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아침 11시경, 월드비전 제천지부 '사랑의 도시락 나눔의 집' 앞. 9시부터 시작된 촬영이 열기를 더하고 있다. 촬영팀은 월드비전 직원들이 매일 아침 소외계층을 위해 도시락 배달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런데 촬영이 자꾸 지연된다. 촬영기자가 카메라를 다루는 모습이 영 미숙하다. 촬영버튼을 계속 잘못 누른다. 리포터도 말이 꼬인다. 갑자기 몰아닥친 추위 때문에 입은 더 얼어붙는다.
"성국씨, 이어폰은 꽂고 있나요?" "현성씨, 따뜻한 이야기인데 분위기가 너무 심각하지 않나요?" 옆에서 지켜보던 오정택(45) 제천 영상 미디어센터 차장이 '지적질'에 나선다. 방금 촬영했던 부분에 대해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문제점을 짚어준다. 간혹 "잔소리 많이 해서 미안하다"고 변명처럼 말하면서. 카메라를 든 조상국(36·제천시 하소동)씨가 "처음이라서…" 하며 머리를 긁적인다. 아나운서가 꿈인 리포터 이현성(23·청주시 용암동)양은 쑥스러운 듯 배시시 웃는다.
교육과 참여의 장, '퍼블릭 액세스' 구현조성국씨는 두 가지 직업을 갖고 있다. 본업은 경찰, 부업은 제천시민TV 자원 활동가다. 경찰서 근무가 없는 시간을 이용해 자원 활동을 한다. 그는 교회에서 인터넷방송을 하면서 동영상 촬영에 관심이 생겼다. 소외계층의 모습을 담아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게 그가 카메라를 잡는 이유다. 그러다 지난 10월 제천 영상 미디어센터에서 제천시민TV 자원활동가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제천시민TV'는 제천영상미디어센터가 창립 1주년을 맞아 기획한 회심작이다.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신장하자는 센터의 설립취지에 맞게 '퍼블릭 액서스'를 활성화하겠다는 것이다. 즉, 기존 주류방송에서 소외되어 온 사회적 약자들에게 발언의 공간을 제공하겠다는 취지다.
이에 문화관광부와 제천시에서 20여억 원을 투자해 센터를 설립했고, 2년 연속으로 최우수 영상미디어센터로 선정됐다. 센터는 지난 1년 동안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정기적으로 '시민영상제작교실'을 열고 학교나 기관 등 영상교육이 필요한 곳에 찾아가 미디어 현장 교육도 했다. 이제는 축적된 시민들의 역량을 마음껏 표출할 장이 필요하다고 보고 '제천시민TV'를 만든 것이다.
제천영상미디어센터는 지난 10월 18일 리포터·PD·기자 등 총 15명을 뽑았다. 전·현직 교사, 경찰, 주부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대다수가 센터에서 주관한 '시민영상제작교실', '문화PD양성교육' 등을 받은 사람들이다. 1주일 가량 전문가들을 초청해 추가로 촬영·편집·리포팅 등 실무교육을 마쳤다. 실무뿐 아니라 취재윤리도 함께 배웠다.
제천시민TV는 내년 1월 정식 개국을 앞두고 현재 시험 방송 중이다. 인터넷을 통해 방송되며, 단계적으로 제천 및 충북 지역 방송국에도 송출할 계획이다. 시민제작진은 3명씩 5팀으로 나뉘어 활동한다. 주제나 제작일정은 자율적으로 정한다. 팀의 의견이나 일정 조정, 장비와 기술 지원 등은 오정택 차장이 맡는다. 그는 시민 TV '교육의 연장'이자 '시민 참여의 장'의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부부 동반 활동도채형식(54·제천시 고암동), 최춘희(50) 부부는 제천영상미디어센터 '대표 1번 팀'이다. 이들은 시민영상제작교실1기를 수료했다. 이어서 시민TV 활동가 1기로 활동 중이다. 채씨는 아내의 권유로 '얼떨결에' 시작했다. 하지만 이젠 재미를 붙여 아내보다 더 열성적으로 일한다. 일요일인 15일 오후 5시, 모두들 집에서 주말을 즐길 시간이지만, 이들은 미디어센터를 찾았다. 영상편집을 하기 위해서다.
부부는 지난 8∼9일 제천체육관 광장에서 열린 새마을회 주최 '1만 포기 사랑의 김장 행사'를 취재했다. 채씨는 "형식적으로 보도하는 기성언론과 달리 그 안에 담긴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 것이 기획의도"라고 말했다. 촬영하다 보니 "왜 우리들은 안 찍어주느냐?"며 보채는 사람들도 있어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편집을 시작해야 하는데 컴퓨터가 말을 듣지 않는다. 고장이 난 것 같다. 아내 최씨가 발을 동동 구른다. "이것 빨리 편집해서 새마을회에 보여줘야 하는데… 약속을 안 지키면 실망할 텐데…"
최씨는 작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본 영화 때문에 영상을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영화에 70~80대 친구들이 모여 음악회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자신도 친구들과 함께 추억을 나눌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었다. 최씨는 "친구들 모임 때마다 촬영을 해서 나중에 같이 시사회를 열어보는 게 소박한 꿈"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시민들이 잘 모르는 제천과 제천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는 것이 시민TV에 자원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은빛 노년의 열정옆 방 편집실에는 얼핏 최첨단 기계 장치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은발의 노신사들도 있다. 손인호(63·제천시 신월동)씨와 박명훈(63·제천시 청전동)씨는 제천시민TV 최고 연장자들이다. '문화PD'과정을 밟은 뒤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제천 명암에 있는 산채건강마을 탐방다큐를 찍고 있다. 손씨는 제천과 관련해서 가장 특출한 게 뭘까 고민하다가 내년에 열리는 제천국제한방바이오엑스포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산채건강마을에서 한방관련 내용을 소개하면서 내년 행사도 함께 홍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6개월 전까지 교사로 일했다. 정년퇴직한 뒤 제천홍보활동을 하고 싶었는데, 제천시민TV가 좋은 무대가 될 것 같아 자원했다. 컴퓨터를 가르쳤기에 영상교육도 비교적 쉽게 따라왔다고 한다. 하지만 현장촬영은 쉽지 않았다. 조명을 준비하지 못해서 화면이 어두컴컴하게 나왔고 카메라 앵글이 생각만큼 쉽게 잡히지 않아 계획했던 화면을 놓치기도 했다. 그는 "아직 걸음마 단계이기에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노인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컴퓨터교육 동영상도 제작하고 싶다"고 밝혔다.
최근 들어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미디어 활동가들이 많이 등장했다. 작년 촛불 시위 때 크게 활약한 개인미디어활동가 '미디어몽구'나 최근 추방당한 이주노동자 '미누'가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면 제천시민TV 활동가들도 사회부조리를 고발할 수 있을까? 오정택 차장은 "기술적인 면에서 많이 부족하고 각자 생업도 있기 때문에 이들이 전문적으로 일을 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제천의 다양한 소식들을 시민들에게 전하는 것만으로도 제천시민TV활동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제 시작이다. 아직은 비록 실수도 많고, 어려움이 많은 그들이지만, 이들 표정엔 항상 웃음과 전문가 못지않은 진지함이 묻어났다. 소박하게 시작한 제천시민TV가 언젠가는 당당한 풀뿌리언론으로 성장하길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시민들이 만든 영상은 제천영상미디어센터 '봄' 홈페이지(http://www.jcbom.com) 인터넷카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