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여름, 남미 여행을 다녀온 지 일주일 만에 새 직장에 들어간 첫날, 나는 한 NGO를 통해 나의 첫아들을 만나게 되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아이를 후원하게 된 동기는 약간 불순했다. 남아메리카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나는 지도를 꺼내 다음 여행지를 골랐다. 그때 내가 사인펜으로 동그라미를 크게 그린 대륙은 '아프리카'였다.
목표는 2년 뒤. 지금처럼 두세 달의 시간을 위해 얼마든지 회사를 때려치울 수 있는 용기, 서른이 되어도 마흔이 되어도 월급에 연연해하지 않고 원하는 일에 매달릴 수 있는 용기를 잃지 말자고 선택한 일이었다. 아프리카에 후원하는 아이가 있으면, 그 아들을 보기 위해서라도 언젠가 그곳을 발 디딜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당시 나는 스물여덟 살이었고, 한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일에 파묻혀 지낼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조금씩 소위 '안정된 생활'에 익숙해지고, 나이가 들면 쉽게 내 꿈을 저버릴까봐 무서웠다.
약간은 불순한 시작, 그렇게 첫 아들을 만났다
후원신청을 하고 얼마 뒤, 회사로 아이의 간략한 신상정보서류와 사진이 날아왔다. 카만가 쿰부라우. 아프리카에서도 지독히 가난한 작은 나라 말라위에 사는 네 살짜리(지금은 여섯 살) 남자아이였다.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카만가의 커다란 눈망울이 너무 귀여워, 나는 퇴근하자마자 아이에게 편지를 썼다(영어가 달려서 한글로 쓰고, NGO 단체 자원봉사자에게 번역을 맡겼다). 아이는 물론 아이의 가족들조차도 이 편지를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문맹률이 높은 나라이다) 아무튼 정성스럽게 편지를 썼고, 나와 내 가족의 사진과 알록달록 스티커 그리고 아이가 좋아한다는 장난감 고무공을 넣어 첫 편지를 부쳤다.
얼마 뒤, 아이를 케어하고 있는 NGO 직원에게서 편지가 왔다. 아이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며, 편지를 받고 매우 좋아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아직 글을 쓸 줄을 몰라 그림을 보낸다는 내용도 함께 있었는데, 편지지 옆에 삐뚤빼뚤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그 동그라미가 너무 귀여워서 한동안 나는 지갑에 그 편지를 넣고 다니곤 했다. 그 뒤로도 간헐적으로 편지가 오가고, 카만가의 그림 솜씨도 늘어갔다. 나는 애초에 가졌던 불순한 동기를 깊이 반성했고, 아프리카에 대한 열망은 차츰 양아들을 보러 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어갔다.
내 아들 카만은 못만났지만, 다시 또 얻은 둘째 아들
목표했던 2년, 거짓말처럼 기회가 찾아왔다. 나이만큼이나 무거웠던 현실 앞에 쉽게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고 갈까말까를 망설이던 내게 두 달간의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돌아와서는 몇 배로 더 열심히 일해야 할지도 몰랐지만, 그런 부담감은 주어진 '아프리카' 여행에 걸림돌이 될 만큼 크지 않았다.
<아프리카>라고 굵은 매직으로 써놨던 적금통장을 깨고, 두 달간의 시간을 좀 더 알차게 보내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던 그 준비 기간조차도 내겐 이미 즐거운 여행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여행 막바지 일정에 '말라위'를 집어넣으면서 내 아들 카만가를 보러간다는 그 꿈같은 일 때문에 한동안 잠을 설칠 정도였다.
말라위에 있는 구호단체와 소통이 잘 되지 않아 결국 정확한 날짜를 잡지 못한 채 아프리카 케냐에 먼저 도착했다. 전기도 인터넷도 되지 않는 곳에서 계속적으로 연락을 할 수 없었고, 탄자니아에 도착해서야 오라는 확답을 받을 수 있었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그리고 교통상황이 너무나 열악한 데다 우리가 도착하기 며칠 전 아프리카를 여행하던 한국인 여행객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주위에서 말라위로 가려는 나를 만류하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마음이 무거워 선택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결국 카만가를 품에 안을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다시 케냐로 넘어가 고아원 아이들에게로 돌아갔다.
평균 이하의 수입으로 기적을 만들 수 있어요
다시 고아원에 돌아간 뒤, 카만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커지면서 둘째 아들을 입양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결코, 네버, 돈을 잘 버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수입을 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입고 싶은 옷 한 벌, 먹고 싶은 음식 하나, 갖고 싶은 물건 하나씩만 아낀다면, 아프리카에 있는 아이 하나가 밥을 먹고, 옷을 하나 사며, 학교를 다닐 수 있는 놀라운 기적이 생기는 것이다. 그건 나와 아이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고아원 원장님과 상담한 끝에, 조셉 누엔이라는 아이를 선택하기로 했다.
누엔은 케냐가 아닌 수단 아이다. 내전이 잦은 수단에서 전쟁에 참전했던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재혼을 하면서 마나, 토머스, 누엔 그리고 어린 찬 이렇게 네 형제가 케냐에 있는 이 고아원에 오게 되었다. 케냐 사람들과는 다르게 정직하고 올바른 수단 아이들은 이곳에서 사랑을 받으며 잘 지내고 있다.
나는 누엔이 좋았지만, 누엔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케냐와 작별하는 날을 며칠 앞두고 살짝 누엔에게 가서 물어보았다.
"누엔, 네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가고, 대학교를 갈 때까지, 내가 널 후원하고 싶어. 나에게 엄마가 될 기회를 줄래?"누엔은 깜짝 놀라며 반색했지만, 이내 표정을 거둬들이고는 잠시 생각한 뒤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니콜, 음…. 토머스(누엔의 형)는 어때요?"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마음이 따뜻해지며 이 아이를 내 둘째 아이로 입양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배움의 기회, 소유의 기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곳에, 그래도 먼저 형에게 기회를 양보한다는 생각을 한 누엔은 이미 내게 최고의 선물이 된 것이다.
다시 아프리카로... 계좌를 트다
헤어지던 날, 누엔을 꼭 껴안으며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게 고아원 아버지 말을 잘 듣고 지금처럼 모든 일에 성실할 것을 당부했다. 고작 한 달에 3만원을 후원하면서 엄마 노릇을 하려고 하는 모습이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몇 만원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가 있음을 나는 안다.
정말 이 아이가 대학교를 가고 어엿한 성인이 되어 취직을 하고, 그 돈으로 또 누군가를 도울 줄 아는 멋진 사람으로 자랄 때까지 인연의 끈을 놓지 않는 것. 끝까지 응원해주는 것. 그리고 기도해주는 것.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다시 낡은 지도를 펼쳐놓고 굵은 매직으로 다음 번에 내가 가고 싶은 나라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곳은, 다시 아프리카. 이제 그 어떤 곳도 가지 않아도 될 만큼 내 마음에 깊이 들어온 검은 땅 아프리카였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 만에 다시 새 직장에 들어갔고, 첫 월급날 나는 적금 통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사인펜으로 통장 커버에 이렇게 썼다. <다시, 아프리카>. 그땐 누엔과 미처 만나지 못했던 나의 첫아들 카만가와도 만날 수 있기를.
한국에도 가난한 아이들이 많은데 왜 하필 해외 아동? |
한국에도 같이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이모 역할을 해주고 있는 스무 명의 아이들이 있긴 하다. 나 혼자 만나는 것은 아니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만나고 있다. 이 아이들에게는 물질적인 후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관심으로 후원한다.
이렇듯 한국에는 재밌으면서도 보람되는 여러 형태의 후원 방법이 엄청나게 많다. 하지만 열악한 타국은 다르다. '나눔' 혹은 '후원'의 개념조차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나라가 직접 그 속에 들어가 가르치는 것이다. 열악했던 우리나라도 그런 식으로 성장했다.
내가 다른 나라에 후원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 기부 문화를 교육시킨다는 말이 더 중요할 것이다. 자립할 수 있도록, 이 나라가 더 성장해서 또 다른 나라를 도울 수 있도록 말이다. 옛날 우리나라가 그렇게 도움받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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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 |
단 5천원을 기부해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꾸준히 한다는 것 생각보다 어렵다. 아직 오래 살진 않았지만, 지난 30년을 돌아보건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사랑하면 나는 좀 덜 먹고도 그 사람에게는 더 줄 수 있는 법이다.
돈이 어렵다면 당분간 후원을 중지하더라도 그 사람을 완전히 당신에게서 끊어내지는 마라. 한 인간이 내게 맡겨졌다고 생각하고, 정말 인간다워질 때까지 끝까지 손놓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 역시도 이 두 아들을 위해 끝까지 노력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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