의 흰 색채. 그리고 차가운 감촉은 대지의 영혼을 침묵으로 얼게 한다. 겨울 대지는 한 해의 삶이 끝나고 다음 해의 삶을 기다리는 계절이다. 한 삶이 끝남으로서 다음 삶이 시작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 이런 계절은 흰눈이 차갑기보다는 오히려 포근하다." 정말 11월의 첫눈은 말할 수 없이 포근하다.
슬퍼 하지마세요
하얀 첫눈이 온다구요
그때 옛말은 아득하게
지워지고 없겠지요
함박눈이 온다구요
뚜렷했었던 발자욱도
모두 지워져 없잖아요
눈사람도 눈덩이도
아스라히 사라진 기억들
너무도 그리워 너무도 그리워
옛날 옛날 포근한추억이
고드름 녹이 듯 눈시울 적시네
슬퍼하지 말아요
하얀 첫눈이 온다구요
그리운사람올 것 같아
문을 열고 내다보네
아스라히 사라진 기억들
너무도 그리워 너무도 그리워
옛날 옛날 포근한 추억이
고드름 녹이 듯 눈시울 적시네
<첫눈이 온다구요> 중-'이정석' 노래
교회의 십자가 불빛은 더욱 거룩하게 빛나고, 사스레피 나무의 붉은 열매 위에 소복 쌓인 첫눈이 11월의 크리스마스인 듯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네온 불빛이 명멸하는 그림 속 같은 동네 골목길에 펑펑 한해의 마무리를 잘하라고 말하는 듯이 쏟아진다.
나는 내리는 눈발 속으로 천천히 첫눈을 의미하며 아무도 밟지 않는 눈위에 내 발자국을 찍는다. 새벽에 내리는 첫눈… 이게 얼마만인가. 아주 어린 시절 까만 석탄 쌓인 화물차 늘어선 역의 철조망을 뚫고 조개탄을 주우러 가던 그 흑백사진 같은 기억 속으로 나는 더 깊이 눈을 맞으며 걸어간다. 눈은 풍년의 상징, 내년은 이 풍성한 눈처럼 이 땅에 충만한 축복이 가득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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