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했다. 이번 휴가의 이름은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추계 정기휴가'. 나는 마지막 조(組)에 해당하는 순번이라서 겨울의 문턱인 11월 하순에 맞게 되었다.
'겨울에 떠나는 가을휴가'인 셈이다. 마음의 여유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직장인에게는 황금 같은 시간이다. 단 1시간이라도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까운 게 2박 3일간의 짧은 휴가다.
40여 년 세월, 함께 하지 못한 두 형제의 오붓한 '섬 여행' 이번 여행은 아내나 자식들과 함께 떠나는 가족여행이 아니었다. 얼마 전에 공직에서 퇴임한 셋째 형님과 모처럼 함께 하기로 했다. 장소는 '선유도(仙遊島)'.
이곳 선유도는 알고보니, 내가 사는 대전에서도 가까운 관광지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찾아가 본 적이 없는 '미지(未知)의 관광지'이다.
형제들이 각기 멀리 떨어져 바쁜 공직생활을 하다보니, 심지어 명절이나 부모님 제사날조차도 쉽게 만날 기회가 없었다. 더구나 형님의 직장은 고향인 충청도와는 거리가 먼 제주, 목포, 여수, 부산, 인천, 속초, 강릉 등 '바다'였던지라, 집안의 대소사에도 거의 참석치 못하고 살아왔다.
무려 40여 년 세월, 우리 형제들은 그렇게 오래 떨어져 살았다. 20대 초반에 이산가족처럼 각기 멀리 떨어져 살아온 형제가 이제 어느덧 머리에 허옇게 서리가 내린, 갑년(甲年)을 앞둔 시점에서야 얼굴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번잡하고 시끄러운 도심이 아니라 누구의 간섭이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한적한 섬에서…
그 동안 휴가의 개념이란 흔히 자식들과 또는 아내와 함께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50대 후반의 두 형제가 풍광이 아름다운 섬에서 이제까지 살아온 날을 회상하고, 또 다른 미래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는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고 소중한 시간으로 여겨졌다.
신비로운 섬 '선유도' 섬이란 묘한 속성을 지녔다. 뿌리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에겐 외롭고 힘들고 때로는 고달픈 생활터전이 섬이라지만 처음 찾아가는 사람에겐 그 어느 관광지에서 쉽게 맛보지 못하는 설렘과 신비로움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경탄이다. 마음속으로 '오길 잘 했다'는 단순한 경탄만으로도 족하다.
선유도는 고군산군도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섬 북단에 자리한 선유봉의 형태가 두 신선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하여 선유도란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하는데, 일찍이 고려시대에는 여·송 무역로의 기항지로, 임진왜란 때에는 함선의 정박기지로 이용된 연안해로의 거점이자 요충지였다고 한다.
▲ 선유낙조(仙遊落照) ▲ 삼도귀범(三島歸帆) ▲ 월영단풍(月影丹楓) ▲ 평사낙안(平沙落雁) ▲ 명사십리(明沙十里) ▲ 망주폭포(望主瀑布) ▲ 장자어화(壯子漁火) ▲ 무산십이봉(舞山十二峯)
'선유 8경'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미 지어준 자연의 아름다움과 특정 명소의 화려한 수식어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좋다. 여행 정보를 사전에 많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런 일반적인 여행정보란 기실 실망을 하지 않기 위한 전제요, 예비지식에 불과하다.
'선유도'란 섬은 그냥 가면 된다. '仙遊'라는 한자 이름만으로도 더 이상 의미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어두워지면 자야 하니까 잠자리 정보, 배고프면 먹어야 하니까 먹을거리 정보 정도를 알고 가는 것으로 족하다.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충족시켜주는 '선유도 펜션'내가 찾은 '선유도 펜션'의 잠자리는 고급 관광호텔처럼 호화스럽지는 않아도 욕탕의 수질이 온천수 못지않게 좋고, 이부자리도 깨끗하고, 바다가 보이는 건물의 전망도 좋아 만족감을 주었다.
음식 맛 또한 특별한 인상을 주었다. 자고로 여행지에서의 음식이란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그 지역의 특징을 살릴 수 있는 독특한 맛이면 좋고, 또 하나는 얼마나 그 고장의 인심과 식당 주인의 넉넉한 인심이 음식에서 배어나와 느껴지느냐 하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해풍을 맞고 자라서인지 육지에서 자란 것보다 씹히는 맛이 사각사각하고, 고소하면서도 연한 배추 잎으로 버무린 얼큰한 '겉절이', 야생 갓으로 담근 '갓김치'의 새콤하면서도 독특한 맛, 바다에서 갓 퍼 올린 듯한 애벌김(말리지 않은 상태의 김)으로 끓은 담백한 '김국.'
게다가 식당 아줌마가 손수 담갔다는 '꼴뚜기젓'은 속담('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뛴다')과는 전혀 딴판이다. 이런 속담은 꼴뚜기에게 실례(?)가 아닐까? 적어도 이곳에서 꼴뚜기젓 맛을 본 사람이라면 더 이상의 수식어가 필요 없다. 쫄깃하면서도 씹을수록 달콤한 맛이 일품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입담 걸쭉한 식당 주인이 푸짐하게 썰어 내놓는 모둠생선회와 인심 후덕하고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끓여 내놓는 매운탕의 얼큰하고 맛깔스런 맛은 소주의 맛을 한결 더해주었다.
선유도 식당 아줌마의 '겸손한 맛 자랑' 식당 아주머니가 금방 버무린 '겉절이' 한 접시를 더 들고 와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를 다녀가신 수많은 분들이 매년 다시 찾아오세요. 아마도 깊은 인상을 받고 가셨나 봐요."
얼핏 들으면 식당을 PR하는 자랑 같지만 그게 아니다. '진정어린 겸손'의 표현이다. 맛 자랑을 자화자찬 식 직설 화법으로 하지 않고, 그저 "깊은 인상을 받고 가셨나 봐요"라고 하면서 수줍은 듯 조심스럽게 건네는 그 한 마디에서 나는 그분들의 평소 인품과 그 고장 사람들의 인정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인정이 배어나는 좋은 음식을 앞에 놓고 형님과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누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으나, 단 한 가지 아쉽고 허전한 심정은 감추기 어려웠다.
그건 다름 아니다. 이런 좋은 세상을 자식들과 함께 즐기지 못하고 한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었다.
밤새도록 끊임없이 이어진 '형제간의 이야기' 함께 하는 동안 형님은 동생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애틋한 고향 이야기, 생시에 부모님 이야기, 사무치게 그리운 돌아가신 형님과 누님이야기, 그리고 병석의 큰 형님 이야기, 자랑스러운 조카들 이야기 등 가정의 이야기에서부터 40년 공직생활을 통해 겪은 크고 작은 고난과 에피소드는 물론이고, 삶의 철학, 취미 생활, 그리고 건강에 관한 이야기도 빼 놓을 수 없는 형제간의 이야기 거리였다.
이런 이야기는 밤낚시를 하면서, 혹은 술잔을 기울이면서, 이불 덮고 나란히 누운 잠자리에서도 계속 이어져 날이 새는 줄 몰랐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일지라도 그렇게 끊임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못할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부자간이라도 그렇게 밤을 새워 나눌 이야기감은 없을 것이다. 꼬박 밤을 새워 이야기하고 났는데도 이튿날 형제간의 이야기는 또 중단 없이 이어졌다.
삶의 가장 중요한 덕목 '형제간의 우애' 아버지께서도 생전에 그리 하셨다. 아우이신 작은아버지와 그런 잔잔하면서도 깊은 우애를 나누셨다.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동기(同氣)간에 아쉬움과 서운함, 사소한 갈등이 어찌 없을 수 있으랴.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제간의 우애가 더욱 돈독해지는 것처럼 앞으로 우리 집 형제들도 그런 우애를 지켜 나갔으면 좋겠다.
그곳에서 머무는 짧은 휴가기간 동안 넉넉하고 따뜻한 인심을 아낌없이 보여주신 많은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 전해 드리고 싶다.
아울러 군산항 연안여객선 부두에 도착하여 떠날 때까지, 아파트에까지 데리고 들어가 저녁식사까지 대접해 주시면서 변함없는 사랑 베풀어주신 형님, 형수님께도 다시 한 번 이 글을 통해 고마운 마음 전해드리고 싶다. 건강하세요.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평범하지만 따뜻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소박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수필문학인입니다. 이 글은 디트뉴스24 칼럼, sbs블로그(u포터뉴스), 다음블로그 등에도 송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