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인 숫자가 860만명이라는 통계청 발표를 몇 해 전에 접한 바 있다. 그에 반해 일본 기독교인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1% 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그만큼 비율로 따졌을 때는 한국 기독교인의 수가 훨씬 앞선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평가는 누가 더 받고 있을까? 숫자적인 비율로만 봐도 한국 기독교인들이 앞설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일본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란 평가를 받는다. 그들은 양적인 것을 높이 사는 한국 그리스도인에 비해 질적으로 깊고, 교단이나 체제 중심의 외형을 중시하는 한국그리스도인에 비해 내실을 기한다.
더욱이 그들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무속주의와 결합한 기복주의 신앙심에 취해 있는 것과 달리 지극히 순교자적인 신앙심을 고수한다. 굽은 것과 곧은 것을 구분하며, 넓은 길과 좁은 길을 분간하며 취하는 그들이다. 그 까닭에 매가처치와 같은 대형교회를 추구하는 한국교회와 달리 그들은 작지만 하늘나라의 진정한 가치를 중시한다.
그와 같은 일본 기독교의 정점에는 누가 서 있을까? 과연 그들의 신앙심을 신실하게 이끈 리더들은 누구였을까? 우찌무라 간쪼, 가가오 도요히꼬 목사, 나가오 미키 목사 등이 아닐까 싶다. 또한 나약한 배교자들을 꾸짖거나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어머니처럼 품에 품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침묵>의 저자 엔도 슈사쿠도 마찬가지다.
박정배의 <아름다운 침묵>은 나가사키 교회군 순례기로서, 외국 선교사를 추방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독교 탄압정책이 그곳의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옥죄였는지, 그에 맞선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순교했는지 그 생생한 신앙유산을 찾아 나선 기록이다. 물론 엔도 슈사쿠가 쓴 <침묵>의 현장인 소토메(外海)와 21년에 걸쳐 벽돌을 쌓아 올려 지었다는 구로자키교회, 그리고 '엔도슈사쿠문학관'도 엿볼 수 있다.
"영광과 고통과 환희,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신의 침묵. 나가사키를 떠나기 전 이곳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면서 어쩌면 잡지에서 한 장의 사진을 만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10대의 나를 사로잡았던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이 바로 그 땅과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을 때,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짧고 가까운 나의 나가사키 순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서문)
사실 나가사키는 원폭과 개항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나가사키는 일본 땅에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 일본의 로마라 불릴 정도로 교회의 황금시대를 연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토록 찬란했던 황금시대가 지나간 이후 줄곧 순교시대를 견뎌내야 했던 곳이라 한다. 그러한 순교자적인 신앙을 지닌 기독교인들을 일본에서는 '기리시탄'(切支丹)이라 부르는데, 이는 기독교인(Christian)의 포르투갈어인 크리스타오(Christao)에서 유래한 말이기도 하단다.
1612년 가리시탄 금지령이 내려진 이후, 1628년부터는 예수나 성모마리아가 새겨진 작은 판을 의미하는 '후미에'를 밟고 가도록 조치가 내려졌다고 한다. 그것을 밟지 않으면 기독교인으로 체포하고 또 처형시켰다고 한다. 나가사키 순교의 상징이 된 26인의 순교조각상은 그때 신앙의 절개를 지킨 성인들을 추앙한 것이라 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후미에를 밟고 지나감으로써 배교를 했지만, 엔도 슈사쿠는 그들을 향한 신의 연민을 들여다보며 <침묵>을 썼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 책에는 히라도와 이키쓰키 중간에 있는 작은 무인도인 '나카에노시마'가 소개돼 있는데 그 곳은 기리시탄들이 처형된 순교의 땅으로서 그곳에서 솟아나는 물은 세례용 성수로 사용된다고 한다. 아울러 기리시탄들의 순교 이후 꽃 같은 교회들이 피어나는 신앙의 열도인 '고토'라든지, 조선출신의 30명 순교복자비가 있는 '오무라' 등 아름다운 신앙유산을 전수받을 수 있는 곳곳이 소개돼 있다.
그처럼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한 여러 순교지를 보노라면 문뜩 한국의 절두산과 양화진이 떠오른다. 절두산은 가톨릭의 순교지요, 양화진은 외국인 선교사 묘지다. 두 곳은 그야말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성지라 할 수 있다. 서로 맞붙어 있는 그곳을 걷는 모든 이들은 마음이 숙연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침묵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때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들어야 할 침묵의 소리는 무엇일까? 기복주의 신앙 유형이 얼마나 한심한 것인지, 메가 처치나 대형교회를 만들려는 꿈이 얼마나 무가치한 일인지, 교단이나 체제중심의 외형을 추켜세우는 게 얼마나 어긋난 모습인지 스스로 깨닫는 것이 아닐까. 진정한 신앙은 소리와 외형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삶과 내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큰 교회와 교인수를 자랑하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일본 나가사키의 작은 교회군 순교지를 통해 귀담아 들어야 할 신앙유산도 바로 그와 같은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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