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딸아이의 수능시험이 끝났습니다. 딸아이는 생각만큼, 아니 평소 실력만큼의 점수가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른 수험생들이 '잘 쳤다'고 하여 딸애의 어깨는 더 처집니다. 그러나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좋은 대학, 좋은 학과를 나와야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그에 맞게 대학을, 학과를 선택하면 됩니다. 그 곳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 뿐입니다. 우리 아이가 세상에 발을 들일 5년 후에는 학연 위주의 이 대한민국 사회에 균열이 가서 '실력 있는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이 될 것을 믿고 싶으니까요.
사랑하는 내 딸아!
기침이 많이 심한데, 힘들지? 수능을 친 그날부터 날씨는 더 쌀쌀해지고, <신종 플루>는 더욱 기승을 부려서 지금 콜록거리는 네 기침소리에 아버지의 가슴은 조여오고, 펄펄 열이 오르는 네 이마를 짚어보는 네 엄니의 한숨은 더 깊다. 그 동안 잠도 편히 자지 못했고, 짙은 스트레스에 네 건강을 상한 듯해 마음이 참으로 무겁다. 네 엄니는 더러 원하지 않는 잔소리를 하기도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안타까운 마음을 애써 접고 널 다그치기도 했다.
그런데도 가채점한 수능은 네 마음먹은 것보다 훨씬 못 미치고, 아버지의 권유로 넣은 수시도 합격전망이 그리 밝지는 못한 것 같구나! 수능을 마친 그날 너는 오랜만에 하는 외식인데도, 휴대폰을 사면서도 그리 밝은 얼굴을 보이지 못하더구나! 그도 그럴 것이다. 12년을 공부한 결과가 단 하루에 결정이 되고 마는 현 입시제도가 아버지는 무척 안타깝고 원망스럽다.
내신으로 갈 수 있는 수시입학도 있고, 대학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신입생을 선발해서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하지만 수능을 단 한 번, 그것도 하루에 끝장을 보는 이 제도가 아버지는 영 마뜩찮다. 주관하는 곳에서는 비용도 많이 들고 관리에 어려운 점도 있다고 하겠지만 수능시험을 일 년에 네 번 아니 두 번이라도 나누어서 실시하고, 시험과목도 나누어서 이틀 동안 치른다면 정말 어려운 일일까? 수능과목이라도 필요한 최소한으로 줄여서 너희들의 부담을 덜어 주는 것은 도저히 안 되는 것일까?
수능일! 너는 그날 네 엄니가 가방에 넣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네 엄니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너는 고맙게도 그걸 가방에 넣고 가더구나. 그래, 그건 너의 배냇저고리다. 아버지는 네 엄니가 그걸 왜 네 가방에 넣었는지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 장만한 배냇저고리는 아버지와 엄니의 마음을 무척이나 푸근하게 했고,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수험생 부모는 같은 마음이겠지만 아버지는 그날 종일을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네가 예정일을 한참이나 넘겨 네 엄니의 살갗을 후비고 나와 간호사의 손에 들려 처음으로 아버지와 만나던 가슴 떨리던 그 때 그 순간, 네 엄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눈을 뜨고는 먼저 너의 안부를 물었다. 네가 뿔, 뿔 기다가 우리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너는 국그릇을 손으로 엎었고 네 여린 살갗이 벌겋게 부풀어 오르면서 벗겨졌을 때, 네 엄니도 아파하면서 울었단다.
어디 그 뿐이겠느냐? 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에 네 엄니와 나는 따라 웃었고, '세상은 요지경'을 부르는 네 맑은 노래에 우리 부부는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네가 울 때 같이 울었고, 네가 속상해 할 때 가슴을 쥐어뜯었다. 세상의 부모란 모름지기 그래야 하는 것처럼 부족한 만큼 그대로 전부를 네게 주었다. 어찌 네가 부모의 마음을 알랴? 그래, 몇 해가 지나고 너도 한 아이의 엄마가 되면 그 때는 네 엄니의 웃음을 알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면 네 엄니의 한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바쁜 직장 일을 미루고 하루 휴가를 내었다. 새벽 여섯 시! 밤새 억지 잠을 자느라 개운하지 못한 너를 깨워서 밥 한술 뜨게 하고, 네 엄니는 정갈하게 점심밥도 쌌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고사장에 너를 모셔다주고 아버지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솔직하게 말하면 '너는 부담된다. 집에 들어가시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교문 어귀에서 너를 향해 서서 네게 마음을 보태고 싶었단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더구나.
그 날 아침에 네 동생은 밤새 너무 어지럽고 구토가 났는데도 누나가 신경을 쓸까봐 '아프다'는 말을 차마 못했다고 하더구나. 아버지는 네 동생을 태우고 병원에 갔는데, 의사선생님은 '귀 안쪽에 이석이 생겨서 그렇다'고 하더구나. 네 동생의 치료를 지켜보면서도 아버지는 '제발 떨지 않고, 실력대로 시험을 치르게 해 주십시오.' 마음 속으로 하느님께도, 부처님께도, 돌아가신 네 할아버지께도 정말 간절히 빌었단다.
저녁 다섯 시! 아버지가 도착한 고사장에는 이미 많은 부모님들이 와 계시더구나. 급한 마음 때문인지 타고온 차들을 도로에 아무렇게나 주차시켜 버스가 지나가지 못해 빵빵거리고, 바람까지 쌩쌩 불어 잔뜩 조바심이 난 마음을 더욱 조이게 하더구나. 다섯 시에 '나갈게요'란 문자를 보고 아버지는 네게 '고생했다. 넌 이제 자유인이다!'고 문자도 보내었는데 무엇이 확인할 것이 그리도 많은지 …….
여섯 시! 드디어 너를 만났고 우리는 얼싸 안았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너는 지금 가장 어려운 시기를 넘기고 있다. 평소 실력대로 시험을 잘 치른 사람은 허탈하고 그동안 보낸 시간이 허망해서, 노력한 것보다 시험을 잘 치르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실망스러워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마시지 못하는 술을 마시고, 또래와 어울려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하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과연 초조함이나 괴로움이 사라질까?
차라리 편안한 마음으로 그 동안 읽지 못한 책도 읽어보고, 친구들과 어울려 영화도 보고, 또 훌쩍 기차여행이라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실컷 못 잤던 잠도 사나흘 자 보고, 맛있는 음식을 배가 터지도록 먹어보는 것은 어떨까? 아버지는 우리 딸이 심각한 얼굴로 방바닥에 배를 붙이고 초조하게 지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시간이 네게는 비록 더디고 힘들지 모르지만 이 시간이 지나면 가슴에 짙은 추억의 시간이 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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