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무관심으로 경남도 단독사업화, 범국민사업화 필요지난 11일 경상남도 창원에서는 2011년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 행사 대행사 공모를 위한 제안설명회가 있었다.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은 2011년 9월 23일부터 11월 6일까지 해인사, 합천군 가야면 주행사장, 그리고 창원컨벤션센터에서 45일간 열리는 국제행사이다.
제안설명회는 올 초 발표된 기본구상안을 토대로 축전의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는 신호탄이다. 경남에서는 대장경천년축전을 위해 올 6월 정부로부터 국제행사 승인을 받아 9월에는 추진 주체가 될 재단법인을 설립한 바 있다.
경남 합천 해인사에 소장된 팔만대장경은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우리 민족 최대, 최고의 문화유산이다. 이러한 대장경의 천년을 기념하여 지자체가 나서 미리부터 그 준비를 한다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준비 과정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지난 해부터 시작된 경상남도가 준비한 행사 외에 이미 다른 곳에서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대장경 천년 행사는 2007년 4월, 고려대장경연구소(이사장 종림 스님)가 주축이 된 '2011년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 선언식' 개최 이후 본격화됐다. 당시 기념사업 준비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는 종림 스님과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데 공헌한 루이스 랭카스터 버클리대학 명예교수가 위촉됐다. 준비위원회는 '천년의 지혜를 천년의 미래로'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선언식 이후 지자체 중 가장 먼저 대장경 천년맞이 사업에 관심을 보인 곳은 대구광역시였다. 대구시 팔공산에 위치한 부인사는 초조대장경을 판각ㆍ보관하던 장소이자, 팔만대장경의 역사가 시작된 역사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대구시는 2007년 5월 시의회 임시회를 통해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맞춰 대구 팔공산에서 팔만대장경 간행 기념행사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팔만대장경을 보존하고 있는 해인사와 합천군, 경상남도도 지난 해 '2011년 대장경 천년 엑스포' 개최를 선언하면서 대장경 천년사업은 제각기 진행되었고 현재는 경남도를 중심으로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조계종 "교구본사 해인사가 알아서 할 일"로 미뤄경남도 중심의 대장경 천년 사업에서 주목할 점은 조계종을 포함해 불교계 차원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매년 있는 초파일 봉축법회에도 조계종뿐 아니라 모든 종단이 참여해 행사를 치르는 것치고는 너무 조용한 분위기이다. 최근 조계종 소속의 법응 스님이 <불교닷컴> 기고문을 통해 종단 차원의 기획단을 꾸려야 한다고 주장했듯이 대장경 천 주년은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에 다시없을 큰일에 틀림없다. 그러나 조계종은 '2011년 대장경 엑스포'에 대해 "해당 교구본사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강 건너 불구경 하는듯한 인식이 지배적이다.
조계종의 방관적 태도 외에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종림 스님이 경남도 사업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것도 석연치 않다. 종림 스님은 750년간 해인사 장경각에서 잠자던 고려대장경 1514종의 경전, 16만쪽·5천여만 자를 한자도 빠짐없이 10년의 노력 끝에 지난 2000년까지 시디 15장에 담아낸 인물이다. 그밖에 중국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필사본과 고려대장경 텍스트에 대한 비교연구를 진행하고 일본 남선사에 소장된 초조대장의경 디지털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등 대장경과 관련한 연구사업 및 국제교류가 종림 스님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합천 해인사에 대장경의 하드웨어가 있다면 종림 스님과 고려대장경연구소에 대장경의 소프트웨어와 네트워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장경 컨텐츠 창고' 장경연구소 등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지난해 경남도보다 오히려 적극적이었던 대구시가 조용해진 것도 이상하다. 올 6월까지도 대구시는 고려시대 팔공산 일원에서 개최된 전국유일의 승시(僧市)를 재연하고 일본 남선사에 보관 중인 초조대장경 인경본(1830권)의 복원 및 영인(影印)사업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또 세계대장경전시회, 초조대장경 전장(轉藏)대회, 밀레니엄 팔관회, 1000명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초조대장경 이운(移運)행사 등을 열겠다고 했다.
대구시에서 하겠다고 한 대장경 천년 관련 사업에는 몇 가지 특이점이 있다. 하나는 사업 대부분이 2007년 종림 스님 등이 포함된 준비위원회에서 발표한 내용이고 발표 때마다 그 내용이 약간씩 달라졌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대구시가 조용해진 후 경남도가 대행사 공모를 앞두고 발표한 사업에 팔관회, 이운행사 등 대구시가 발표한 사업들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2007년 각계 인사들이 모여 중앙정부 차원에서 준비한 사업안이 정권이 바뀌면서 완전히 무산되고 이 틈에 대구시와 경남도 등 지자체가 뛰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지자체 중에는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유치하면서 한시름 놓은 대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 건'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큰 경남도가 강력하게 치고 나오면서 대구시가 한 발 물러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대구시가 하거나 경남도가 하는 것이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우리 민족이 세계에 보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을, 그것도 천년에 한 번밖에 오지 않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방화시대에 지방이 중심이 되어 거꾸로 나라 전체를 끌어가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이것이 지역의 이기심이 앞서 나라 전체, 국민 모두의 일을 한 지역만의 일로 왜곡,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경남도에서는 지금이라도 고려대장경연구소를 비롯한 유관단체를 추진 주체에 참여시켜야 한다. 기념관 짓고 이벤트 여는 것보다 그 안에 뭘 담을지 고민해야 하고 우리가 세계에 보여줄 것은 8만여 대장경판을 넘어서 대장경이 담고 있는 지식문화, 정신문화여야 하기 때문이다.
추진 주체에 나라 안팎의 권위자들을 포함시키는 한편 추진 내용을 상세히 공개하여 온 나라, 전 세계가 대장경 천년 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천년 전 대장경이 실크로드를 통한 동아시아 지식의 결집체였다면 대장경 천년을 통해 다시 한 번 국제적인 규모의 교류와 소통을 이뤄내야 하고 그것은 준비 단계부터 그러해야 한다.
엄밀하게는 대장경 천년과 해인사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천년은 초조대장경의 조판 시작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장경 천년의 이름은 오직 대구 부인사만이 가질 수 있다. 또 팔만대장경을 조판한 강화도의 대장도감을 뺀다면 대장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된다. 강화도에서 해인사까지 그 엄청난 이운행렬이 있었기에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있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만 보아서도 경남도가 혼자서만 천년 행사를 준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중앙정부의 적극적 의지와 조계종단 차원의 사업 준비 필요중앙정부 또한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경남도에 국제행사 승인을 내주고 예산을 배정해준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경남도는 현재 주행사장 조성공사에 160억 원, 전시장 구성 및 각종 행사에 100억 원을 쓰겠다고 발표했다.
한편 총 1500억원의 예산이 투입(2007년 행사비 140억원)된 경주세계문화엑스포는 국제행사이기는 하지만 중앙정부와의 관계 문제가 대두하지 않았다. 예산이 많거나 또는 적거나에 따라 중앙정부의 개입 여부나 정도로 결정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처럼 단일의 행사가 여러 지자체에 걸친 문제일 때, 또 전 국민적 관심사일 때 중앙정부의 개입을 통해 전 국민적 시각에서 이해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
경주엑스포는 예산만 있으면 언제라도 다시 할 수 있으나 대장경 천년은 앞으로 천년이 또 오기 전에는 다시 할 수 없는 일이다. 과거보다는 미래만 보고 가겠다는 이명박 정부 입장에서는 천년 전 거란과 몽골의 침략에 시달리던 역사를 상기하는 일이 어쩌면 불필요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할 지라도 우리가 자랑삼아 마지않는 인터넷강국, IT강국의 구호가 사실은 천년 전 대장경을 통해 드러난, 한 자의 오탈자도 없는 엄정성과 동아시아 지식의 결집 및 표준화, 지식시스템에 기반한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분명한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 고려대장경과 직지심체요절,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그리고 한글 창제에 면면히 이어져온 기록문화의 전통을 21세기 대한민국이 우리의 역사로서 전 세계에 자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민족을 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고려대장경 천년사업을 중앙정부가 나서지 않는다면 현 정부가 주장하는 지식강국은 허언이 될 수 밖에 없다. 경남도에는 개방적인 자세가, 중앙정부는 좀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계종 총무원의 의중도 궁금하다. 조계종 지도부는 정말 대장경 천년이 해인사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지역문화행사에 대한 개입의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방관하고 있는 것인지, 조계종의 입장을 전 불자들에게, 그리고 국민들에게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
불교계의 이해를 넘어 우리 민족문화의 정수이자 동아시아 지식문화의 총화에 대한 불교계의 자부심과 긍지를 되살려야 한다. 대장경 천년행사가 지역행사가 아닌 국민전체의 축제가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