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이후 두문불출했던 버마 군부지도자 탄쉐 장군이 11월 둘째 주 스리랑카를 찾았다. 죽기 전 부처의 치아가 보관되어 있다고 알려진 치아사원(Tooth temple)을 찾기 위해서이다. 또 다른 해석은 스리랑카 정부군이 반군인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LTT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스리랑카 동북부를 자치하며, 독립을 위해 싸운 타밀인의 무장세력)와의 전쟁을 성공으로 이끈 전술 및 전략을 배우기 위함이라 한다.
사실 스리랑카 정부와 반군간의 싸움의 시작은 최근 일이 아닌 30년이 넘게 지속되었다. 물론 이 기간 동안 노르웨이의 중재로 여러 번 평화협상이 진행되어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던 시기도 있었다. 평화협상이 결렬되면서 수적으로 열세인 LTTE는 다수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자살 폭탄 전술을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전술로 인해 일반 대중들은 공포에서 살게 되었다. 전쟁 종식 후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올라갔고, 거리에서는 축제가 열렸으며, 많은 집 대문과 거리에 대통령의 사진이 도배되었다. 이 지난한 싸움의 결과는 분명 일반 대중을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자유를 안겨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전쟁의 대외적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쟁의 종식으로 인해, 일반 대중들이 공포를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되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LTTE와의 전쟁으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국내 인권보장 시스템이 철저히 그리고 체계적으로 파괴되었으며 그 결과는 전쟁의 상대가 아닌 일반 대중에게 더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인권보장 시스템이 조금씩 서서히 파괴되어 가면서 이 시스템은 자생적으로 일상으로 스며들었으며, 결국 외적으로 존재하지만 정상적으로 작동하지는 않는 것이 현재 스리랑카의 현실이다. 즉 비정상적인 시스템이 '정상화'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전쟁으로 단기간에 파괴된 시스템이 전쟁 후 회복할 수 있는 그런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야생 코끼리 길들이기
야생 코끼리 길들이기 이야기가 이 현실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야생 코끼리를 포획되면 쇠사슬로 족쇄를 채워 묶어놓음으로서 길들인다. 처음 상당한 기간 동안, 코끼리는 그런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유를 위한 모든 시도는 매우 고통스럽고 헛된 것이라는 것을 학습하게 되며 결국 코끼리는 속박된 쇠사슬의 법을 따르게 되어 족쇄에서 풀려나더라도 자유를 찾기 위한 노력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된다. 만약 코끼리 새끼가 있다면, 그 새끼들은 길들여진 세상에서 자라나며 자발적인 노예로 주인에게 남아있게 된다.
스리랑카 테러방지법은 1979년 한시법으로 제정되었다가 1982년에 '한시'가 삭제된 법으로 개정되었다. 이 법에 더하여 긴급조치법의 장기화와 그 적용은 이미 사회 모든 영역에 뿌리내렸다. LTTE와의 분쟁기간동안 시민복장을 한 안보요원들은 가능한 자살 폭탄공격과 다른 안보위협에 관한 감시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었으나, 이러한 안보요원들은 아직까지 대규모로 충원이 되고 있으며 거의 모든 곳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주 임무는 끝난 지금 일반 시민들에 대한 감시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군사비 또한 약 20%가 증액되었다. 이들에 의해 특히 야당 정치인들에 대한 감시가 진행되고 있으며 결국 시민들 사이 불신문화가 정착되어버리는 사회병리적 현상이 나타났다.
내전이 끝나도 풀리지 않는 족쇄
과거 LTTE 영향력 하에 있었던 북부 자프나 지역에 약 2만 5천여 명의 국내 실향민들이 스리랑카 정부가 만들어놓은 캠프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인도주의 단체를 포함한 어떠한 국제기구도 출입 통제가 이루어졌다. 이 실향민들의 상황과 대우에 대해 유엔에서도 스리랑카 정부에 비판을 하고 있지만, 스리랑카 정부는 또 한번 영리하게 최악의 상황으로 고통 받는 그들에게 전쟁의 승리로 자유를 안겨주었다고 선전하였다. 과거 스리랑카 정부는 유엔에서 자국의 인권상황에 대해 별도 논의가 진행되자,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세계 최초의 나라이며 테러와의 전쟁을 진행하고 있는 나라들은 스리랑카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논리로 자축하는 결의안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제출하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의 요인들로 입법, 사법, 행정이라는 권력분립은 퇴색해져 갔고, 비대해지고 강력한 행정부를 최고점으로 하여 입법과 사법이 행정부를 지원하는 체제로 변형 및 발전되었다. 이러한 일반 형사체계를 무력화한 법의 도입 및 적용으로 24시간 이내였던 인신구속 기간은 3개월로 늘어났으며, 이 또한 매달 법원의 허락으로 기한 없이 연장할 수 있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주요 언론기자들 그리고 인권침해 사건에 대하여 정부에 철저한 조사와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인권단체들 대부분이 LTTE 지지자나 동정자로 분류되어 직간접적으로 살해를 당하였으며 또한 현재 살해위협을 받고 있다.
알려진 보고에 따르면, 92년부터 지금까지 100여 명이 넘는 미디어 종사자들이 살해를 당했다. 유럽 연합에서는 인권옹호자 보호를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지만, 이 법의 적용으로 인해 피해자들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고문 및 가혹행위 사건들도 많이 보고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미 그 역할이 실종되었고, 피해자나 가족들은 어디에 호소를 해야 할지 모르며 변호사를 포함한 지식인들 또한 그들에게 어떤 대답을 주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이다.
작동되지 않는 인권보호 시스템
왜 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시스템이 작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건을 보고해도 경찰은 접수를 거부하며, 접수가 받아들여진다 해도 조사가 진행이 안 된다. 조사과정에 있어서 고문과 가혹행위가 수사의 방법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법원에서 사건을 심의한다 하더라도 해당 법원의 판결은 수년, 최종심까지는 더 오래 걸린다. 대부분 최종심 결과는 피해자를 외면한다. 재판 중 가해자의 혹은 가해자가 고용한 자들의 살해위협과 회유, 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심지어 피해자나 증인을 죽임으로서 사건을 마무리하는 것이 관행이다.
"그렇다면, 법의 부재와 시스템을 정비하면 되지 않느냐?"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 질문은 그러한 시스템이 어느 정도 기능을 하는 나라에서 태어나 학습한 자들의 상상력일 뿐이다. 예로 스리랑카는 현존하는 법의 문구로만 판단한다면 최고의 인권보장체계를 갖추고 있다. 유엔의 고문방지협약을 위한 국내 이행입법이 이미 1994년에 정비되었으며, 특히 기본권 침해 사안은 하급심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법원에 소를 제기할 수 있는 시스템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으며 또 그러한 상황 하에서 나와 일반 사람들은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 소위 '힘'이 있는 정치인들에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하고, 한편으로 정치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세를 넓혀가고 있다.
경찰서를 공격한 주민들
여러 가지 사례들이 많이 있지만 아마 올 8월에 일어나 스리랑카 전역을 들끓게 했던 Angulana 사건이 더 깊은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두 남학생이 여학생을 놀린 이유로 체포되어 경찰서장을 포함한 여섯 명의 술 취한 경찰관들에 맞아 숨진다. 이들 경찰관들은 그들의 죽음이 경찰서 내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위장하기 위해 강에다 시체를 유기한다.
하지만 체포된 사실과 함께 한 학생의 부모가 경찰서장에게 건네야 하는 돈을 준비하여(일반 관행) 경찰서로 찾아갔다는 사실 등 구체적인 정황이 밝혀졌다. 분노한 지역주민들은 경찰의 잔인함과 상급 경찰들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사실에 분노하여 경찰서를 공격하는 등 항의가 계속 되었다. 이후 관련 경찰관들은 체포되었으나 상황을 잠재우기 위하여 경찰 대변인은 이 두 명의 남학생들이 마약 매매를 했다고 발표했다.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가자 일선 경찰들은 마약 매매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조작(관련 경찰이 직접 조서를 꾸며 허위 서명)까지 하여 법원에 제출했다. 사건은 이제 시작되었다. 하지만 지방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것을 제외하면 이 사건은 이제까지 보고된 다양한 사례들 중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테러방지법과 긴급조치법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보다는 정상적인 시스템에 하나의 균열을 만들어내었으며 여러 다른 균열과 함께 이제 그 어느 누구도 어떻게 이를 복원해야 할 지 모르는 코끼리를 옭아맨 쇠사슬이 되었고, 이 쇠사슬에 순응한 대중 그리고 그것을 학습한 채 자라난 젊은 세대들은 자연스럽게 이 쇠사슬의 법에 흡수되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의 자유는 무엇이며, 무엇이 나의 자유를 억압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아직 제기되지 않고 있다.
시스템을 통해 현상을 바라보는 것 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가지고 시스템의 문제를 제기하는 노력을 지속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결국 그렇게 학습되어진 코끼리 새끼처럼 자발적인 노예로 시스템이라는 주인에게 순응해야 한다(지속적인 비판이 계속되자, 스리랑카 정부는 11월 22일 Vavuniya 지역의 한 캠프에 생활하는 실향민의 약 절반에게 이동의 자유를 부여하였고, 1월 말까지 실향민에게 이동의 자유를 부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들 또한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이라는 '현실'에 순응 혹은 적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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