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수사관님은 여기 어떻게 오신 겁니까?"
"저는 호텔에서 걸어서 왔어요."
"하하. 무승부군요. 수사에 진척이 많이 있다면서요?"
"수사라면 아무 말도 할 게 없습니다."
"전혀 진척이 없는 모양이군요?"
"지금 나는 수사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럼 평양까지 와서 뭐 하고 있는 거죠?"
조수경은 아무 대답도 없이 몇 번 더 공을 날렸다. 그러고는 선준혁을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나 골프 연습하고 있어요."
다음 날 인터넷으로 국내 신문을 점검하던 조수경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미상불 <조센일보>는 남북합동수사 상황을 특종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 햇볕연쇄살인사건 남북 합동으로 수사 중
국내에서 잠잠하던 햇볕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수사가 남북 합동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본사 기자는 한국의 연쇄살인사건 수사관 두 명이 평양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중략)
한편 남한에서 파견된 수사관들은 수사의 주도권을 북한 인민보안성에게 넘긴 채 수수방관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살 만한 징후들이 포착되었다. 한국 경찰청 범죄분석팀장 조수경 총경(여)은 업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양각도 호텔 골프 연습장에서 한가로이 공을 날리고 있었다.
조수경은 김인철에게 인터넷 기사를 보여 주었다. 그러자 김인철이 웃으며 한가롭게 말했다.
"선준혁이가 한 짓이군요. 한국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골프를 치는 사람과 골프에 적의를 품고 있는 사람이지요."
조수경과 김인철은 며칠 후 서울 경찰청에서 벌어진 일을 알 턱이 없었다. 가뜩이나 수사관 생활에 염증을 느끼는 데다 이혼 문제로 심경이 난마처럼 얽혀 있었던 용 부장은 상관에게 불려가 험악한 질타를 당하게 된다.
"자네는 부인도 골프, 부하도 골프로 말썽을 피우는군."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용 부장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노크도 없이 자기 방에 들어온 선준혁의 코뼈를 한 방의 맨주먹으로 으깨어 버린다.
-빨리 잡지 않으면 더 참혹한 희생자가 생긴다.
그것은 연쇄살인의 정석이었다. 보안서에서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이라서 일찍 해결될 것으로 예상했다가 의외로 시일이 늘어지자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민숙이를 살해한 범인은 여전히 윤곽조차 파악되지 않은 상태였다. 조수경과 김인철은 조금씩 기운이 빠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조수경의 우려대로 또 다른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온천군과 그리 멀지 않은 숙천군의 한적한 논바닥에서 목과 팔 하나가 잘려진 할머니의 변사체가 발견된 것이었다. 북한의 보안요원들은 할머니의 속옷이 벗겨져 있다는 사실에 한층 충격과 의혹에 휩싸였다.
'마침내 북한에도 추잡한 엽기살인이 시작된 걸까?'
조수경은 실제로 목이 뜨거워지는 분노감을 느꼈다.
하지만 할머니의 죽음은 연쇄살인과는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문으로 신원을 확인한 결과 사체는 증산군에 사는 임성녀(67세) 할머니로 밝혀졌다. 부검 결과 신체 부위가 잘려나간 것은 짐승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으로 나왔다. 성폭행 흔적도 없었고 사인을 명확히 밝힐 수도 없었다. 할머니는 평소 치매 증세가 심했다고 했다.
또한 민숙이 사건의 다섯 용의자는 모두 할머니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조수경은 할머니의 죽음은 민숙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판단했다. 최종적으로 할머니의 사인은 짐승의 공격이라고 결론 내려졌다.
그런데 며칠 후 민숙이가 실종되었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서 한 남매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등중학교 3년생인 박옥희(16세)가 1학년인 동생 영식(14세)과 함께 학교에서 귀가하다가 사라진 것이었다. 살인마에 대한 소문으로 공포감이 감돌던 시점에 아이들이 저녁 늦도록 귀가하지 않자 부모는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고 했다. 그리고 보안서에 실종 신고가 접수된 것은 저녁 8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보안서는 가능한 모든 인력을 현장에 보냈고 농업근로자연맹의 회원들도 합류하여 새벽까지 수색을 벌였지만 어두운 들판에서 남매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범죄에 거의 관심 없이 살았던 북한의 시골 사람들은 최근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성격을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안동준의 설명에 의하면, 오후 3시 반경 수업을 마친 옥희는 교정의 김일성 동상 앞에서 동생을 만나 함께 귀가하다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둘이 함께 교문을 나서는 것을 본 친구가 둘 있었는데 그것이 남매의 최후 모습이었다.
실종 상황이 민숙이와 비슷하다고 직감한 조수경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들었다. 하지만 민숙이처럼 어린이도 아니고 또한 남매 두 명이었기 때문에 연쇄범의 소행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수색이 재개되었다. 먼저 발견된 사체는 남동생의 것이었다. 처음 사건의 희생자인 민숙이의 사체가 발견된 지점에서 불과 1km 정도 떨어진 정수장 옆 풀밭에서였다. 남동생은 옷을 입은 채였는데, 두 손이 신고 있던 운동화 끈으로 뒤로 묶여 논두렁에 엎어져 있었다. 목에는 노란 노끈이 감긴 채 억세게 매듭지어져 있었다. 사체 옆에는 하얀 운동화와 가방 두 개가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타살이었다. 부모와 마을 사람들의 실낱같은 기대는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현장에 도착한 김인철과 안동준은 사체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브래지어와 여성 팬티가 조각난 채 뭉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노란색 노끈 조각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범인은 먼저 동생을 죽인 후 누나를 성폭행을 하려고 시도한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람의 이목이 두려워진 범인은 누나를 결박하여 다른 곳으로 끌고 간 것으로 추정되었다.
길 건너 보리밭에서 남자와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두 종류의 발자국이 100m 길이로 나란히 나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두 발자국은 동생의 사체가 발견된 곳에서 야산 방향으로 600m 정도 이어지더니 야산 입구에서 없어졌다. 산 아래로 20m 떨어진 곳에서 남자의 발자국만 다시 나타났다. 두 사람이 야산으로 올라갔다가 한 사람만 내려온 것이 분명했다.
작은 언덕을 넘고 덤불과 나뭇가지들을 헤치고 올라가니 송림 가운데 무덤이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무덤 너머의 소나무 밑동에 무언가 묶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안동준은 음산한 기운에 뒤통수가 쭈뼛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이어 가까이 다가온 보안서 수색팀은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한 참혹한 광경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옥희는 두 손을 노끈으로 결박당하여 소나무 밑동에 묶여져 있었다. 두 발목도 노끈과 스타킹에 묶여 다른 나무에 매어져 있었다. 뒤집혀 걷어 올려진 교복 치마가 얼굴을 덮고 있었고 신발과 스타킹은 모두 벗겨져 있었다. 범인은 벗겨낸 스타킹을 노끈과 함께 사용하여 옥희를 묶은 것이었다. 옥희의 왼손에는 양말이 끼워져 있었고 다른 양말 하나는 입 안에 구겨 처박혀 있었다. 비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옷들이 가위로 잘라져 여러 갈래로 조각나 있었다.
범인은 피해자를 완전히 제압하고 통제한 상태에서 갖은 추행과 고문을 자행한 것이었다. 물론 불필요한 행위의 흔적도 있었다. 그것은 범인이 심리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음을 알려 주는 증거였다.
소녀의 몸에는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 엽기적 행위의 자취가 생생했다. 목, 다리, 가슴, 복부, 음부 등 모든 부위에 칼자국이 나 있었고 강간의 흔적이 역력했다. 더욱 가공할 일은 오른쪽 허벅지 살이 가로 12cm 세로 18cm 크기로 도려내져 있다는 점이었다. 범인은 이른바 살인의 기념품을 챙겨간 것이었다. 그것은 살인의 진화가 이례적으로 빠르게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표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