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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고운동에서 내려다본 '고운동계곡'
지리산 고운동에서 내려다본 '고운동계곡' ⓒ 송성영

새 터를 찾아 한창 헤매고 다닐 때였다. 천연염색가 김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당시 경북 영천 농업기술연구센터의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었던 선생은 산동네 쪽방을 오가며 몸 돌보지 않고 오로지 천연염색에 미쳐 살아가고 있었는데 우리 식구가 힘들 때마다 구원투수처럼 나타나곤 했었다.

"송 쌘님이 거기 가면 원하는 농사도 지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한번 찾아가 보실랍니까?"

지리산 중산리에 조건 좋은 터가 있다는 것이었다. 김 선생과 평소 알고 지내는 윤 선생이 '어떤 사람'과 공동으로 매입한 3천 평 가까운 너른 터라는 것이다. 윤 선생은 수 년 전 매입 당시의 평당 4만~5만 원 시세로 내가 원하는 만큼의 농지를 떼서 팔겠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소작료 한 푼 내지 않고 천 평이든 2천 평이든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농사를 지어 먹게 해 준다는 것이었다. 집터만 구하면 될 일이었기에 최상의 조건이었다.

"지리산 중산리에 좋은 터가 있는데 필요한만큼 농사를 지어 먹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아내 역시 기분 좋게 따라 나섰다. 상상만 해도 마음의 안식처가 되 주는 지리산이었는데 몸까지 의지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그동안 지리산에 터를 잡기 위해 수없이 기웃거려 보았지만 우리 형편으로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빈집은 고사하고 농사조차 지을 수 있는 조건이 허락되지 않았다. 싼 땅이라 할지라도 평당 10만 원 대가 훨씬 넘었다. 골골에 들어선 온갖 호화스러운 주택들이 땅값을 올려놓은 지 이미 오래였다.

남편이 독일인가 네덜란드인가에서 사업을 한다는 윤 선생과 만났다. 중산리 계곡 초입의 산 중턱에 자리한 윤 선생이 공동으로 구입했다는 터는 논과 밭으로 되어 있었는데 오랫동안 묵혀 잡목과 풀숲으로 뒤덮여 있었다. 터를 중심으로 좌우로 산줄기가 둘러져 있었고 눈앞 저 만치에 지리산 천황봉에서 내려온 황금능선이 힘차게 뻗쳐 있었다. 숨을 길게 들여 마시면 그 힘찬 산기운이 단숨에 몸속으로 깊이 스며들 것만 같았다.

터 중심으로 작은 개울물이 쉼 없이 흐르고 있어 비록 오래 동안 묵혀 잡목과 풀숲으로 뒤덮여 있는 논밭이지만 정리를 잘 해 놓으면 농사짓는데 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농약이나 제초제 따위에 시달리지 않고 오랫동안 묵혀 있는 땅이었기에 자연농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화학비료도 안 쓰고 거름을 만들어 자연농만 고집하신다면서요. 직접 야채 배달도 하신다고 들었는데..."
"그러긴 헌디, 자급자족하기가 쉽지 않네유."
"이 땅에서 어느 정도 농사지을 수 있으시겠어예?"
"천 평 정도는 가능하겠는디요. 두 마지기 정도는 논으로 쓰고 나머지는 밭으로 쓰면 되겠네유."
"약초를 좀 재배했음 하는데예."

온갖 약초와 식이요법으로 암을 극복했다는 윤 선생은 터 중심에 암 환자들의 쉼터를 꾸밀 예정이라고 했다. 집안에 한의사가 둘이나 있다는 윤 선생은 약초뿐만 아니라 내가 재배하는 야채들을 전량 사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 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었다.

윤 선생과의 구두 약속을 해놓고 우리 집 아이들을 데리고 중산리를 다시 찾아갔다. 아이들은 낯선 땅으로 이주 한다는 두려움에 잠시 망설였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오가며 세세하게 터를 살펴보았다. 집은 어디에 앉히고 어떤 약초를 재배하고 어떤 야채를 재배할 것인지를 정하고 어느 지점에 앉힐 것인지, 효소 창고는 어떤 자리에 배치할 것인지 등을 따져가며 구체적인 설계도면을 그려나갔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이웃사촌들은 우리 식구가 곧 지리산으로 떠날 것이라 여겨 이별주를 청해오기도 했다.

마음은 이미 중산리에... 그런데, 개발, 사업이라니?

그렇게 두 달 쯤 지난 어느 날, 윤 선생으로부터 기별이 왔다. 만날 사람들이 있다며 그들과 인사나 하자는 것이었다. 지리산 700고지 고운동에서 9대째 살아가는 기연네 집에는 윤선생과 더불어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중산리 터 곳곳에 집을 짓고 살아갈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거기 감나무가 꽤 많던데예, 곶감 팔아 생활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예."

평소 알고 지내던 기연이네 아빠 이창석씨는 산청에서 감 농사를 지어 곶감을 팔아 생활하고 있는데 중산리 터에 있는 열 댓 그루의 감나무를 잘만 가꾸면 한 가족이 6개월은 족히 생활할 수 있는 수입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다. 거기다가 군청에서 지원금까지 나온다는 것이었다.

중산리에 새 터를 일굴 예정이라는 그들과 함께 자기소개를 했다. 부부동반으로 모인 그들은 우리 식구와 살아가는 방식이 달랐다. 부산 어느 은행장에 건축회사 대표, 퇴직 교수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농사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거기다가 따로 초빙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주역을 하는 철학자라는데, 사주나 풍수지리를 보는 모양이었다. 모여 있는 사람 중에 누군가가 그 철학자라는 사람을 모시고 오는데 쉽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역대 대통령 누군가의 사주인가 묘 자리인가를 봐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 방면에 꽤 유명세가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윤 선생이 나를 내세웠다. 앞으로 터를 일구고 모여 살게 되면 싱싱한 무공해 먹을거리를 해결해 줄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소개해놓고 깜빡했다는 투로 방송작가에 책까지 낸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낯짝이 뜨거웠다. 그냥 농사만 짓고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면 그들과 격이 맞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것 같았다. 앉아 있기가 거북살스러웠다. 들썩이는 엉덩이를 눌러 앉혔다. 

개인 소개를 마치고 그 터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의견을 나눴다. 나는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뒷골이 댕기기 시작했다. 농사일하고는 거리가 먼 토목공사며 개발은 어떻게 할 것이고 사업은 어떻게 벌여 나갈 것인지 어쩌구 저쩌구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고 저런 문화사업을 벌여 건물은 어디에 앉히고 지원금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이래저래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뒷목이 뻐근하고 골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속이 뒤틀렸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개발' '사업' 따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리산을 선택했는데 지금 내가 여기서 뭔 짓거리를 하고 있나 싶었다.

"어이구, 뒷골 땡겨 환장하건네!"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그들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다들 두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었다. 경치 좋은 청정지역에서 전원생활을 누리면서 돈벌이가 될 문화사업을 벌여나가자는데 뭔 불만이 있나 싶었을 것이다.

윤 선생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밖으로 따라 나왔다. 나는 윤 선생에게 다짜고짜 따져 물었다.

"저 분들은 농사짓고 살 사람들이 아닌디유?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거 같은디..."
"아니, 그게 아니구예, 저 분들은 그 터에서 살게 될지, 아직 결정된 것도 없어예."

길게 심호흡을 했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혔다. 뭐가 그리 잘났다고 그들을 함부로 속물로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엉거주춤 다시 그들 틈에 끼어 앉았다. '철학자'라는 사람의 일장연설에 다들 귀를 세우고 있었다. 풍수적으로 앞산 형세가 어떻고 뒷산, 옆 산이 무슨 무슨 형국이니, 문화사업을 벌이면 앞으로 크게 번창할 터라는 것이었다. 번창이라는 말과 개발이라는 말이 동일선상에 놓여져 있어 보였다.

"저 분들은 농사짓고 살 사람들이 아닌디유?"

다시 뒷골이 댕겼다. 나는 그저 부드러운 뒷산과 좌우 산줄기가 바람을 막아 주고 있어 좋고 농사짓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아 좋았다. 힘차고 넉넉하게 펼쳐져 있는 앞산이 좋았다. 그 터에서 최소한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놓고 대자연이 내주는 온갖 것에 의지해 먹고 자고 싸고 그 기운을 다시 널리 이롭게 되돌려 놓을 수 있는 터로 가꿀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런 마음자리를 갖고자 하는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터라면 그야 말로 가장 좋은 터, 명당자리라 여기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터라 할지라도 큰 욕심이 끼어들게 되면 그 터는 이미 명당 터가 아닌 것이다. 죽은 터가 될 것이었다. 무엇인가를 살리기 보다는 끊임없이 파괴하고 죽여 나가는 터가 될 것이었다.

여전히 철학자가 좌중을 향해 도 튼 사람처럼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고 온갖 인내심 발휘해 가며 앉아 있던 성질 급한 아내가 바로 옆 자리의 아줌마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아줌마의 낯빛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푼수 아내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작은 목소리로 뭔가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대충 터 얘기를 끝내고 밖으로 나와 아내에게 물었다.

"근디 아까 그 아줌마에게 뭐라구 한 겨? 얼굴색이 변하더라구."
"그냥 그 철학자라는 사람, 사이비 도사 같다고 했는데? 왜?"
"그 아줌마가 누군지 알어?"
"모르지, 오늘 처음 본 사람이잖아."
"에이그 바보야, 그 아줌마가 그 양반 부인여."

그들은 각자 승용차에서 악기를 꺼내왔다 그리고 연주를 시작했다. 색스폰과 트럼펫 같은 악기 였다. 화음이 잘 맞았다. 연주도 수준급이었다. 고상했다. 하지만 뭔가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충분히 먹고 살만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도 깊은 산중에 들어와 돈벌이가 될만한 또 다른 사업 논리를 펼치고 있는 저들의 일상생활은 어떠할까? 가난한 내 아내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힘겨워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 틈바구니에 끼어 저 고상한 사람들의 싱싱한 자연식을 먹이기 위해 몇 푼의 돈을 받아가며 산 깊은 곳에 처박혀 그들의 상머슴으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내탓...지리산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갈등이 생겼다. 사람들의 마음자리에 사랑과 평화가 깃들 수 있을 만한 문화사업을 벌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 좋은 문화사업을 벌이는 사람들에게 좋은 먹을거리를 제공한 대가로 큰 어려움 없이 편안한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다음날 새벽, 고운동 산자락을 뒤덮고 있는 시누대 숲을 헤치고 산에 올랐다. 고운동 등산봉에 오르면 지리산 천왕봉이 거기 한 눈에 펼쳐져 있다. 편한 자리에 앉아 눈꺼풀을 가볍게 닫고 긴 호흡을 했다. 하지만 오로지 호흡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고개 들어 지리산의 너른 품을 보았다. 저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결국 모든 것은 내 문제였다. 지리산은 저들의 티끌을 보기 이전에 개발 논리에 현혹되고 있는 내 꼬라지를 먼저 보라 이르는 듯했다. 지리산은 나를 받아주지 않고 있었다. 듣기 좋은 문화사업 같은 인간 중심적인 개발 논리로 지리산을 더 이상 망가뜨리지 말라 내 등을 떠밀고 있었다.

오지랖 너른 지리산,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총을 들었던 빨치산들의 이루지 못한 꿈과 수행자들의 못다 푼 화두들이 뒤섞여 바람처럼 나부끼는 지리산, 지리산은 좁디좁은 내안에 갇혀 있는 마음자리를 들여다보게 해 주고 있었다. 그것으로 족했다. 그렇게 나는 지리산 중산리를 포기하고 또다시 새 터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윤선생과 중산리 땅을 공동 매입했다는 그 '어떤 사람'과 갈등을 빚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땅을 분배하기로 했는데 그 '어떤 사람'이 도로가 닿는 부분, 땅값 비싼 부분만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그 중산리 터는 우리 식구의 터전이 아니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풍경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지리산 중산리#자연 농사터#문화사업#상머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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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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