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출간되자마자 회수, 폐기를 요구받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한국불교기자협회 창립 20주년을 맞아 29명의 불교계 기자(사진기자 포함)가 쓰고 조계종출판사에서 펴낸 <한국의 대종사들>이 바로 그 책입니다.
책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불교기자협회 소속기자 29명이 집필자로 되어 있는 <한국의 대종사들>은 생존해 계시는 스님 중 대종사 품계를 받은 27분의 비구스님과 명사 품계를 받은 3분의 비구니 스님을 친견하며 인터뷰 형식으로 나눈 대화나 법문을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 되었기에 폐기 요구하나
모르겠습니다. 책에 등장하는 스님 중에서 회수, 폐기를 제기하신 것인지 아니면 책에 포함되지 않은 스님께서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집필자들이 한 분 한 분의 스님을 찾아뵙고 직간접으로 듣거나 나눈 스님 한분 한분의 행장이나 수행담 등을 정리 한 것이니 내용에 커다란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집필자를 성향이나 신앙에 따라 편 가른다는 게 말도 안 되지만 설사 편을 가른다 해도 한국불교협회소속기자들이니 악의적으로 불교나 스님들을 비하하기 위해서 쓰거나 내용을 왜곡할 만한 이유도 없을 듯합니다.
그럼에도 일부 원로의원으로부터 전량회수, 폐기를 요구받고 있다니 뭐가 잘못 되어 폐기를 요구 받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불교닷컴>에 따르면 어이없게도 책의 제목에서부터 폐기를 요구하는 이유가 됩니다. 책의 제목이 '대종사'가 아니라 '대종사들'인 것이 이유 중의 하나인가 봅니다.
'들'의 국어사전적 의미를 들어 '얼핏 보면 순우리말로써 나빠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계에서 최고의 법계인 대종사 뒤에 갖다 붙이면 '대종사 무리'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미문해서 그런지 '대종사들'이라는 표현이 뭐 그리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세계 각국의 대통령 모임을 '정상들'이라고 표현하고, '장관들', '국회의원들',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는데 왜 어른스님들을 '대종사들'로 표현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대종사님들'이라고 했으면 괜찮았을까하는 어깃장이 듭니다.
표지 디자인의 사진과 임의적인 순서, 연락조차 받지 못한 대종사스님들의 불편한 심기, 형평성과 일관성이 결여된 대상 선정, 대종사가 아닌 명사스님이 함께 들어가 있으면서도 '대종사·명사'로 하지 않고 '대종사'라고 뭉뚱그린 점 등도 이유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악의적으로 왜곡하거나 폄훼했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문제지만 그렇지 않다면 표지디자인이나 순서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편한 심기를 감춘 시샘이며 트집일 뿐으로 생각됩니다.
대통령의 얼굴도 신문에 실리면 휴지가 되고 쓰레기도 될 수 있는 게 현실입니다. 선정대상이나 순서도 그렇고 대종사와 명사를 분별하고, 조계종 스님과 태고종 스님을 분별하고 있는 이유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출판된 책을 회수하고 폐기해야 할 이유가 된다면 불교계에서의 출판은 영원한 구속이며 억압입니다. <한국의 대종사들>을 회수해 폐기하라고 요구하는 사람 중에 법문이나 가르침을 통하여 분별심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신 분은 안 계신가 모르겠습니다.
문제로 불거지기 전에 정리되고 다듬어졌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여러 사람이 좋은 뜻으로 악의적이지 않은 마음으로 정성껏 출판한 책이라면 그만한 허물쯤 허허하고 웃어넘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5년 전에 기획했던 일사실 5년 전인 2004년, 1년여에 걸쳐 <오마이뉴스>에 연재하였던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를 마치며 후속으로 생존해 계시는 어른스님(대종사)들을 한 분 한 분 찾아뵙는 것을 기획했었습니다.
네 가지 질문, '①출가 동기는? ②연애는 해 봤는가? ③부처님을 모시는 출가수행자로서가 아니라 청정한 삶을 산 한 어르신으로서 진짜로 하고 싶은 법문은? ④다시 태어나도 출가 수행자의 길을 선택하겠는가?'라는 공통된 이 네 가지 주제를 가지고 큰 스님들의 말씀을 연재하려고 시도했지만 이런 사정 저런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해 지금껏 밀린 숙제로 남기고 있었습니다.
여건과 절차를 어쩌지 못해 머뭇거리다 보니 마음먹고 발품만 팔면 찾아 갈 수 있는 큰스님들의 영결식장, 다비장에 드리운 열일곱 선사들의 그림자를 그리려 한 <스님, 불 들어갑니다>(불광출판사)를 먼저 출간하게 되었을 겁니다.
방향은 조금 다르지만 창립 20돌을 맞는 한국불교기자협회에서 <한국의 대종사들>이라는 제목으로 생존해 계시는 어른스님들을 한권의 책에서 뵐 수 있도록 책을 출판해 주니 밀린 숙제를 누군가가 대신 해준 것 같은 반가움도 들고 해보고 싶었던 주제를 빼앗겼다는 아쉬움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출판된 책을 회수해 폐기하라는 요구가 있는 상황이라서 그런지 한편으로는 그런 계획을 미루고 있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 출판 된 책을 회수해 폐기하라고 할 정도의 분이나 단체라면 연애니 어떠니 하는 내용으로 질문을 하거나 게재를 했다는 자체만으로도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대종사들>, 어떤 내용 담고 있나?<한국의 대종사들>은 불교계 언론에 종사하고 있는 전·현직 26명의 기자와 3명의 사진기자가 어른스님 30분을 일일이 찾아뵙고 출가 동기, 수행과정,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등을 듣고 정리한 내용입니다. 출가수행 이력이 40년 이상은 돼야 받은 수 있는 품계가 '대종사' 이니 최소 40년 이상을 수행자로 살아오신 청정한 스님들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듯 들려준 법문이 한권에 담긴 설법의 결정체라 생각됩니다.
지종 대종사께서는 '불법을 모르는 이는 훼불을 못해. 고려말 사찰 재정이 국가보다도 많았던 귀족불교의 폐해를 보고 정도전이 폐불론을 썼듯이, 불교를 잘 아는 사람이 오히려 훼불을 하지. 지금도 사정이 비슷해. 스님들이 청정하게 살지 못해서 인재를 키우지 못하니까 불교를 핍박해도 큰소리를 못 쳐. 자화자책(自禍自責)이니 그들은 나쁘다고 욕할 것도 없어. 우리스스로 정화를 해나가야 해'하며 '내 부처 속이지 말고 언행일치하며 살자고' 하십니다.
승보종찰 송광사 방장이신 보성 대종사께서는 '요즘 종교는 밥장사여. 불교든 기독교든 시주 받아 불사하고 헌금 받아 교회나 짓고 있잖어. 탐심을 못 버린 스님들이 또 돈 빼돌려서 처벌받고, 스님이 세상 잘못된 걸 일깨워야 하는데 거꾸로 됐어. 고려시대 때 불교가 타락해 보조스님이 정혜결사를 한 거 아녀? 오히려 조선조 유생들에게 핍박받을 때가 수행하기가 더 좋았을 거여'라고 하시며 승가의 시속을 힐책하고 계십니다.
또한 '천도 중에 가장 큰 천도가 뭔 줄 알아? 내가 나를 천도 하는 거야. 탐심·진심·치심 삼독을 천도해야 해'라는 말씀으로 수행자는 물론 불자가 추구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도 담겨있습니다.
원명 대종사께서는 '수행이 잘 돼 있으면 화낼 일도 없고, 허물될 일도 없는 거야'라고 하셨고, 강지연 현대불교신문 기자가 찾아 뵌 지관 대종사께서는 '이제는 불자 스스로 자기 비하나 냉소주의를 훌훌 털어버려야 합니다. 냉소와 비하감은 서구 자본주의가 초래한 무의식적 전략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단 내 구성원들은 무게 있는 자산을 자랑스런 터전으로 힘찬 자신감과 건강한 비판 그리고 따뜻한 화합으로 아기고 사랑할 때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씀으로 정리를 하셨습니다.
법주사 회주 혜정 대종사께서는 '옛날 스님들은 하루가 저물면 오늘 깨치지 못하고 허송세월만 했다며 안타까워했어요. 젊어서 선방에 다닐 때는 자는 척 하다가 누가 몰래 일어나 참선을 하면 우르르 따라 일어나 모두가 정진하는 진풍경이 흔했지요'하며 들려주신 옛날의 수행 풍경도 담겨있습니다.
방장이면서도 행자처럼 생활하고 계시는 수덕사 방장 설정 대종사의 이야기도 담겨있고, '불교는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종교'라고 하신 월서 대종사의 말씀도 담겨있습니다.
현해 대종사께서는 목사가 되어 인사를 온 조카에게 들려주었다는 말씀, '천당에 가보니까 귀와 입만 있는 놈들이 있고 지옥에 가보니까 입 없고 귀 없이 몸뚱어리만 있는 놈들이 있어. 성직자들은 만날 좋은 소리만 해서 입은 천당에 가 있는데 실천은 안 해서 몸은 지옥에 가 있고 신도들은 좋은 소리만 들어서 귀는 천당에 가 있고 몸은 실천을 안 해서 지옥에 가 있는 거야'라는 말씀으로 실천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한 분의 어른스님을 뵙기도 쉽지 않은데 이렇듯 당대 선지식이라 할 수 있는 30분의 어른스님께서 옛날이야기 해주듯 들려주고, 할을 외치고 죽비를 후려지듯 건네주신 이야기속의 법문들이 오롯이 담겨 있으니 펼치면 야단법석이고 읽으면 백고좌에서나 들을 수 있는 큰스님 설법을 독대하게 되는 무설전입니다.
전량 회수·폐기? 누워서 침뱉기 될 수도
잡다한 무리들이 이합집산을 이루며 사는 속세에서도 감히 출판된 책을 회수해 폐기하라는 요구는 쉽지 않습니다. 교계의 기자들이 쓴 책이라고 하여 쉽게 판단하면 자칫 종이로 접은 안방호랑이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범인의 기준으로 봐 악의는커녕 커다란 허물이 보이지 않는 책을 놓고 회수나 폐기를 다시 말하는 건 당대의 최고 어른스님들을 속 다르고 겉 다른 속 좁은 노인스님으로 폄하하는 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독자들이 읽고, 독자들이 판단하시길.
덧붙이는 글 | <한국의 대종사들> (한국불교기자협회 / 조계종출판사 / 2009. 12. 7 / 값 1만 8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