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티가스'라는 단어는 필리핀에서 크게 두 가지를 뜻한다. 하나는 '마카티'에 이어 제2의 경제중심지로 성장하고 있는 수도 '메트로 마닐라'의 중심지 중 하나라는 것, 둘은 필리핀에서 영향력 있으면서도 부를 유지하고 있는 가문의 이름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런 올티가스는 메트로 마닐라와 따이따이시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이 근처에는 필리핀 최대라고 일컬어지는 '라구나 호수'가 자리잡고 있으며, 호수 주변으론 수많은 도시들이 자리잡고 있다. '다마얀'은 라구나 호수 주변에 위치한 따이따이시에 속한 마을이다. 450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이곳은 '빈민지역'이라 불린다.
해 질 녘, 호수 어귀에선 멀리 보이는 올티가스의 빌딩 숲이 저녁놀과 어울려 흐릿하게 보이곤 한다. 카메라 앵글에 그것을 담으려 고군분투하고 있는 내게 마을 주민인 프리오씨가 다가와 말했다.
"저렇게 멋있는 도시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건지, 자넨 알아?"빈민은 되는 것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다만얀에 20년째 뿌리 내리고 살고 있는 벨리아씨. 다마얀 홍수피해 주민조직(Damanyan Floodway Homeowners Association)의 대표로 10년 넘게 일해온 그녀는 예전에 라구나 호수의 모습을 회상할 때마다 온화한 미소를 품곤했다.
"우리 딸 아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라구나 호수는 정말 깨끗했어요. 그냥 물을 마셔도 상관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때는 호수 근처에서 사람들이 농사도 짓고, 지금처럼 다른 직업을 구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죠. 덕분에 항상 힘들긴 했지만 아이들 모두 대학문턱까진 보낼 수 있었거든요."벨리아씨 남편이 새로운 꿈을 품고 두바이로 해외이주노동을 떠날 때에도 그녀는 이곳에 남아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냈다. 이곳을 떠나선 잘 살아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라구나 호수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오염되기 시작했다. 호수 주변에는 수많은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20여개 강 지류로 이루어진 호수는 오염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호수와 가까운 고지대 안티폴로 지역에서 흘러오는 시커먼 물의 빛깔은 호수의 암담한 미래를 알려주는 조그마한 단서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호수는 전 지구적인 기후 변화 문제와 퇴적층의 급증으로 가뭄과 홍수를 십수년 째 되풀이하기 시작했고, 당장 어민들의 생존권이 위협되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부터 이 곳에서 어부 일을 했던 깐시오 씨는 그 억울함을 호소할 때가 없었다.
"물이 말랐을 때는 배가 갈라진 땅 위에 있고, 물이 차 넘칠 때는 집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곤 했습니다. 20여종이 넘게 잡히던 물고기들은 이제 손가락에 꼽힐 정도밖에 남지 않았군요. 일부 어부들은 이도저도 안되니 전기를 이용해 고기를 잡기 시작했지만, 대다수 어부들은 울며겨자먹기로 생태계 전체를 파괴하는 일이니 그런 일을 하면 안된다고 설득했죠. 한 번은 호수의 가뭄이 오래간 적이 있는데, 중앙정부에서 그곳에 공항을 지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우리 귀로 들려왔습니다. 억울하더군요. 정말 억울했어요."깐시오씨가 내게 말을 건네는 동안 메트로 마닐라에서 이 곳까지 생선을 사러 왔던 몇 몇 고객들은 그냥 돌아가야만 했다. 통발에 잡힌 조그마한 고기라도 달라고 고객들이 말하자 "얘를 살려줘야 큰 생선도 잡아먹을 수 있지, 이 사람들아"라며 깐시오씨는 미련없이 고기를 호수로 떠나보냈다.
나머지 주민들 역시 지쳐있었다. 10월 한달 동안만 '켓사나', '파르마', '미리내' 등 살인적인 태풍들이 연이어 통과하면서 4500가구 중 1500가구가 잠겨있는 지금은 특별한 상황이라 치부한다 치더라도, 호수가 변화를 겪으면서 그들의 집은 잠겼다 물이 빠졌다를 수 차례 반복했다. 뗏목을 타고 들어가야 겨우 닿을 수 있는 집을 뒤로하고, 교회에 마련된 피난센터에 아이 셋과 지내고 있는 루디씨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한 번 집에 물이 찼다가 빠지면, 모든 물건을 다 말려야 하고 집에 딸려들어온 쓰레기 같은 것들을 치워야 하죠. 그것도 한 번이지 몇 번씩 그걸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1년 내내 홍수로부터 피했다가, 다시 집에 들어가서 정리했다가, 다시 피하는 일이 반복되요. 이런 상황에서 정상적인 삶을 유지한다는 건 정말이지 어려워요. 내 남편이야 트라이시클 운전이라도 하니까 이렇게 피난센터에서 살아도 굶을 걱정은 안한다고 치지만, 노인들이나 사정이 안좋은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어요(한숨). 지난 번 태풍 미리내가 왔을 때, 사람들이 울면서 고지대로 도망칠 때는 정말이지 힘들더군요. 옆 집에 사는 세 살 먹은 아이는 그 때 하늘나라로 갔답니다."그렇게 그들은 빈민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바보같아서 항상 웃고 있는 것 아닙니다"
육십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열정적인 마을 주민 헤르나르도씨는 얼마 전 인터넷 신문에 달려있는 한 댓글을 읽었다.
"태풍 피해가 나서 집도 잃고, 가족도 잃고, 어떻게 살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고 있는건지. 바보같이."방우스(라구나 호수에 사는 생선)에 맥주를 한 잔 마시며 "필리핀 사람들이든 외국 사람들이든 가끔은 궁금할거야"라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 동네 이야기를 쭉 들어서 알겠지만, 우린 참 억울해. 돈 없고 힘 없는게 죄지. 여하튼 지금 상황이라는게 절망적이잖아. 그럼 매일 얼굴 찌푸리고 고민 한다고 좋은 세상이 오는 건 아니라고. 얼굴에 미소를 머금는 순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때, 사진을 찍으면서 환호성을 지를 때, 그 때 만큼은 그걸 잊는거야. 바보같아서 항상 웃는게 아니라 그러면 기운도 조금 생기는 것 같고 활기도 돌아서 그러는거라구."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한 번은 장례식장에 간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기타를 치며 흥겨운 노래를 부르더라구요. 한국만 해도 그런 모습은 보기 힘들거든요.""문화가 다른 거잖아. 미국이나 일본이 그랬으면 그걸 하나의 문화라고 불렀겠지. 우리가 그러면 그저 한심하고 게으른 빈민들이 이젠 반쯤 미쳤다고 생각하는거지. 그건 정말 착각이라고. 자넨 그걸 꼭 알아야돼"그는 그렇게 이방인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마을 어귀에서는 구호물자를 실은 조그마한 트럭이 경적을 요란하게 울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에겐 소박한 꿈이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단란하게 살 수 있는 집 한채와 이웃들과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는 여유로움, 그리고 아이들을 대학까지 공부시켜주는 것. 그 정도가 그들이 바라는 것이었다. 예전엔 할 수 있을것만 같던 그런 일들이 지금은 할 수 없을것만 같은 일로 바뀌어버렸다. 항상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환경이 모두 바뀌어버린 지금 그들에게 남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그들을 쉽게 부른다. '빈민'이라고.
'다마얀' 마을은 어떤 곳? |
다마얀(Damayan)은 필리핀 최대 호수인 라구나 호수 근처에 4500여 가구가 모여사는 마을이다. 다마얀은 호수 및 도시와 가까운 탓에 직업을 구하기 쉽고 먹을 것이 풍족했던 곳이었다. 그러던 다마얀은 지난 십수년간 가뭄과 홍수를 번갈아가면서 겪었고 개발과 환경오염의 폐해를 몸소 겪으면서 도시빈민지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